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탄생을 이해하게 되면 또 하나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아이의 '타고난 천재성'이다. 모든 아이는 다섯 가지 이상의 천재성을 배 속에 가지고 태어난다. 세상을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재능, 독립 생명체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말을 잘한다. 요리를 잘한다. 미적 감각이 있다, 운동을 잘한다... 각자 다양한 재능을 이미 영혼 안에 담고 태어난다. 그런 천재성의 종류는 수백 수천 가지가 넘고, 현재 우리 사회에 다양한 직업으로도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천재성은 가만히 기다린다고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뭔가를 경험했을 때 부딪치면서 튀어나온다. 나는 어렸을 때 내 천재성이 음악 하나인 줄 알았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교회에 다니면서 음악을 배웠으니까. 초등학생 때부터 소프라노, 알토, 태너를 일주일에 한 번씩 경험할 수 있는 곳이 교회밖에 더 있나. 그래서 음대생들 중에는 나처럼 교회를 열심히 다닌 이들이 적지 않다. 나 역시 그런 이유로 음악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면서 내 안에 더 큰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 그토록 엄마한테 야단맞았던 천재성.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재능 말이다.
어릴 때도 나는 어찌나 논리적으로 따지며 말대답을 했던지 단 한 번도 말싸움에서 밀린 적이 없었다. 엄마와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말로는 날 이길 수 없는 엄마의 마지막 멘트는 항상 "저런 미친년"이었다. 그런데 이 재능이 제대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건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면서부터다. 엄마들 상담을 얼마나 잘했는지, 한 번 우리 학원에 아이를 등록시킨 엄마들은 학원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천재성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23년째 강사로 살고 있다. 또 요즘엔 옷 만드는 재능을 발견해 재미있게 놀고 있다. 50여 년간 전혀 알지 못했던 내 천재성과 우연히 만난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특별한 얘기가 아니다. 내가 지금껏 만나왔던 수 많은 사람들 역시 그랬다. 아이들이건 엄마들이건 최소한 다섯 가지 이상의 천재성을 이미 갖고 있다. 그래서 이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로 향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자신의 천재성 하나를 만나기가 힘들다. 자기 안에 다섯 개나 되는 씨앗이 있다고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믿지도 않는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자신의 눈으로 한 번도 자신의 재능을 확인해본 적이 없으므로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부에 매달리느라 자신의 재능을 세상과 부딪쳐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아이들은 자신의 천재성과 큰 관련도 없는 집합 교육을 20대까지 받는다. 부모와 사회가 원하는 재능은 이미 딱 하나로 정해져 있다. 공부 잘하는 재능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자. 공부도 재능일까?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걸까? 여기서 엄마들이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림 잘 그리는 것은 재능일까 아닐까? 대개는 '물론 재능'이라고 답한다. 음악 잘하는 것도 재능일까? 대부분 그렇다고 답한다. 춤추는 것도 타고날까? 한 번 보면 그대로 따라 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도 없이 배워도 앞으로 가야 하는데 꼭 뒤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옷 잘 입는 것도 타고날까? 물론이다. 초등학생만 돼도 깜찍하고 예쁘게 잘 꾸미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반면에 나이 들어서도 패션 감각이 꽝인 사람들은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공부는 어떨까. 정말 재능이 아니라 노력하면 다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우리도 하루에 네 시간만 자면서 1년 '빡세게' 공부해보자. 한의대도 가고, 의대도 가고, 로스쿨도 갈 수 있다. 공무원도 되고, 판사 검사도 돼보는 거다. 아이들한테만 공부해서 좋은 대학 좋은 과 가라고 하지 말고, 직접 한번 해보는 거다.
자, 벌써 느낌이 오지 않나? 결국 못 할 거라는 거, 잘 안 외워질 거라는 거, 고생만 오지게 하고 안 될 거라는 거. 그건 어른이 돼야만 아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성적 경쟁이 일상인 아이들은 더 잘 안다. 우리 아이들이 하는 건 공부라기보다는 '암기'에 가깝다. 아이큐와 해마라는 단기 기억장치가 발달한 아이들이 훨씬 유리한 게임이다. 그런데 공부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많은 아이들은 스무 살까지 그 한 가지 기준만으로 '루저'가 된다. 학교에서도, 또 집에 와서도, 따지고보면 너무나 불공평한 시스템 아닌가.
아이에게 공부 재능이 없다는 것은 반드시 다른 천재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공부만 천재성이 아니다. 세상에는 그림 천재, 음악 천재, 패션 천재, 영업 천재, 장사 천재, 음식 천재 등 수백 수천의 천재성이 존재한다. 모든 아이는 공부 못지않게 충분히 키워갈 만한 재능들을 이미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그 천재성이 부딪쳐 나올 기회와 시간을 주지 않는다. 계속해서 아이한테 없는 걸 달라고 요구한다. 그 때문에 요즘 아이들이 그토록 사춘기 때 방황하고 격렬하게 부모와 부딪치는 것은 아닐까?
영혼마다 서로 다른 천재성을 갖는다
우리 집 세 아이는 공부 재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성적표를 보면 그저 '고만고만한' 성적을 냈다. 큰아이는 수학을 너무 못해서 늘 전체 석차가 중간쯤이었고, 둘째는 아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나마 막내는 공부를 조금 하는 편이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뒤늦게 '공부도 재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공부 재능이 없다는 건 다른 재능이 있다는 증거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저 속상하지 않으려고 믿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지켜보니 실제로 다른 재능이 있었다. 다만 성적만 요구하는 교육 시스템에서는 그 재능이 발현되기가 쉽지 않은 것뿐이다. 매일 학교, 학원, 집만 오가면서 언제 다른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그런 재능들은 스무 살 이전에는 발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성인이 된 후 사회에 나가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아! 나는 이런 데 재능이 있구나' 하고 스스로 부딪치며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문제는 엄마다. 아이들은 공부를 못할지라도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견디고, 친구들과 웃고 울고 즐기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다. 다만 공부를 못해 부모님께 조금 미안하고 조금 위축될지라도 얼마든지 그 시기를 통과할 수 있다. 이 시기를 못 견뎌 하고 우울해하고, '그래서 너, 뭐가 될래?'라고 매일 채근하고 불안해하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엄마들이다. 엄마들은 늘 이런 불만을 토로한다.
"도대체 우리 아이는 천하태평이에요.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지켜보는 사람은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안에 어떤 천재성이 있는지 감지조차 못 하니까. 오히려 당사자인 아이들은 어렴풋이 안다. 자신의 영혼 안에 들어 있는 천재성을. '난 괜찮은데? 지금만 그렇지, 나중에 어른 되면 잘 먹고 잘살 텐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천재성은 열 살에 나올 수도, 스무 살에 나올 수도, 서른 살에 혹은 그 후에 나올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아이가 가진 다섯 가지 이상의 천재성을 믿어주고 자신감 있게 꺼내어 쓸 수 있도록, 이 불합리한 경쟁에서 너무 상처 받지 않도록 지켜내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의 교육과정 안에서 키워야 한다면 내 아이가 부당한 줄서기에서 패배자로 전락하지 않도록 자존감을 지켜주어야 한다. 엄마라면 내 아이가 가진 천재성의 오랜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엄마의 자존감 공부_ 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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