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역사

김구가 변심한 까닭은?

정정진 2021. 8. 6. 22:03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미 군정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좌우합작 문제가 대두되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의 국공합작과 연관시켜 생각한 탓인지 좌우합작에서 정치적 활로를 찾으려 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의 말로는 공산화라고 결론짓고 좌우합작에 전혀 응하지 않은 채 남한에 임시정부(단독정부)수립론을 들고 나왔다.

 

김구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어두웠다. 그는 미국이 중대한 국제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한국 문제도 미국의 세계전략에 맞춰 풀어갈 것이라는 이승만의 주장을 납득하지 못했다. 김구는 거시적 안목이 부족했고,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한국 문제가 영향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김구는 임정의 권위를 업고 쿠데타를 통해 미 군정을 무너뜨리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언더우드는 김구에 대해 "거칠고 접근하기 어렵고, 무자비하며 비민주적"이라고 평했다.

 

미 군정 사령관 하지는 1948년 3월 1일 본국의 훈령에 의해 5월 9일(후에 5월 10일로 조정)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를 접한 이화장과 이승만 지지 세력은 열광했으나 공산당은 물론 남한 단독 선거를 반대해 온 김구와 김규식은 일대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만나 진지하게 토의하면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며 꿈과 희망을 가지고 남북협상에 나섰다.

 

김구와 김규식 등 임정계는 1948년 1월 중순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김구는 1947년 12월 1일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1월 25일에도 김구는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라고 총선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다음 날인 1월 26일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두 나라 군대가 철수한 후 총선거를 해서 통일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라고 급제동을 걸고 나섰다.

 

김구가 건국을 앞둔 상황에서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인 이유는 임정의 주불 외교위원이었던 서영해와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성시백에게 포섭당했기 때문이다. 김구의 추종자였던 조경한은 "서영해가 나타나 '남북한을 통틀어 총선거를 하면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실텐데 무엇 하러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선거에 참여하려 하십니까. 김일성도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변심하게 되었다"라고 증언했다.

 

1997년 5월 26일 자 북한 '로동신문'은 성시백의 김구 공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성시백 동지는 4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공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서 참석한 회의는 두 사람이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 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 지도자 간의 정치 협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양에서의 회의는 모든 것이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이 채택되어 있었다.

 

회의 마지막 날인 4월 23일 남북 대표자들은 '남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전 조선 동포에게 격함', '남조선 단선단정 반대투쟁 대책에 관한 결정서', '미소 양국 정부에 보내는 전 조선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요청서' 등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조언을 제공할 데 대하여" 라는 4월 12일 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낀 것이다.

 

1948년 7월 11일, 자유중국의 류위완 총영사는 김구와 비밀리에 만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지하기 바란다는 장제스 총통의 뜻을 전했다. 이날 류위완 총영사는 김구에게 왜 건국을 반대하는지를 물었다. 김구는 자신의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간 조선인 붉은 군대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 사이에 남한이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공산군의 현재 병력만한 군대를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러시아인들이 손쉽게 남쪽을 기습할 것이며, 당장 남한에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이 대화록을 보면 김구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조만간 남침하여 공산정권을 세울 것이 분명하니 굳이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의 통일정부 수립 주장은 군사력이 우월한 북한의 인민공화국에 남한이 편입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국민을 기만한 것이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노선과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은 정치에 있어서의 현실과 이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와 관련하여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백범(김구)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상에만 충실하려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하기는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일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 무조건 백기를 들고 공산주의자들 앞에 항서를 썼더라면,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적화 통일의 길이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요구하고 있던 것은 민주 진영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막기 위해 우선 어떤 형태로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냐 또는 공산주의냐 하는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그 다음으로 미루어 민의에 맡기거나, 또는 민주 진영과 공산당의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최선의 길처럼 생각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시기의 늦고 빠름은 있더라도 공산화라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2차 대전 후의 동구 제국이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백범이 추구하던 노선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야기 1948_ 강규형 김용삼 남정욱 정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