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역사

이광수와 최남선의 학도지원 권유_ 정안기

정정진 2021. 12. 12. 16:49

이영재는 조선인 정치세력이 학도지원을 권유했던 사실을 두고 "일제의 대동아 이념 구현이라는 선전도구로 활용"되었던 "부왜노"의 활동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실제로 1943년 11월 윤치호, 이광수, 주요한, 민규식, 박흥식 등은 '학도병종로익찬회'를 결성해 학도지원병 권유를 위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지역별 학교별 간담회 개최, 권유 논설의 게재 등 적극적인 '권전 운동'을 펼쳤습니다. 나아가 이광수, 최남선, 김연수는 '학도지원병권설대'를 결성해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도지원을 권장하는 강연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943년 11월 중순 도쿄의 주오대학에서 개최된 이광수의 강연회에 대해서는 나중에 서울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한 김붕구의 회고가 있습니다. 그가 기억한 이광수는 "경건한 태도로 민족의 구원을 설교하던 그 병고에 시달린 상기된 얼굴, 미열에 손발이 바르르 떨리는 듯하고 금시 쓰러질 듯이 숨 가쁜 고행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광수는 "일제가 모진 고문 끝에 무슨 혼을 빼는 주사라도 놓은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성심성의를 다하여 학도지원을 권유하였습니다. 김붕구는 "그의 애국과 민족주의엔 티끌만큼의 위선도 없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민족의식이라는 병을 앓았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이광수는 어차피 가야 할 학도지원병이라면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 장차 조선인의 발언권을 확보하여 각종 차별을 해소하는 길이며, 이 기회를 살려서 군사기술을 배우는 것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장래를 대비하는 일이라 갈파했습니다.

 

김우전의 증언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나갔다가 탈영해 광복군에 투신한 분입니다. 해방 이후엔 김구선생의 비서,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그리고 제16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2014년 10월 20일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년기 이래 이광수의 소설 '흙'과 '그의 자서전'등을 탐독하면서 민족의식을 각성하고 근대적 자아를 발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1943년 11월 리쓰메이칸대학 법과 재학생으로 교토에서 열린 이광수의 강연회에 참석했습니다. 이광수는 "당신들이 희생하고 공을 세워야 우리 민족이 차별을 안 받고 편하게 살 수 있다. 조선 민족을 위해 전쟁에 나가라"고 권유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우전은 "이 분이 역시 민족의식이 있구나, 민족을 사랑한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조선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고민이 담겨 있었어요"라고 회고하였습니다. 민족의 장래를 고민한 이광수의 절박한 심정은 최남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3년 11월 도쿄 메이지대학에서 개최된 강연회에서 최남선은 "(학도지원이) 우리 민족을 위하는 길이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민족에 대한 예우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안심하고 입대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얼마나 열변을 토했던지 "허리띠가 끊어져 버리는 줄도 몰랐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강영훈은 당시 만주국의 건국대학에 재학하는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학도지원 문제를 상의하고자 최남선을 찾았습니다. 최남선은 제자들에게 "우리 민족의 자치를 위해, 나아가서 독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무력을 양성할 호기로 생각한다. 이 기회를 우리는 활용해야 한다"며 간곡하게 권유하였습니다. 그래서 건국대학의 조선인 학생은 한 명도 빠짐없이 학도지원에 나섰다고 합니다.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심중

 

이영재는 친일파의 거두로 알려진 조병상의 차남 조문환을 거론했습니다. 친일파의 아들 조문환조차도 일본인 학교장과 주위의 권유를 받아야 했다며, 강제동원의 피해자라 강변했습니다. 조문환은 1943년 10월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생으로 학도지원병을 자원했고, 1944년 1월 일본군 제59사단에 입영했습니다. 1949년 5월 조문환은 친일경력으로 반민특위에 피소된 부친 조병상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당시 육군 중위 신분이었던 조문환은 학도지원 동기를 추궁하는 심문에 "주위의 권유도 있었지만, 전쟁의 실상을 확인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겠다"고 결심해 학도지원에 나섰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재는 "주위의 권유"를 곧바로 '식민권력의 개입'으로 바꿔치기해 '강압에 의한 지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조선인 유력 인사의 자제들 가운데 학도지원자는 조문환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간디"로 칭송을 받았던 조만식의 차남 조연욱(연희전문)을 비롯해 조선인 최초의 중의원 의원 박춘금의 차남 박춘웅(릿교대학), 귀족원 칙선의원 이진호의 장남 이한직(게이오대학)등 다수에 달했습니다. 조만식의 차남 조연욱은 아버지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학도지원병을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조만식은 "이 땅에도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씩씩한 무인의 대오가 다시 소생했다"며 아들의 용단을 칭찬하였습니다. 앞의 조병상도 반민특위 재판에서 "이를 기회로 삼아 조선 민족의 상무정신을 회복하고, 정치적으로 민족적 차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조만식과 같은 민족지사든 조병상과 같은 친일파든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낸 것은 이를 호기로 삼아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를 신장하고 나아가 군사기술을 습득하여 민족의 독립에 대비하겠다는 심중의 결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탈영자의 허위의식

 

지난 글에서 밝힌 대로 학도지원병으로서 일본군에서 탈영한 사람은 모두 197명입니다. 탈영 동기는 폭력이 횡행하고 병영 생활에 대한 부적응, 간부후보생 탈락에 따른 비관 그리고 죽음의 공포 등이었습니다. 이영재는 저의 그 같은 주장을 "실증적 사료 편취의 헛발질"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는 학도지원병에 관한 행정안전부의 보고서에 입각하여 탈영자는 89명이며, 탈영 동기는 충만한 민족의식 때문이라고 강변하였습니다. 제가 파악한 탈영자의 수 197명과 그들의 탈영 동기는 국가기록원이 소장하는 '병적전시명부'로부터 집계, 분석한 것입니다. 이영재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기존의 속설을 앵무새처럼 읊었을 뿐입니다.

 

이영재는 일본의 패전을 예감하고 광복군에 투신하고자 학도지원병을 자원했다는 김준엽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김준엽은 '장정'이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오직 우리의 독립군으로 가서 조국의 주권을 되찾고 이 불쌍한 동포들을 해방시키는 위업에 참가하려는 일념"에서 학도지원을 결심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학도지원 단계에서 이미 탈영을 결심하고 주머니칼, 지도, 중국어책, 나침판, 사진, 자금을 준비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입대도 하기 전에 어느 지역의 어느 부대에 배치될 줄 알아서 탈영을 기획했단 말입니까. 김준엽이 소속했던 한광반 학병동지회도 1979년에 출간한 '장정육천리'라는 회고록에서 "우리 학병은 초년병 훈련을 받으면서도 우리들이 어느 전선으로 배치될 것인가에 온 신경을 썼다. 그것이 중국대륙 전선이 될지, 남방 어느 섬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김준엽은 평북 강계 출생으로 1940년 전후 신의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대학 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신의주라면 얼마든지 지척의 압록강을 건너서 광복권에 투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학도지원이라는 번거로운 수속과 탈영이라는 큰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얼핏 들으면 참으로 감동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한 민족의 스승'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한, 영웅담입니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따지면, 기억과 망각의 정치성이 개입된 허위의식으로 포장된 황당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욕을 먹더라도 연구자라면 지적해야 할 역사의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탈영 학도의 시대적 분투

 

이영재는 일본군에서 탈영하여 광복군에 들어간 학도들을 "어떤 세대보다도 조국의 미래를 최우선으로 고민한" 독립투사로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학도지원병 총 3,050명 가운데 탈영자 197명을 제외한 비탈영자 2,853명은 무엇입니까? 조국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덜한 자들이거나 일본군 장교로 출세하고자 한 반민족 친일파에 불과했던가요? 이영재의 탈영자 평가는 그 같은 논리적 귀결성을 갖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국내에 머물면서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감수하면서도 근대문명을 학습한 실력양성론자들을 친일파로 몰았던 것과 동일한 논리입니다.

 

대다수 비탈영 학도지원병은 일본군 병영 생활의 혹독함을 견디면서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생사를 가르는 실전을 경험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이들 비탈영 학도지원병은 군사영어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대한민국의 장교로 임관하였습니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 출신자 110명 가운데 68명이 비탈영 학도지원병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6.25 전쟁에서 새로운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낸 핵심 전력이었습니다. 1951년 5월 제6사단장으로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을 격파한 장도영 장군을 필두로 하여  제12대 육군참모총장 최영희, 제16대 육군참모총장 민기식, 제18대 육군참모총장 김계원, 제6~10대 국회부의장 장경순, 제21대 국무총리 강영훈, 초대 특전사령관 조문환 등이 비탈영 학도지원병 출신이었습니다.

 

저는 일본군을 탈영한 학도지원병의 시대적 분투를 매도한 적이 없습니다. 나름의 각오가 없이는 결행하기 힘든 것이 전쟁 중의 탈영입니다. 거기에 조국의 미래를 고민한 '시대적 분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과대 포장해서는 곤란합니다. 몇 사람의 탈영 행위를 학도지원병 전부의 지향인양 분석해서는 곤란합니다. 몇 개월에 그친 광복군 생활을 민족 투사의 그것으로 영웅시해서도 곤란합니다. 최근 학도지원병을 독립운동가로 승격하고자 하는 정부 일각의 움직임이 일고 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 책 25장의 내용이기도 합니다만,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광복군이 개선군으로 입경한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해방된 것은 독일, 일본 등의 전체주의 체제를 해체한 '자유의 큰 물결'이 한반도 남부에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그 물결을 타고 세워진 나라입니다. 진정한 독립운동가는 그 물결을 한반도로 인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제25장을 참고해 주십시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나라가 건립되자 이 땅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구 일제하에서 어떤 처지에 있었든 각자 자신의 역량과 포부로 새로운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탈영자 김준엽이 역사학자로서 봉사하였다면, 비탈영자 조문환은 군인으로서 봉사하였습니다. 김준엽만이 조국의 미래를 위해 시대적 분투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친일파의 아들 조문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영재는 저에게 학도지원병, 특히 탈영자들의 시대적 분투를 매도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비탈영자들의, 나아가 그들을 전선으로 보낸 이광수 등 "친일 내셔널리스트"의 시대적 분투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각으로 재평가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_ 이영훈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