인물&역사 11

매국노 고종_ 박종인

황제가 받은 접대비 2만 원 '내탕금(황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용해, 심상훈을 통하여 황제 수중으로 2만 원을 납입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6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일본 외무성 기밀 제119호에 의거해 기밀비 10만 원을 집행했다. 다음은 일본공사관 기록 전문이다. 이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공개돼 있다. 문서에는 지출된 금액을 계산한 메모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지난달 4일 자 기밀 제119호로써 보호권 확립에 관한 조약 체결 등을 위하여 무엇인가 비용을 필요로 하겠기에 기밀비 10만 원을 송부하여 위의 목적에 지출하라는 훈시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신협약 체결 전에 있어서는 당장 이토 대사 내한에 즈음해 궁중 내탕금이 궁핍 상태라는..

인물&역사 2022.12.11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연설_ 박종인

1907년 고종은 이상설을 대표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밀사단은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이었다. 소위 을사보호조약 혹은 을사늑약에 의해 대한제국 외교권은 일본에 넘어간 상태였다. 고종은 그 조약이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이들 세 사람을 파견했다. 1907년 4월 20일 자 고종 서명이 날인된 신임장을 들고 이들은 기차로, 배로, 걸어서 도착한 지구 반대편 도시에서 을사조약이 부당함을 만방에 알렸다. 대표는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은 영어와 프랑스어에 미숙했다. 그래서 함께 간 이위종이 실질적인 대표 역할을 했다. 외국 기자들과 만날 때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이위종이었다. 본회의장에 입장이 불허되자 이들은 외국 기자들 앞에서 회견을 했다. 회견장에서..

인물&역사 2022.06.01

러시아에 속은 고종_ 김용삼

최후의 파천 시도 고종 황제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한 사람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였습니다. 고종이 그와 주고받은 친서는 30여 차례나 됩니다. 친서는 암호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904년 5월 16일 주한 파블로프 공사가 본국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고종 황제가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외무부와의 연락용 암호 통신문이 덕수궁 화재로 소실되었다. 혹시라도 일본이 훔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방비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1903년부터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대한제국을 먹이로 둔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긴박한 시기에 고종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기 위해 경운궁 내에 석조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전쟁의 위기가 임박하자 고종은 이 나라..

인물&역사 2022.02.05

이광수와 최남선의 학도지원 권유_ 정안기

이영재는 조선인 정치세력이 학도지원을 권유했던 사실을 두고 "일제의 대동아 이념 구현이라는 선전도구로 활용"되었던 "부왜노"의 활동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실제로 1943년 11월 윤치호, 이광수, 주요한, 민규식, 박흥식 등은 '학도병종로익찬회'를 결성해 학도지원병 권유를 위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지역별 학교별 간담회 개최, 권유 논설의 게재 등 적극적인 '권전 운동'을 펼쳤습니다. 나아가 이광수, 최남선, 김연수는 '학도지원병권설대'를 결성해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도지원을 권장하는 강연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943년 11월 중순 도쿄의 주오대학에서 개최된 이광수의 강연회에 대해서는 나중에 서울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한 김붕구의 회고가 있습니다. 그가 기억한 이광수는 "경건..

인물&역사 2021.12.12

미국과 중국의 대결장이 된 한국전쟁_ 김용삼

1950년 애치슨 선언의 진짜 의미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3년여에 걸쳐 군정을 실시했던 미군이 1949년 6월 말 철수한 이유는 한국이 자신들의 인력과 비용을 투입해가며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나라', 즉 미국의 국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말 주한미군이 철수한 지 6개월 후인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 미국 정책의 시험대'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이 날 애치슨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거쳐 필리핀으로 그어진다"고 선언했다. 이어 애치슨은 "타이완과 한국은 모두 미국의 방어권 밖에 있다. 다시 말해 미국 방위권 밖의 ..

인물&역사 2021.09.26

김구가 변심한 까닭은?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미 군정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좌우합작 문제가 대두되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의 국공합작과 연관시켜 생각한 탓인지 좌우합작에서 정치적 활로를 찾으려 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의 말로는 공산화라고 결론짓고 좌우합작에 전혀 응하지 않은 채 남한에 임시정부(단독정부)수립론을 들고 나왔다. 김구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어두웠다. 그는 미국이 중대한 국제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한국 문제도 미국의 세계전략에 맞춰 풀어갈 것이라는 이승만의 주장을 납득하지 못했다. 김구는 거시적 안목이 부족했고,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한국 문제가 영향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김구는 임정의 권위를 업고 쿠데타를 통해 미 군정을 무너뜨리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인물&역사 2021.08.06

국왕과 왕비가 직접 관직 팔아먹어_ 김용삼

'일성록'에 따르면 1875년 조선 조정의 1년 세입은 고작 52만 냥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네 차례 청나라 칙사가 조선을 다녀가면서 80만 냥을 임시 지출했다. 재정이 바닥난 조선 정부는 시중 상인들에게 공물 비용을 지급하지 못한 금액이 무려 50만 냥에 달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고종은 외국으로부터 차관 도입, 매관매직, 동전 발행 등 세 가지 방법으로 대응했다. 불행하게도 세 가지 방법 모두 최악의 결과만 가져왔다. 중병 앓는 환자에게 근원적 치료가 불가능하니 일시적인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을 주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1882년 청으로부터 50만 냥의 차관을 최초로 도입했다. 그러나 차관 도입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차관의 도입 대가로 고종은 청 조정에..

인물&역사 2021.06.07

무당과 점술에 미친 고종과 민 황후_ 김용삼

민 왕후는 미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독특한 여성이었다. 이런 여성이 왕비로 들어앉았으니 내전은 역술가, 박수, 무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궁에서 푸닥거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귀한 아들을 세자로 삼기 위해 민 왕후는 청나라의 실력자 서태후와 리홍장에게 엄청난 뇌물을 갖다 바쳤다. 릴리어스 호턴은 민 왕후의 시의로 활동하며 왕실과 가까운 관계였다. 그녀는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된 언더우드와 결혼했는데, 민 왕후는 통 크게 거액의 축의금을 보냈다. 자그만치 현금 100만 냥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재산이 2500~3000냥이면 부유한 축에 속할 때의 일이다. 민 왕후의 정체성은 공과 사, 국가와 집안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왕실이 이처럼 비상식적으..

인물&역사 2021.05.01

위정척사파와 근대국가_ 함재봉

19세기의 위정척사파가 개국과 근대화를 반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주자성리학과 근대국가가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자성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서구식 근대국가 건설은 전형적인 법가식 부국강병의 길이었고 왕도 정치가 가장 경계해야 할 패도 정치로 전락하는 첩경이었다. 왕도 정치가 패도 정치로 전락하는 것은 문명이 야만으로 전락하는 것을 뜻했다. 위정척사파가 꿈꾼 '왕도정치'는 왕을 위시한 국가 엘리트가 사치를 멀리하고 솔선수범하여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삶을 사는 '수기치인'의 정치였다. 치자들은 백성들이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전쟁이나 거대한 토목 사업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해야 했다. 그 대신 예의범절과 미풍양속을 널리 보급하면서 백성들이 향촌에서 가족, 친지, 이웃사촌들과 상부..

인물&역사 2020.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