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한 돈은 은행에 없다
'지급준비율'은 전체 예금액 중에서 10%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시 대출을 해도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또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은행에 예금한 돈을 한번에 모두 꺼내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제프리 마이론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든 사람들이 같은 날 예금한 돈을 전부 인출하기로 한다면 은행은 파산할 것입니다. 은행이 가지고 있는 돈은 예금액의 100%에 한 참 못 미치니까요. 그것이 금융위기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여러 금융기관에 돈을 넣어 뒀던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그 돈을 찾기를 바라죠. 그런데 은행이나 기타 금융기관들은 그 돈을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경제의 여러 분야에 투자되어 있죠. 그래서 모두가 한꺼번에 예금액을 찾으려 하면 그 금융기관은 무너집니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A라는 은행에 1천만 원이 입금되어 있다. 그리고 돈의 주인은 모두 10명, 각자가 100만 원씩 은행에 보관해 둔 것이다. 은행은 지급준비율에 따라 1천만 원 중 100만 원만 남겨두고 900만 원은 다시 대출을 한 상태다. 이것은 100만 원을 입금한 사람이 한 번에 100만 원을 모두 꺼내가지는 않으며 10만 원 정도의 범위 안에서 돈을 찾아 쓰더라는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예금한 10명이 모두 한꺼번에 몰려와서 100만 원씩 모두 1천만 원을 꺼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10명의 사람들이 모두 은행에 맡긴 예금을 찾으러 온다고 해보자. 100만 원의 현금만 가지고 있는 은행은 나머지 9명에게 줄 돈이 없고, 결국 파산하게 된다. 이것을 '뱅크런'이라고 부른다.
이론상으로도 은행에 돈을 맡겨둔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돈을 찾게 되면 은행은 곧바로 파산한다. 은행이 제일 두려워하는 일이라면 바로 이 뱅크런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때 은행이 뱅크런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웬만큼 심각한 부실 상태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때 파산한 리먼브라더스 사태, 2011년 한국의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건 같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위험한 대출상품을 판매하다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금융권의 탐욕과 도덕성이 언급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은행가가 된 금세공업자 이야기
여기에 은행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영국 금세공업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 확실해진다. 캐나다의 경제학자 찰스 넬슨은 그의 책 '거시경제학'에서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엘렌 브라운 미국 공공은행연구소 대표를 통해 은행의 기원에 관해 들어보자.
"17세기 영국 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금세공업자에게 금을 보관하던 것에서 유래됐어요. 그들은 종이 영수증을 발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후에 은행가가 되었죠. 이 영수증은 나중에 은행권이라 불립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맡겨놓은 금에 대한 영수증이었습니다. 금을 빌리려는 사람들과 맡긴 사람들 모두 이 종이 영수증을 선호했습니다. 왜냐하면 휴대하기 쉽고 도난의 염려가 없으니까요."
17세기 영국의 도시에서 자주 있었던 이야기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사용하는 화폐라는 것이 없었던 시절이다. 그러니까 금 자체가 돈이었던 시대다. 하지만 금은 가지고 다니기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을 녹여서 만든 화폐, 즉 '금화'를 제조했고 이것이 일반적인 화폐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 값비싼 금이다 보니 집안에 보관하거나 늘 휴대하기에도 불안한 점이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금을 보관하기 위해 금세공업자의 금고를 빌렸다. 금세공업자는 커다랗고 튼튼한 금고를 가지고 있었고, 그곳이 금을 보관하기에는 마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금세공업자에게 금을 가져다주면 금세공업자는 보관증을 써주었고, 보관증을 가져오면 언제든지 다시 금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금세공업자는 일정한 금액의 보관료도 함께 받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람들은 금을 교환하지 않고 금보관증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금보다 훨씬 가벼워서 휴대하기 편했을 뿐만 아니라 금세공업자에게 가져다주면 언제든 다시 금화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금보관증이 화폐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금세공업자의 입장에서 보니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맡긴 금화를 한번에 모두 찾으러 오지 않는군. 또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오지도 않아!'
이때부터 금세공업자는 '재치'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맡겨둔 금화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로 한 것이다. 대출이 잘 회수되기만 하면 금을 맡겼던 사람들도 눈치 채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은 거의 공짜로 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금세공업자는 금화를 대출하고 남몰래 이자를 받으면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금세공업자가 갑자기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고,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이 맡긴 금화로 대출해 주고 이자를 받으면서 배를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 사람들은 금세공업자에게 몰려가 항의했다. 하지만 이때 금세공업자는 또다시 재치를 발휘해 오히려 이렇게 제안했다.
"내가 당신의 금화를 대출해 이자를 받으면, 그중 일부를 나눠주겠소."
사람들은 이 제안에 솔깃해졌다. 가만히 앉아서도 돈을 벌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거래는 없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금세공업자는 별로 걱정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남의 돈으로 이자를 받으며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금세공업자는 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의 금고에 금화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금세공업자는 금고에 있지도 않은 금화를 있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금보관증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들은 금세공업자가 금고에 없는 돈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미국 공공은행연구소 엘렌 브라운 대표의 이야기다.
"금세공업자들은 금고의 금보다 10배나 많은 보관증을 발행했습니다. 아마 그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은 없었을 거예요.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10%의 금만 찾으러 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10% 지급준비율의 토대가 됩니다. 심지어 지금도 그렇죠."
결국 금세공업자는 존재하지도 않는 금화의 이자수입까지 받아낼 수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은행업자로 대변신을 한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금세공업자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몇몇 부유한 예금주들은 자신의 금화를 모두 가져가버렸다. 바로 '뱅크런'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뱅크런은 초기에는 은행업자들에게 큰 위기로 다가왔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해 더욱 본격적인 은행업자로 대변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주었다. 이때 '구원의 사다리'를 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영국 왕실이었다. 당시 오랜 전쟁으로 많은 금화가 필요했던 영국 왕실은 은행업자들에게 '가상의 돈을 만들어 대출 영업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허락해 주었다. 은행의 이름에 들어간 'Chartered'라는 말은 바로 '면허받은', '공인된'이라는 뜻이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정부로부터 가상의 돈을 찍어낼 수 있는 면허를 받았다'는 의미다. 당시 영국 왕실은 금 보유량의 약 3배까지 대출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고 그때부터 은행업자와 정부 간의 '은밀한 거래'가 시작됐다. 이 둘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 영국 케임브리지대 제프리 잉햄 교수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보자.
"잉글랜드은행은 17세기 말에 설립됐어요. 런던의 상인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죠. 런던 상인들과 왕 사이의 거래였어요. 왕은 전쟁을 위해 돈을 빌려야 했고, 상인들은 전쟁을 바랐어요. 전쟁을 통해서 무역로가 확보되고 영토를 확장하기를 원했죠. 이런 연결고리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부르주아 자본주의 상인들과 국가가 서로 연합했고 거래가 성립됐어요. 이 거래는 상인들이 잉글랜드은행을 설립하는 걸 허락한다는 거였어요. 왕실의 특별허가와 같은 특권을 누렸죠. 그래서 상인들은 은행을 설립했고, 2백만 파운드의 자금을 댔습니다. 1696년엔 정말 큰돈이었죠. 그리고 이 돈을 왕에게 빌려줬어요. 단지 돈을 갚겠다는 약속에 불과한데, 그게 은행의 자산이 되죠. 이 자산을 기반으로 잉글랜드은행은 2백만 파운드의 지폐를 새로 발행해요. 잉글랜드은행 지폐의 가치는 왕이 이 돈을 갚을 거라는 약속에 기반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은행업이죠."
남의 돈으로 돈을 버는 은행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본격적인 은행이 설립되었고, 은행은 전례에 따라서 지급준비율을 이용해 금고에 돈이 없어도 정부가 허락하는 비율만큼 마음대로 돈을 불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은 현대의 은행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사실 은행이 하는 비즈니스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대개의 비즈니스란 이미 만들어진 상품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는 '존재하는 것'들이다. 만들어진 물건, 언제든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은행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판다. 가상의 것을 부풀리고 주고받음으로써 현실의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엘렌 브라운 공공은행연구소 대표의 이야기다.
"은행은 예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은행에서 출금하려는데 '죄송합니다. 당신의 예금을 방금 스미스 씨에게 대출해 줬습니다. 30년 후에 찾으러 오세요'라고 하지 않습니다. 은행은 '꼭 실제의 돈을 보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면 즉시 내주겠다'고 주장합니다."
은행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예금한 돈을 한꺼번에 찾지는 않는다'는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전제로 인한 것이다. 미국 금융사학자인 존 스틸 고든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은행은 무엇을 할까요? 남의 돈을 가지고 돈을 법니다."
결국 은행은 자기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남의 돈으로 돈을 창조하고, 이자를 받으며 존속해 가는 회사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가 빚 권하는 사회가 된 이유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출 문자가 날아오고, 여기저기 은행에서 대출 안내문을 보내는 이유이다. 고객이 대출을 해가야 은행은 새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EBS 다큐프레임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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