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역사

무당과 점술에 미친 고종과 민 황후_ 김용삼

정정진 2021. 5. 1. 11:16

민 왕후는 미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독특한 여성이었다. 이런 여성이 왕비로 들어앉았으니 내전은 역술가, 박수, 무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궁에서 푸닥거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귀한 아들을 세자로 삼기 위해 민 왕후는 청나라의 실력자 서태후와 리홍장에게 엄청난 뇌물을 갖다 바쳤다.

 

릴리어스 호턴은 민 왕후의 시의로 활동하며 왕실과 가까운 관계였다. 그녀는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된 언더우드와 결혼했는데, 민 왕후는 통 크게 거액의 축의금을 보냈다. 자그만치 현금 100만 냥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재산이 2500~3000냥이면 부유한 축에 속할 때의 일이다. 민 왕후의 정체성은 공과 사, 국가와 집안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왕실이 이처럼 비상식적으로 재물을 낭비하는 바람에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국고는 완전 바닥이 났다.

 

민 왕후는 임오군란 당시 간신히 궁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에서 은거하던 중 박창렬이란 신들린 무당을 만났다. 이 무당은 민 왕후의 환궁 날짜를 예언했는데, 신통하게도 이것이 적중하여 왕비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임오군란이라는 미증유의 반란이 진압되어 환궁할 때, 민 왕후는 이 무당을 궁궐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무당이 "나는 관우의 딸이니 신당을 지어 정성껏 받들라"라고 주술했다. 무당은 궁궐 가까이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면 관우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고 왕비를 현혹했다. 민 왕후는 무당을 진령군으로 봉하고, 노론의 거두 송시열 집터에 북관왕묘란 사당을 지어주었다.

 

진령군은 김창렬이란 수양아들과 이곳에 살았는데, 그가 진령군의 내연남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요사한 무당은 아무 때나 궁궐에 들어가 고종과 민 왕후를 만났고, 국왕 부부에게 금은보화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받았다. 진령군은 주술의 이름으로 인사에 개입했고, 무당의 수양아들은 벼슬아치들과 어울렸다. 이른바 조선시대판 국정농단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고종과 민 왕후는 무당 진령군의 말이라면 들어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밤에 무당이 고종과 왕비에게 한 말은 다음 날 어김없이 어명으로 내려왔다. 한 나라의 국왕 부부가 주술에 기대어 왕조를 통치한 것이다. 참다 못한 전 형조참의 지석영은 "사람들이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황현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 대신들이 앞다투어 무당에게 아부하니, 자매라 부르기도 했고 혹은 수양아들이 되기를 원하기도 했다. 조병식, 윤영신, 정태호가 특히 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진령군은 갑오경장 때 사형을 선고받고 목이 잘렸다.

 

고종의 통치는 '어리석음과 실수의 연속'

 

격동의 구한말과 일제 시대를 살았던 윤치호는 고종의 통치에 대해 "어리석음과 실수의 연속"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고종의 정책에 대해 "조선 사람의 것은 빼앗고 타국 사람에게는 빼앗기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위정자들의 정책은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윤치호는 민 왕후에 대해서도 "그 영리하고 이기적인 여인이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열심히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안전했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국왕과 왕비는 무당에 미쳐 무당의 말에 의지하여 국가를 통치했다. 윤치호의 일기에 국사에까지 무당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몇 해 전 무당들이 득세할 때 상감께서 무당 앞에 엎드린 것을 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무당들은 저세상의 영혼들과 중계자로 행세했는데, 영혼들은 무당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왕과 왕비께 전하곤 했다. 예로 어느 날 저녁 무당이 마른 참나무 가지를 왕의 머리 위에 흔들면서 춤을 추다가 '나는 태조대왕이다. 네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누구 덕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태조의 영혼이 무당에게 들어온 것이다.

 

그러자 상감마마는 그 무당이 실제로 그의 조상인 양 엎드려 큰절을 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상궁에게 명하여 선왕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물론 무당은 태조의 이름으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제공하라고 명하였는데, 많은 양의 돈과 비단을 주라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은 폐하께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아직 흠뻑 빠져 계신다는 점이다."

 

민 왕후는 병악하게 태어난 왕자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마다 쌀 한 섬, 비단 한 필, 돈 1000냥씩을 바쳤다. 또 매일같이 백미 500석으로 지은 쌀밥을 한강에다가 뿌렸다. 1880년에는 세자가 마마를 앓다가 회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증광과라는 임시과거를 실시했다.

 

민 왕후를 홀린 무당은 진령군 하나뿐이 아니었다. 이당주라는 시각장애인 무당은 타인을 저주하여 급살을 맞아 죽게 하는 염승술의 달인으로 알려졌다. 그도 고종과 민 왕후로부터 존귀한 대접을 받아 정2품 자헌대부 작호를 받았다.

 

역술로 이름을 날렸던 이유인은 궁궐로 불려가 민 왕후에게 점을 한 번 쳐준 대가로 즉석에서 비단 100필과 돈 1만 냥을 받았다고 한다. 고종과 민 왕후는 개혁이나 개방을 통한 국력 양성보다는 무당을 통한 요행에 국가의 장래를 걸었던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후략)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_ 김용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