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

그리스 비가(悲歌)_ 오춘호

정정진 2017. 6. 2. 10:27


19세기 독일인에게 그리스는 탐탁지 않은 존재였다. 비스마르크, 마르크스, 히틀러도 모두 그리스인을 싫어했다. 비스마르크는 발칸인을 싸잡아 "소총병 한 명의 가치도 없다"고 폄하하기까지 했다. 독일에서 빌린 돈을 50년 뒤 갚은 역사적 흔적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잘못을 외국에 책임 전가하는 민족성이 그리스인에겐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헐뜯고 불신하고,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파괴나 섬멸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스인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이들은 터키의 400년 통치가 이런 민족성을 만들었다고 변호한다. 페어플레이 정신의 독일인이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EU가 본격 출범하려 했을 때도 독일은 그리스 가입을 반대했다. 국가 채무도 많고 드라크마화의 가치가 너무 낮다는 것이었지만 그리스인에 대한 인식이 원래 나빴던 것이다.


그리스는 모든 부채를 갚지 않고 오로지 EU나 독일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자신들의 복지정책에 문제가 있었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EU에서 탈퇴하면 그만큼 힘들어질 것이라고 배짱만 부린다. 이런 일을 예감했는지 몰라도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은 모두 유로화의 탄생을 반대했다. 프리드먼은 심지어 유로화라는 경제적 공동체가 결국 정치적 문제로 붕괴할 것이라는 예언도 했다. 민주주의 탄생지라지만 민주주의는 권모술수의 동의어로 여기는 나라 같다. 참 많은 교훈을 남긴다.


독재에서 좌파 포퓰리즘 극단으로 스윙


1999년 유럽연합이 출범하고 유로화가 탄생한 이후 10년은 그야말로 통화동맹에 대한 유럽인들의 자부심이 높아져간 시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어닥쳤을 때만 해도 유로존 국가들은 비교적 위기를 순탄하게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비유로존 국가인 라트비아와 아이슬란드가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국제통화기금 보호체제로 들어간 것은 유로존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증거로도 간주됐다. 유로화는 그야말로 유럽통합의 상징이었고 유럽인의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2009년부터 불거진 그리스 위기는 이런 유럽인의 긍지와 염원을 무색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유럽 경제에서 불과 2%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에서 재정 위기가 불어닥쳤다는 소식에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맹주들은 그리스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위기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리스 재정위기가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폐인을 거쳐 유로존 전체의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커져만 갔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나비효과가 유로화의 미래에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보편적 복지가 키운 그리스 위기


그리스는 1970년대까지 견실한 경제를 유지해왔던 입헌군주국이었다. 그리스 국내총생산은 평균 연4~5%씨기 성장했으며 시멘크, 선박, 관광산업 등을 기반으로 수출도 활발했다. 하지만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좌파 사회당이 1981년 집권하면서 경제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파판드레우는 보편적 복지 강화, 공공부문의 확대, 정부의 개입 강화 등 좌파 경제정책을 쓰면서 재정지출을 급격하게 늘려나갔다. 선진국인 프랑스, 영국과 맞먹는 복지를 위해 연금보장을 대폭 늘리고 사회보장과 건강보험 보장 정책을 펼쳐갔다. 공공부문 비중도 늘려 1970년대 초반 GDP 대비 25%에서 53%(2009년 기준)까지 늘렸다.


국민들은 환호했다. 정부 지출에 의한 경제 성장이었다. 정부는 부족한 재원을 메우기 위해 외국에서 돈을 마구 빌려다 썼다. 금리는 연 30%에 달할 만큼 높아지고 인플레이션도 극심했다. 그리스의 탈출구는 결국 EU 가입으로 유로존에 국가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었다. 자발적으로 자국 화폐를 찍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그리스는 대신 유로화라는 공통 화폐를 쓰면서 다른 나라로부터 돈을 빌리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자국통화를 사용하는 경우였다면 취약한 경쟁력이 부각되면서 리스크가 일찍 불거졌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EU 가입으로 복지병 더해져


EU가 처음 출범하면서 그리스 가입 여부를 놓고 독일과 프랑스는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다. 그리스의 재정 상황을 익히 알고 있던 독일은 재정 건전성을 이유로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을 반대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유럽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를 제외하면 유로존의 명분과 정신이 훼손된다며 그리스 가입을 적극 지지했다. 결국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하고 유로화가 본격적으로 통용됐다.


그리스는 2000~2007년 유로존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인 국가 중 하나였다. 이 기간 GDP 증가율은 4.2%나 됐다. 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이 되지 않고 소득수준도 줄었지만 사회보장 정책으로 국민은 경제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로화를 사용하면서 시중금리는 연 20% 이상에서 불과 3~4%로 떨어졌다.


그리스 국민은 비싼 차를 구입하고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풍족하게 소비했다. 과도한 소비가 일시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리스는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에서 돈을 계속 빌렸고 국가 부채 규모는 갈수록 증가했다.


EU 지원 없이 살 수 없는 그리스, 미래 불투명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2009년 10월 총선 이후 집권한 사회당 정부가 복지정책을 늘리면서 재정 상황이 급속히 불안해졌다. 재정 적자 및 정부 채무가 각각 GDP의 12.7% 및 113.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그리스 정부채권 각격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2010년 5월 EU는 총 1100억 유로 상당의 긴급 금융지원을 승인하면서 그리스는 일단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다. 유로존 국가는 800억 유로, IMF는 대기성 차관을 통해 300억 유로를 지원키로 합의했다. 하지만 2011년 그리스 재정위기가 다시 불거지자 EU는 IMF, ECB 등과 다시 금융지원방안을 논의했다. 이들은 다음해 2월 1300억 유로 규모 2차 구제금융을 결정했다.


이 지원방안에 따르면 총 1300억 유로의 유동성을 지원하되 지원조건으로 최저임금(22% 수준), 임금(15%), 연금 및 실업수당의 삭감, 공무원 1만 5000명 감원 등을 통해 GDP 대비 1.5% 수준의 재정지출을 축소하도록 했다. 그리스가 감내하기 어려울 만큼의 감축이었다.


무엇보다 지원자금은 그동안의 국가 채무를 갚는 데 사용됐다. 2010~2014년 구제금융을 통해 지원된 지원금 중 813억 유로(전체의 31.5%)는 만기채무를 상환하는 데 지출됐으며 채무를 줄이는 데 495억 유로(19.2%), 국채 및 차관에 대한 이자 지급을 위해서도 406억 유로(전체의 15.7%)가 쓰였다. 전체의 66%가 빚 갚는 데 쓰인 것이다. 빚으로 빚을 갚는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정부는 결코 복지비용을 줄일 수 없었다. 2012년 예산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비용은 227억 유로로 국가 전체 지출의 31.9%였다. 이 가운데 70%가 사회 보장과 건강보험 관련 비용이었다.


그리스 경상수지 적자 80억 유로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조업은 거의 없고 주로 농업과 관광업에 의존하는 국가다. 면화나 석유제품 위주의 수출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272억 유로(2014년 말 기준)에 그쳤다. 하지만 수입액은 478억 유로에 이르고 있다. 관광수입을 빼더라도 지난 해 경상수지 적자는 80억 유로의 적자상태를 보이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가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다. 지금 모든 EU 가입국은 자국 GDP의 2~3%나 되는 금액을 그리스에 빌려주고 있다. 물론 이 돈을 상환받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문제는 앞으로 더욱 돈이 많이 들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공통화폐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유로화의 붕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리스의 국가 신뢰가 되살아나려면 경쟁력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 구조조정을 통해 그리스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근본적인 처방이다. 이것도 아니라면 임금수준을 대폭 낮춰야 한다. 땀과 노력 없는 좋은 삶은 없다는 것을 그리스인들이 보여주고 있다.  2015.7.16 발행


시대의 질문에 답하다_ 한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