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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황금바람'을 누리자_ 정여울

정정진 2018. 5. 18. 13:50


깨달음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 찾아온다


이 싯다르타는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부처가 아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다만 부처님과 이름만 같은 사람이다. 언뜻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깨달음의 눈부신 기회들을 자꾸만 놓친다. 그는 워낙 독립심이 강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조언이나 가르침을 구하려 들지도 않는다. 부처님과 만나 가르침을 얻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는 부처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 타인에게서 배우려 하지 않는 것,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을 거라 믿는 것이 바로 자기 에고의 한계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의 주변에는 자신보다 현명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부모님을 떠나 수행자의 길을 가려 할 때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했을 부모님에게 미안함이나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특별히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 '내 문제는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강력한 에고의 선입견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아픔을 느낄 때는, 바로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도반 고빈다가 부처의 제자가 되겠다며 떠날 때였다. 어릴 때부터 항상 곁을 지켜 주었던 고빈다가 당연히 앞으로도 평생 함께할 거라는 믿음, 자신조차 깨닫지 못했던 너무 자연스러운 믿음이 한순간에 깨져 버린 것이다.


그는 수행자들의 공동체 속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남들은 며칠도 힘들어하는 단식을 무려 28일이나 식은 죽 먹듯 쉽게 해내고, 온갖 수행자들의 신비 체험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워 스승을 무색케 하기도 한다. 더 이상 수행자들의 공동체에서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한 그는 마침내 환속하여 '세속의 세상에서 무언가를 배워야겠다.'는 큰 결심을 한다. 수행자들의 공동체에서도 뭔가 배울 것이 없다면,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서 궁극의 진리를 배워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만난 사람이 장인의 가장 아름다운 기생 카밀라였다. 싯다르타는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 카밀라에게 '사랑의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떳떳하게 요구하고, 카밀라는 싯다르타의 그 당당함과 순수함에 이끌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카밀라는 싯다르타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가 장사의 기술, 사랑의 기술, 도박의 기술까지 모두 마스터한 뒤, 자신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고결함과 총명함까지 모두 잃어 타락했을 때조차도 카밀라는 싯다르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의 아이를 가졌을 때조차 그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가 깨달음의 길을 걷기 위해 또다시 떠날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나이 마흔이 넘도록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알지만 사랑만은 모르는 사람, 싯다르타는 바로 그 치명적인 허점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그 커다란 사랑의 미소들을 감지하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도, 친구 고빈다의 사랑도, 연인 카밀라의 사랑도 그에게는 삶의 진정한 변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던 그를 처음으로 무너뜨린 것은 바로 '아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어나 오직 엄마의 사랑만을 듬뿍 받으며 아무 거리낌 없이 자란 아들은 가난한 뱃사공이 되어 수도승처럼 살아가는 싯다르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마침내 싯다르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최고의 적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완전한 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 이끌려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 속에 인생을 던졌지만, 뜻하지 않은 암초에 걸리고 만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싯다르타의 아들은 싯다르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의 초라하고 빈궁한 모습이 싫다며 아버지를 내팽개치고 떠나 버린다. 싯다르타는 그런 냉정한 아들을 먼발치에서나마 한 번이라도 보려고 다시 카밀라의 집을 찾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문전박대하고 결코 만나 주지 않는다.


싯다르타는 그제야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결여되었는지를 깨닫는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었음을 깨닫자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대단한 스승의 가르침도 좋지만, 경전의 훌륭한 메시지도 아름답지만, 그가 외면했던 수많은 타인들의 사랑이야말로 그를 지켜 준 진짜 버팀목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을 둘러싼 사랑의 힘을. 아들을 머나먼 수행자의 길로 떠나 보내고 나서도 수십 년간 편지 한 통 받아 보지 못한 부모의 마음을. 한 남자를 사랑하여 장안 최고의 기생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사치와 명성도 다 버린 채 오직 아들을 홀로 키우며 부처님의 길에 귀의하려 한 카밀라의 조건 없는 사랑을. 혈연으로 묶인 것도 아닌데 그를 마치 친형처럼 따르며 해바라기처럼 자신만 바라보던 고빈다의 사랑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 있음 자체에 온 세상 만물의 다함없는 사랑이 깃들어 잇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차가운 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완전한 자아'나 '깨달음을 완성한 자'보다 더 진실한 '있는 그대로의 나'임을 비로소 깨친다.


심리학자 마크 엡스타인은 '트라우마 사용설명서'에서 이런 궁극적인 깨달음을 운문 선사의 가르침에 빗대어 설명한다. '벽암록'에서 운문 선사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황금바람에 드러난 몸'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허덕이더라도, 누구도 나를 돕지 않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이르더라도, 우리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황금바람에 드러난 축복받은 몸이라는 것이다.


엡스타인은 황금바람을 가리켜 일종의 '관계의 고향'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관계의 고향이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도움이 아니다. 이 황금바람, 즉 관계의 고향은 어떤 외부 사물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조력자가 꼭 옆에 있어야 가능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가장 힘겨운 고난에 처했을 때조차 우리 자신과 함께하는 그 무엇이다. 황금바람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원초적 관계, 즉 어머니와 아기 사이의 완전한 합일 같은 본질적 관계에 대한 암묵지(안다고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를 환기시킨다.


엡스타인은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트라우마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저항하거나 부정하려는 노력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에 몰입하려는 노력까지 모두 포기할 때 비로소 기대하지 못했던 무엇인가가 일어난다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처럼, 어머니의 품안에만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아기처럼, 우리는 '내 안의 황금바람'을 느낄 수 있는 충만한 자아가 될 수 있다. 내가 스스로를 '보살피는 자아'가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자기를 치유하는 힘을 스스로 얻을 수 있으며, 희생이나 억압이 아닌 방식으로 타인을 치유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도대체 내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우울증 약을 찾고 의사를 찾아 다니며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우리는 마침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내 고통과 슬픔, 내 꼬여 버린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최고의 치유라고.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_ 정여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