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

인문의 숲에 빠져라_ 오세훈

정정진 2020. 2. 6. 12:41


"가난한 사람들은 왜 계속 가난하게 살까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찌 보면 판에 박힌 것 같은 질문에, 살인죄로 8년째 복역 중인 여죄수가 답했다.


"잘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정신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죠."

"정신적인 삶이요? 당신이 얘기하는 정신적인 삶이란 게 뭐죠?"

"왜 있잖아요, 음악회나 박물관, 미술 전람회 같은 거요. 강연회도 그렇고요."


얼 쇼리스라는 미국 작가와 빈스 워커라는 여인이 나눈 대화의 일부다. 책을 통해 이들의 대화를 접하며 나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충격으로 잠시 멍했다.


얼 쇼리스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미국 전역을 돌면서 극빈자들을 인터뷰했다. 가난에 관한 해법을 주제로 책을 쓰기 위해서였다. 어려운 경제 형편 때문에 범죄자가 된 이들을 취재하러 방문한 교도소에서 빈스 워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20대 초반에 살인죄를 저지른 여죄수 워커는 뜻밖에도 '가난의 이유'로 '정신적인 삶의 결핍'을 꼽았다. 그녀가 말하는 정신적인 삶은 철학이나 문학, 역사,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문학이었다.


여인은 이런 이야기도 덧붙였다.


"우리 아이들을 음악회나 박물관에 데려가 주세요. 미술 전람회도 데려가 주세요.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가난의 대를 끊을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 영감을 얻은 얼 쇼리쇼는 가난 때문에 교육다운 교육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학교육 수준의 문화와 예술, 역사와 철학과 같은 교양, 즉 인문학을 가르쳐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저명한 교수와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우리로 치면 노숙인이나 쪽방촌 주민 등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강의를 들려주었다. 그 결과 '클레멘트 코스'라는 이 강좌를 수강한 빈민 중 상당수가 대학에 진학했고, 새 일을 시작했으며, 가족과 재결합을 했다.


인문학이 삶의 나락에 빠진 이들의 인생까지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발견은 경이적이었다. 임기 초부터 나는 노숙인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우리 노숙인 쉼터의 시설은 부족하지도 열악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쉼터 생활을 계속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뛰쳐나와서 엄동설한에 소주 한 병에 의지해 지하도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는 노숙인들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늘 마음속의 숙제였는데, 이 책을 읽는 순간 해법을 찾은 것이었다.


나는 당장 인문학이 가난에 빠져 자존감을 잃어버린 이들까지 구제할 수 있다는 부분에 주목해 보기로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합리적이고 성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문학적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언어 구사력이 떨어지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사고력도 떨어진다.  삶에 대한 자부심도 판단력도 부족하다. 그러한 상황을 극복해 보고 싶어도 가난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다 보니, 가난의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이다.


취임 초에 찾아갔던 용답동의 노숙자 쉼터에서 느꼈던 안타까움도 그 점이었다. 서울의 노숙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서 불시에 방문했던 그날, 노숙자들과 함께 아침 메뉴인 설렁탕을 들면서 몇 마디 말을 건네 보았다.


"제일 힘든 게 뭐죠?"

"스스로를 이길 수 없는 것이지요."

"무슨 말씀인가요?"

"쉼터에 들어와 몇 달 잘 참고 지내던 사람들이 술 한 잔 생각을 이기지 못해서 다시 거리로 돌아가는 일이 허다하거든요. 그런 때는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아요."


대화를 이어 갈수록 설렁탕에 말아 넣은 밥을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다. 그의 무기력한 눈빛 앞에서 작은 한숨만 가까스로 삼킬 뿐이었다.


그들 중에는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자활 근로사업이나 공사장 노동 등을 하면서 노숙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반면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포자기 상태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경우 대체로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데, 그들의 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자존감도 읽을 수 없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의 눈빛을 앗아 간 무기력부터 먼저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혜성 복지대책으로는 당장의 생계에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삶의 무력감까지 걷어 낼 수는 없다. 나는 다음 날 복지국장에게 그 책을 건네며 인문학 강좌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과정이다. 서울시가 지원을 하고 대학에 운영을 맡기는 시스템인데, 입학생은 노숙인과 자활근로자, 저소득 주민들이다. 이들은 철학과 글쓰기, 문학, 역사, 예술 등을 배우고 문화유적지를 탐방하고 작가나 예술인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각 분야의 실력 있는 학자들이 강의를 맡으며, 다양한 문화계 인사들이 이들과 함께한다.


1년이 지난 지금, 그 성과는 놀랍다. 첫해는 입학생 중 절반만이라도 끝까지 과정을 마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입학생 300명 중 209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또한 수강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82%가 강좌에 만족했고 95%가 강좌를 듣고 난 후 자신에게 변화가 있었다고 대답했다.


여기에 힘입어 2009년에는 대상을 1,500명으로 늘렸다. 경희대, 동국대, 시립대, 성공회대 네 곳이 도움을 주고 있다.


나 역시 삶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고전을 집어 든다. 다산의 책에 가장 손이 많이 가고 '채근담'도 손때가 많이 탄 책중 하나다. 그밖에 역사나 철학 관련 에세이들을 즐겨 찾는데,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나를 발견한다. 정신적인 위로를 받는다고나 할까. 이런 습관은 철이 들던 무렵부터 몸에 밴 것이라서 나는 꽤 오랫동안 인문학 예찬론자로 살아온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들어 문화, 역사, 철학, 예술, 언어, 종교 등을 연구하는 학문인 인문학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무척이나 반갑다.


따지고 보면 하루도 예외없이 빽빽하게 짜여진 시장의 임무와 일정 속에서 열정과 에너지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책의 힘이 크다. 책을 통해 수많은 간접 경험과 통찰을 체험하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책 역시 결국 나의 경험과 내가 읽은 책들이 주된 밑거름을 이루고 있다. 서울시 간부직원들에게도 수시로 책을 선물하는데 이는 생각을 공유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우 강력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인문서적을 읽고 음악회나 공연장을 찾고 박물관이나 전시회에 가는 것은 대개 감성적인 충만함을 느끼고 싶어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향유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단지 감성적으로 여유가 있는가와 없는가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갖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인문학적 시도들을 통해 우리는 '사고하는 법'을 배운다.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인문학이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수 있는 것도 그들에게 인생에 대해 사고하는 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자기계발' 붐이나 서점가의 '자기계발서' 열풍을 볼 때마다 늘 아쉬운 점이 있었다. 개인의 재능을 극대화하는 기술에만 초점을 맞춘 '자기계발'로는 지금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사색을 통한 통찰의 힘이다. 위기 때 힘을 가지는 이는 과학적 분석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인문학은 사색하는 법을 가르쳐 주며 그런 능력을 키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양분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요즘은 CEO들 사이에서도 인문학과 경영학을 접목하는 노력들이 한창이다. 그 누구보다 통찰력이 필요한 리더들이 앞장서서 인문학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인문학의 위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경쟁력으로 여겨지는 이야기(스토리)능력을 키우는 데도 인문학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드림 소사이어티'의 저자 롤프 옌센은 "가난과 배고픔이 사라진 세계에서 소비자들은 재미와 스릴, 사랑과 윤리적 자부심같은 정서적 만족을 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감성가치의 중심에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무장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옌센에 의하면 소비자들은 이제 상품 자체를 사는 것이 아니라 상품에 읽힌 이야기를 산다. 이야기를 품지 못하는 상품은 창고에 처박힐 것이다. 그래서 드림 소사이어티를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지금은 이야기가 곧 돈이 되는 세상이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경매에 붙여진 운석의 사연은 이야기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유명한 일화다. 그 운석은 중국 위구르에서 발견된 것이었는데 예상 낙찰가는 우리 돈으로 282억 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런 값어치를 하게 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수억 광년이나 되는 먼 우주공간에서 날아왔다.'는 것이다. 한갓 작은 돌멩이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것이 거기 담긴 특별한 이야기 덕분에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인정받게 된 셈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이야기에 사활을 건다. 제품을 파는지, 이야기를 파는지 헷갈릴 정도인데, 몇 해 전 어느 생명보험 회사는 남편의 사망 후 받은 보험료 덕분에 여전히 여유롭게 살고 있는 아내와 딸의 모습을 그린 광고로 화제를 모았다. 실제 사례라는 설명까지 덧붙인 가족의 스토리 덕분에 '보험금 1억보장' 따위의 광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 회사가 소비자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이야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대에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관건은 당연히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고 없음에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막막해진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어떤 식으로 새롭게 가공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실제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안데르센 동화가 원작이고, <뮬란>은 중국의 장편 서사시가 원전이다. 얼마 전 TV 드라마로 방영된 <태왕사신기>도 단군신화가 모태다. 결국 새로운 이야기로 가공해 낼 만한 재료들을 어디서 찾아내느냐가 문제인데, 거기서 인문학의 가능성은 독보적이다. 인문학 분야는 이야기를 새롭게 가공해 낼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수백년 된 고전과 역사, 문화, 예술, 철학 등 인문학적 교양을 쌓다보면, 어느새 교양들이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며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옹달샘이 되어 준다.


따라서 인문학은 매 시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CEO에게도, 당장 진행시켜야 하는 커다란 프로젝트를 눈앞에 둔 직장인에게도, 거리에서 먹고 자며 자존감마저 위협당하는 노숙인들에게도, 그리고 항상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생산해 내야 하는 기업에게도 새로운 선택과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보약과 같다. 직관적 통찰 능력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21세기, 그리고 이야기가 생산력이 되고 경제가 되는 21세기, 인문의 숲에 빠져 보는 것은 행복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얼마 전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희망의 인문학' 과정을 수강 중인 시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편지의 주인공은 인문학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200자 원고지에 삐뚤삐뚤 그러나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내려갔다.


오세훈 시장님께

2년 전에 저는 집에 오면 여러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꿈과 희망이 있기에 쉽게 울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소학교도 마치지 않았습니다.

살아가면서 어깨 너머로 한 자 한 자 조금씩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2009년 3월 25일 시립대학교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과정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받다 보니 저희들 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교육과

교훈이 되는 좋은 공부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공부한다는 생각에 너무나 마음이 부풀고 기분이 좋습니다.

끝까지 인문학 과정을 마칠 것입니다.

시장님 감사합니다. 삶에 희망을 주셨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마치고 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것이 소중한 돈이라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시장님, 감사합니다.


과학은 세상을 바꾸지만 인문학은 사람을 바꾼다고 했던가. 인문학은 부자가 제대로 부자일 수 있고 가난한 자가 가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통로다.  어찌어찌해서 졸부가 되어도 문화와 교양이 없으면 공허할 뿐이고 그런 부는 결코 대를 이어 물려주지 못한다. 또한 시혜성 복지정책이 제 아무리 훌륭하게 제공되어도 인문학을 토대로 한 교양 없이는 개인이 가난의 대물림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다행히 요즘 인문학을 찾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 가는 것 같다. 지독한 불황 속에서도 인문학 서적의 판매는 전년도에 비해 10%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공감하는 것 같다. 인문의 숲은 시대적인 불안감을 일시적으로 위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한층 더 깊이 있게 통찰하고 보다 나은 미래로 인생을 디자인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시프트(Shift)_ 오세훈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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