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록'에 따르면 1875년 조선 조정의 1년 세입은 고작 52만 냥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네 차례 청나라 칙사가 조선을 다녀가면서 80만 냥을 임시 지출했다. 재정이 바닥난 조선 정부는 시중 상인들에게 공물 비용을 지급하지 못한 금액이 무려 50만 냥에 달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고종은 외국으로부터 차관 도입, 매관매직, 동전 발행 등 세 가지 방법으로 대응했다. 불행하게도 세 가지 방법 모두 최악의 결과만 가져왔다. 중병 앓는 환자에게 근원적 치료가 불가능하니 일시적인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을 주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1882년 청으로부터 50만 냥의 차관을 최초로 도입했다. 그러나 차관 도입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차관의 도입 대가로 고종은 청 조정에 조선해관 인사권을 넘겼다. 같은 해 일본도 고종에게 2만 4,000달러 차관을 제공하고 조선해관 수납권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관세 수입이 늘었지만 재정상태 개선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명분으로 1894년 3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하면서 해관세를 담보로 설정했다. 고종은 1894년까지 전신가설, 연안 운항권, 어로채취권, 포경권을 비롯한 각종 이권을 청, 일본, 러시아에 헐값을 받고 넘겼다.
조선 후기 들어 관리에 대한 급여 지급 문제도 심각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국가가 조정대신을 비롯하여 말단 관리와 군인에 이르기까지 봉급을 너무 적게 주거나, 아예 지급할 능력을 상실했다. 국가로부터 봉급이 나오지 않으니 관리들은 굶지 않기 위해, 생존을 위해, 더러는 호의호식하기 위해 백성을 착취했다.
게다가 국왕 부부가 직접 나서서 관직을 돈을 받고 파는 매관매직이 횡행했다. 조선왕조에서 국왕이 매관매직을 행하는 것은 성리학적 왕정윤리가 중앙정치를 강하게 규제했던 18세기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일은 권문세가의 은밀한 특권이었다. 고종 시대에 국왕이 직접 매관매직에 앞장선 사례는 재정 위기라는 경제적 요인 외에, 국왕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건전한 비판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왕 부부는 수령을 교체할 때마다 먼저 여러 명에게 임시 직함을 돈을 받고 판 다음 실제 직함을 팔았다. 매관매직을 활성화하기 위해 고종과 민 왕후는 액수까지 책정해놓았다. 1886년 서울에 부임한 헐버트 선교사는 모든 관직은 그 가격이 결정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관찰사 자리는 5만 달러 정도라고 기록했다.
감사와 유수 자리는 엽전 100만 꾸러미에서 40만~50만 꾸러미, 처음 관직에 나서는 초사는 5,000~1만 꾸러미였다. 과거시험도 돈을 받고 합격자를 냈다. 대과는 5만~10만 꾸러미, 생원과 같은 소과의 경우 2만~3만 꾸러미로 등급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고종은 매관매직의 수입을 높이기 위해 지방관의 재임 기간을 가능한 짧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자리를 팔았다. 관직을 판 수입은 정부의 공식재정이 아니라, 고종과 민 왕후의 비자금 회계 수입으로 들어갔다. 국왕은 관직을 파는 수익을 늘리기 위해 정신없이 수령을 교체했다. 잠시 제수했다가 곧바로 해임했고, 심지어 지방관이 취임하기 위해 임지에 내려가는 도중에 그를 해임하고, 후임자를 내려보내는 일도 있었다.
당오전 발행하여 경제 붕괴
궁중의 주방에 각종 식재료를 조달하는 명례궁 예산은 국왕과 왕비의 하사금이 88%, 정부 예산은 5%에 불과했다. 궁중에서 벌인 국왕 일가의 살림살이가 거의 전적으로 국왕 내외가 사적으로 취득한 수입으로 꾸려졌다. 명례궁의 수입부에 따르면 국왕과 왕비의 하사금 출처는 1882년부터 발행된 당오전이었다. 서울과 강화도에서 주조된 당오전은 상당액은 정부의 공식재정에 편입되지 않고 명례궁 창고로 직행하여 왕실 생활비로 지출되었다.
당오전을 재원으로 하는 국왕과 왕비의 하사금에도 불구하고 명례궁 수지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1893년 명례궁의 연간 지출은 444만 냥이었는데, 수입은 290만 냥이었다. 1년 동안 150만 냥 이상 적자가 발생한 것이다. 명례궁의 재정은 1870년대부터 만성적 차입 상태였다. 특히 1883년 이후 차입 규모가 급증하여 1892년까지 누적 채무가 총 68만 냥에 달했다.
이처럼 대규모 적자가 발생한 이유는 궁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벌인 연회와,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을 불러들여 굿이나 푸닥거리에 엄청난 비용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명례궁 지출부에 따르면 1893년 1년 동안 총 29회 고사와 다례를 행했다. 왕실이 조정의 관료나 외국 빈객을 대상으로 한 음식의 하사도 37회 열렸다.
이러한 고사와 다례, 음식 하사가 벌어지는 날이면 으레 궁중 후원에서 대규모 푸닥거리나 향연, 가무, 음주가 행해졌다. 무분별하고 방만한 왕실 재정 지출의 폭발적 증가가 막대한 부채를 야기했다. 1907년 수진궁이 그때까지 시전상인들에게 물품을 납품 받고 대금을 지급하지 못한 빚이 8만 9,000엔, 동전으로 환산하면 89만 냥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고종은 재정난 타파를 구실로 당오전 주조를 강행했다. 하지만 고종의 어명으로 시작된 당오전 발행은 가뜩이나 어려운 조선 경제에 치명상을 입혔다. 당오전은 동전 한 개가 그동안 사용해왔던 상평통보의 다섯 배 가치를 가졌다. 명목가치는 상평통보의 다섯 배였으나, 시중에서는 상평통보와 동일한 가치로 통용되는 악화였다. '당오'라는 글자를 새겨 엽전 한 잎의 가치를 다섯 배로 뻥튀기한 것이다.
이처럼 명목가치와 실제가치가 큰 차이가 나자 지방관들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백성들에게 조세를 거둘 때는 상평통보로 거두고, 국고에 납부할 때는 당오전 액면가로 납부했다. 그에 따르는 시세 차액은 관리들이 착복하는 등 파행과 기행이 만연했다.
1876년 개항을 전후하여 전국의 동전 유통고는 2,000만 냥 전후였으나, 1893년의 유통고는 7,000~8,000만 냥이었다. 1882년부터 1893년까지 당오전 발행 규모는 대략 5,000만 냥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대량의 당오전이 제조 유통되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전가되었다. 서울의 경우 찹쌀 1석(144kg) 가격은 1882년 18냥에서 1894년 144냥으로, 같은 기간 소금 1석은 5냥에서 40냥으로 치솟았다. 당오전 발행에 따른 물가 상승은 평균 8배에 달했다.
주전권, 민씨 일파가 장악
조선의 통화는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전이었다. 이 동전 10문이 1전, 10전이 1냥, 10냥이 1관이었다. 당오전이 발행되기 전에는 은화 1원이 3냥에 교환되었는데, 당오전 발행 이후에는 인플레가 극심해져 은화 1원이 20냥으로 껑충 뛰었다. 당오전 발행 이전까지 일본 엔화에 대한 조선화폐의 가치는 1엔 대 2.5 정도였으나 당오전이 통용된 이후에는 1대 8로 급락하면서 무역수지에서도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1892년 조선 조정이 발행하다가 1902년 발행을 중단한 '2전 5분'짜리 백동화가 있었다. '두 돈 오 푼' 백동화라 불린 이 동전은 당시 가장 값싼 제작비로 대량 제조할 수 있는 화폐였다. 실제 가치는 3푼 정도밖에 안 되는 금속으로 명목가치 두 돈 오 푼짜리 백동화를 마구 찍어냈다.
만드는 방법도 엽전보다 쉬웠다. 백동화 발행으로 인한 7배 이상의 차익은 모두 왕실로 흘러갔다. 대한제국 정부는 1896년 총예산 중 26.6%인 128만 원을 백동화 제조로 창출한 이익금으로 충당했다.
동전 발행과 관련하여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당오전을 찍어내는 주전권이 누구 소유냐 하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의 주전소는 서울 삼청동, 평양, 강화도 등 세 곳에 있었다. 서울 주전소는 민태호 관할이었다. 평양은 민응식이 차지했고, 강화도는 민씨 세력과 긴밀한 조영하였다. 국가의 재정 권력이 민씨 일파에게 집중된 것이다.
전환국 총판 묄렌도르프는 민씨 척족 세력과 손잡고 당오전을 맹렬하게 주조했다. 당오전은 고종 일가와 민씨 척족 세력에게는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다른 편에선 거의 모든 조선 백성들의 삶이 지옥의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당오전 발행, 조영 신조약의 체결의 실무를 담당한 묄렌도르프는 고종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다. 이것이 당시 조선의 숨길 수 없는 민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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