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애치슨 선언의 진짜 의미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3년여에 걸쳐 군정을 실시했던 미군이 1949년 6월 말 철수한 이유는 한국이 자신들의 인력과 비용을 투입해가며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나라', 즉 미국의 국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말 주한미군이 철수한 지 6개월 후인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 미국 정책의 시험대'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이 날 애치슨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거쳐 필리핀으로 그어진다"고 선언했다. 이어 애치슨은 "타이완과 한국은 모두 미국의 방어권 밖에 있다. 다시 말해 미국 방위권 밖의 일에 대해서 미국은 관여하지 않을 것" 이라고 선언했다.
애치슨 선언의 핵심 내용은 우리가 상식의 선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북한 침략의 초대장이라기보다는 미국이 공산중국의 마오쩌둥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새로운 중소동맹 조약 체결을 위해 70여 일에 걸친 길고 지루한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미국은 마오쩌둥에게 스탈린의 야욕을 폭로하고, 소련보다는 미국과 손잡고 협력하는 것이 중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애치슨 선언이었다. 미국은 애치슨 선언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떼어놓으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애치슨은 먼저 중국의 혁명에 대한 긍정적 평가부터 시작하여 한국과 타이완을 미국의 도서방위선에서 제외함으로써 한국과 타이완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선언을 재확인했다. 다시 말하면 마오쩌둥이 소련을 포기하고 미국과 손을 잡는다면 남한이나 타이완 정도는 공산세력에게 넘겨줄 용의도 있다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을 향한 미국의 구애작전은 헛물을 켜고 말았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3월 4일까지 모스크바에서 70여 일에 걸쳐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새로운 중소동맹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장이 된 한국전쟁
19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인해 6.25가 터졌을 때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나라" 라면서 한반도를 떠났던 미군은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불과 며칠 만에 전광석화처럼 참전을 결정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시작된 냉전에서 한국이 공산화될 경우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가 공산화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보지 않았다. 게다가 장제스와의 국공내전에서 오랜 기간 양측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싸워 국력이 고갈되기를 바랐으나 소련의 도움 없이 간단하게 장제스를 제압하고 공산통일을 이룬 데 대해 깊은 충격을 받았다.
마오쩌둥의 중공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간파한 스탈린은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요청하자 이 전쟁을 이용하여 미국과 중공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다음, 두 나라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게 한다는 대모략을 구상한다. 소련은 미국이 한반도에 묶여 있는 틈을 이용하여 동유럽을 비롯한 지구 곳곳에서 공산화를 추진하여 국익을 극대화한다는 아이디어였다.
스탈린의 교묘한 술수로 인해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김일성의 남한 해방은 계속 지연된다. 서울 점령에 사흘이나 걸린 점, 서울 점령 후 사흘 간 한강 도하가 지연된 사실, 방호산이 지휘하는 인민군 6사단이 미군이나 한국군이 전혀 없어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호남지역을 우회하여 시간과 병력을 낭비한 사실, 전쟁 초기와 낙동강 전투 때 중공군이 개입하지 못하고 인천상륙 이후,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하자 한반도로 넘어온 사실 등은 한반도에서 미, 중 대결을 일으켜 양국의 발목을 잡기 위한 스탈린의 대모략이 연출한 드라마틱한 결과였다.
만약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대한 불법 개입이 남침전쟁 초기, 즉 낙동강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시작됐다면 김일성은 1950년 8월 15일 무렵엔 부산까지 공산통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남침 초기에는 미국과 소련의 전쟁이었던 6.25는 유엔군의 북진이후 미국과 중공 간의 전쟁으로 변했다. 이제 출범한 지 1년도 안 되어 모든 것이 부족했던 마오쩌둥의 공산중국은 한반도에서 막대한 국력을 소진해가며 미국과 힘겹게 싸워야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싸우도록 유도함으로써 중국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저지했다. 또 전후 오랫동안 미, 중 양국이 적대관계가 되도록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한국전을 통해 중국과 미국의 관계 개선에 재를 뿌리려는 스탈린의 전략적 목표는 훌륭하게 달성되었다.
스탈린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 세계체제에서 완전 고립되어 20여 년 이상을 '죽의 장막' 속에서 자력갱생하느라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도 따지고 보면 한국전 개입이 몰고 온 대재앙이었다.
박정희 혁명 2_ 김용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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