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파천 시도
고종 황제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한 사람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였습니다. 고종이 그와 주고받은 친서는 30여 차례나 됩니다. 친서는 암호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904년 5월 16일 주한 파블로프 공사가 본국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고종 황제가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외무부와의 연락용 암호 통신문이 덕수궁 화재로 소실되었다. 혹시라도 일본이 훔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방비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1903년부터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대한제국을 먹이로 둔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긴박한 시기에 고종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기 위해 경운궁 내에 석조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전쟁의 위기가 임박하자 고종은 이 나라 저 나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파천 교섭을 벌였습니다. 1904년 1월 21일 파블로프 공사는 본국 외무부에 "대한제국 황제가 일신상 위험이 있을 경우 불가피하게 러시아공사관에 피신처를 구하거나 러시아로 탈출하는 문제에 대해 협조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해 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1904년 1월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가 사망하였습니다. 파블로프의 보고에 의하면 고종은 효정왕후의 시신을 운구할 때 러시아공사관 담장 샛문을 통해 대궐을 탈출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고종의 '제2차 아관파천'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일본군이 한국에 상륙하자 고종은 전시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을 지지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외교 관례에 따라 대한제국의 공문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자 고종은 "영국이 대한제국의 중립을 보장한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생길 경우 영국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 지를 조던 주한 영국공사에게 타진합니다. 물론 영국 정부는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중립 선언이 국제적 승인을 얻지 못하자 고종은 서울지역만이라도 중립을 유지하자는 제안을 주한 프랑스 공사에게 합니다. 이 무렵 서울 외교가에는 주한 프랑스공사관 내에 고종과 그의 측근들이 묵을 온돌방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때를 맞춰 무장한 프랑스 해군 39명과 장교 2명이 입국합니다. 고종이 프랑스공사관에 정식으로 파천을 요청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이 뤼순 요새를 함락한 지 보름 후인 1905년 1월 19일 알렌 공사는 또다시 고종으로부터 파천 요청을 받았습니다. 알렌은 "황제가 우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사관 담을 넘어오더라도 쫓아내겠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였습니다. 고종의 습관성 파천 시도를 두고 알렌 공사는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다녀 보고 4000년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고종은 1882년 이후 적어도 7차례 이상 5개국 공관으로부터 파천을 시도하였습니다. 그중 1회는 성공하였고, 6회는 실패하였습니다. 이상이 김종욱과 황태연이 개명 항일군주라고 칭송하는 고종의 행태였습니다.
러시아에 속은 고종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았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1907년 일본과 러시아는 외교적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상당한 대가를 취하지 않고서는 일본의 한국병합을 승인할 수 없으며, 기존의 보호권마저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세를 보입니다. 대립이 격화하자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이용하여 일본에 타격을 가할 작전을 준비합니다. 김종욱은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불사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합니다만, 역사의 진실은 그와 판이합니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무지한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운명을 놓고 협상을 벌이고 있음을 알지도 못한 채 러시아에 지속적으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때마침 니콜라이 2세가 주창한 만국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열리게 되고 러시아가 의장국을 맡았습니다. 러시아는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유도하였습니다. 그에게 헤이그 평화회의 소식과 함께 이 기회에 일본의 내정간섭을 열강에 알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첩보를 흘립니다. 귀가 번쩍 뜨인 고종은 서울의 프랑스어학교 교사 마르텔을 통해 헤이그 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대표가 참석할 수 있도록 초청을 요구하는 친서를 러시아에 보냅니다. 러시아 정부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대표를 초청한다"며 답신을 보내는 한편, 동 회의의 러시아 대표위원 넬리도프에게 "한국의 헤이그 특사 파견에 관해 모든 협조를 하라"는 훈령을 보냅니다.
니콜라이 2세와의 우의를 믿어 의심치 않은 고종은 1907년 4월 밀사를 파견하였습니다. 반면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 곳곳에 침투한 밀정들을 통해 러시아의 초청장 발송, 고종의 밀사 파견 등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고종이 파견한 밀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습니다. 평화회의는 6월 15일에 개회되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밀사 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6월 24일,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과 러시아의 교섭은 극적인 타결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러시아 정부는 즉각 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에게 "한국 특사들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하라"는 수정 훈령을 발하였습니다. 동시에 러시아 외무부는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사실을 일본에 통보하였습니다.
고종의 밀사 파견이 언론에 보도되자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내정을 장악하기로 정하고 그 실행을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일임했습니다. 이토 통감은 일본의 보호권을 무시했다는 이유를 들어 고종을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협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었습니다. 일본인이 대한제국의 고위관리로 임명되는 등, 대한제국의 행정권과 사법권은 사실상 통감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제3차 한일협약이 조인된 지 6일 후인 1907년 7월 30일, 러시아 외상 이즈볼스키와 주러시아 일본대사 모토노 이치로는 제2차 러일협약에 조인하였습니다. 이 협약에서 두 나라는 대한제국과 외몽골을 각자의 특수이익지역으로 상호 인정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은 망국의 걸음을 재촉하였을 뿐입니다. '불멸의 항일 충의'라니요? 너무 심한 역사 기만이라 할 말을 잃을 정도입니다.
고종의 국가의식
헤이그 밀사 파견이 성과 없이 끝나자 고종은 니콜라이 2세에게 러시아로 정치적 망명을 타진합니다. 러시아는 포츠머스강화조약의 준수와 극동의 질서를 강조하면서 고종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1910년 6월 3일 일본 정부는 한국을 병합할 방침을 결정합니다. 8월 22일 병합조약이 체결되고, 8월 29일 순종 황제는 일본 황제에게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영구히 양도하기로 했음을 그의 백성에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의 신민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저항할 기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절망적 상태를 두고 당시 나이 35세의 이승만은 숨이 끊어져 가는 환자에 비유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30일자 영국의 잡지 이코노미스트지는 "한국은 차라리 외국으로부터 현대적 행정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것이 국민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도하였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지배하면 대한제국의 황제는 권력을 남용하여 국민을 착취하지 못하며, 양반도 더 이상 백성을 착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합병이 되면 한국이라는 국가는 없어지지만, 그의 국민은 일본의 지배 하에서 보다 잘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종욱은 "1894년 7월 일제의 경복궁 침탈로부터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당할 때까지 고종은 백성과 함께 일제에 맞서 25년을 싸웠다"고 주장합니다. 고종이 그렇게 싸웠다 칩시다. 무엇을 위해 싸웠나요?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은 아닙니다. 고종에게 있어 국가란 중화제국의 국제질서에서 제후로 봉함을 받은 왕가였을 뿐입니다. 그에게서 국가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으로 왕업이었을 뿐입니다.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배함과 동시에 보호하는 통합적이고 쌍무적인 질서로서 국가의식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새로운 종주국을 찾아 끊임없이 남의 나라 공관으로 피신할 궁리만 했던 것입니다.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갑옷을 입고, 그의 왕국을 죽음으로 지킨다는 의지는 발상조차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충직한 신하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뒤통수치며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렇다고 가산으로서 왕업을 지킨다는 고종의 필사적인 노력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일족은 왕공족의 신분으로 일본 황실에 편입되어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가 망해 가는데도 조정의 대신도, 지방의 양반도 거국적 항쟁으로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제후국의 대부와 사로서 그들에게는 스스로 지켜야 할 가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것은 아무런 가산도 보유하지 못한 무지렁이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지배자 일본을 맞아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예측은 이후 전개된 35년의 역사를 볼 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_ 이영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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