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_ 김수정

정정진 2012. 12. 15. 09:39

프롤로그 리빙 라이브러리 창립자 인터뷰

 

 

너도 내 입장이 되어보렴

 

 

<리빙 라이브러리>라는 이상하고도 낯선 단어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봄 영국의 한 일간지를 통해서였다. 신문을 펼치다 눈에 들어온

'살아 있는 도서관'이라는 타이틀부터가 구미를 잡아당겼다. 새로운 유행을 끊임없이 창조하고 선보이는 런던답게 누군가 또 요상한 생각을 해냈나? 처음엔 이 정도의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기사를 꼼꼼히 읽어내려가면서 이 기발한 아이디어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리빙 라이브러리>의 콘셉트는 단순했다.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리는 대신 '사람'을 빌린다는 것. 대출시간은 30분. 독자들은 준비된 도서목록(사람들 목록)을 훓어보며 읽고 싶은 책(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책(사람)과 마주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읽는 것이다. 도서목록에 올라있는 사람들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 남들과 약간 다른 독톡한 이력 덕분에 '오해의 시선'을 받아온 사람들. 즉, <리빙 라이브러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서로 잘 알지 못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타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 고정관념을 줄이자는 의도로 기획된 행사였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읽던 신문에 소개된 홈페이지를 찾아보았고, <리빙 라이브러리>행사에 참여해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리빙 라이브러리>가 열리는 날. <리빙 라이브러리> 사서가 건네준 '도서목록'에는 기대했던 것처럼 다양한 인간 군상이 진열되어 있었다. 전직 노숙자,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정신병 환자....

 

그런데 갑자기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누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 '왜 이런 행사를 만들었을까?' 이런 궁금증 끝에 <리빙 라이브러리>의 창시자 '로니'를 첫 번째 열람대상으로 만나보았다.

 

이번 행사를 위해 덴마크에서 날아온 로니는 현재 서른다섯 살. 공식적인 직업은 학생이자 시민운동가다. 이십 대부터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청소년 폭력 방지에 관한 것으로 주로 비행 청소년들을 계도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런 그가 <리빙 라이브러리>를 처음 기획한 건 2000년도의 일이다. 덴마크에서 열린 청소년 축제에서 이벤트를 하나 맡아서 진행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기획의도를 듣고는 바로 머리가 멍해졌다. 청소년들의 시야를 넓힐 수 있는 행사여야 하며,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좋은 이웃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정말 좋은 말이기는 하나 솔직히 뜬구름 잡는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요즘 청소년들이 어떤 애들인데, 이런 기획의도가 먹힌단 말인가. 왕따 안 시키고, 다른 애들을 이유 없이 패지나 않았으면 좋겠구먼. 이런 구시대적 발상을 누가 했단 말인가. 열심히 투덜거리다가 순간 어렸을 때 했던 '진실게임'이 떠올랐다. '언제 제일 엄마가 미웠어?'부터 '언제 첫 키스를 했어?'까지 마음대로 질문할 수 있었던 그 게임. 돌이켜보면 그건 일종의 해방구였다. 어디까지 물어봐도 되나 눈치보지 않아도 되고, 내 질문이 유치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던 그 솔직담백했던 시간. 그 시간을 통해 마음을 열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 따위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로니는 친구보다 TV나 컴퓨터를 더 많이 마주하고 사는 요즘 아이들에게도 그런 '진실 게임'같은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졌다.

 

"남을 이해하는 건 사실 별 게 아니잖아요.

오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고, 이해는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누군가를 알고 이해하게 되면 폭력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냥 대화를 하자. 로니는 그게 책을 읽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편견을 없애보자는 발상으로 <리빙 라이브러리>를 기획했다. 호응은 엄청났다. '독자'로 참여했던 청소년들은 물론, '책'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역시 즐거워했다. 모두들 대화가 가진 '힘'에 감동했다. 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자기네 동네에서도 이 행사를 열겠다고 결심했고 <리빙 라이브러리>는 그렇게 자생적으로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호주,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수십 개국에서 <리빙 라이브러리>가 생겨났다. 헝가리에서는 <리빙 라이브러리>가 열린 4일 동안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기록도 생겨났으며, 스웨덴에서는 아예 정규적으로 열리는 <리빙 라이브러리>가 탄생했다.

 

로니는 <리빙 라이브러리>가 순식간에 전 세계로 번진 이유에 대해 명쾌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누구나 쉽게 열 수 있는 행사라서 형식이나 규모의 제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예산이 많다면 크고 멋진 <리빙 라이브러리>를 열 수 있겠지만 책의 자격으로 대여섯명만 참가해도 충분히 열 수 있는 만남의 장이다. 중요한 건 행사의 규모나 형식이 아니라 누가 '책'으로 등장할 것인가다. 지금까지의 <리빙 라이브러리> 단골로 등장한 '책'들은 동성연애자와 경찰관, 노숙자와 환경주의자였다. 물론 나라와 지역의 특성에 따라 누가 '책'이 될 것인가는 달라진다. 유독 주술사나 침술가가 인기 있는 동네가 있는가 하면, 정신병 환자, 우울증 환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리빙 라이브러리>가 열리기도 했으니까. 로니는 이렇게 우리 주변에 흔히 존재하지만 막상 잘 알지는 못했던 사람들, 왠지 대면하기가 꺼려졌던 사람들이 '책'으로 등장하면서 <리빙 라이브러리>는 점차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니는 한 가지 철칙만은 꼭 지켜야 한단다. 그건 바로 행사에 참여하는 어떤 사람도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책으로 참석해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에게도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물론 행사장이 멀거나 특수한 경우 교통비나 식사비 정도를 지급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 출연료를 지급하게 되면 행사 자체가 변질될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대가를 지불한다면 사람들은 사람 책으로 선정되어 돈을 벌기 위해 좀 더 극적으로 자신을 포장하거나, 심지어는 거짓말까지 할 수도 있으니까. 이 행사가 순수한 기획의도대로 흘러가려면 철저히 상업적인 면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원칙주의자일까? 열변을 토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입고 있는 티셔츠 문구에 눈길이 갔다.

 

당신의 편견은 무엇입니까?

 

편견을 깬다는 것. 선입관을 버린다는 것. 그게 그렇게 간단한 걸까? 그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런 일이 아닐까? 이런 행사 한 번으로 사람들 생각이 정말로 쉽게 바뀔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사람들은 그렇게 간단히,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건만. 이런 생각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반론을 펼쳤고 로니는 마치 준비한 것처럼 답변을 이어갔다.

 

"어느 정도의 선입관은 누구나 가지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선입관과 고정관념은 살면서 경험 속에서 축적되는 거니까 피할 수는 없죠. 그런데 문제는 그 고정관념 속에서 편견이 생기고 편견은 차별이나 폭력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이탈리아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더라.' 여기까지는 고정관념이죠.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은 성질이 급하니 재수 없어, 한 대 패줘야지'라는 결론으로 흐르면 심각해지는 거예요."

 

로니는 우리나라로 화제를 돌렸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된 상황을 보고 유럽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대한민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상황 하나만을 가지고 각자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선입관을 가지기 쉽습니다. 무지하니까. 잘 모르니까. 하지만 만약 그들에게 한국인 친구가 있다면 어떨까요? 한국 사람이 직접 분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실제 역사는 어땠는지, 지금 한국 사람들은 무엇에 제일 관심이 있는지를 이야기해준다면 분명 더 정확하게 한국과 한국인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대화를 함으로써 관계를 맺는 것. 누구나 자신과 관계가 있는 대상은 좀 더 이해하려 하게 되고 한 걸음 나아가 애정을 갖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그 애정이 발전되면서 다른 사람 입장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겁니다."

 

서른다섯의 평범했던 시민운동가 로니가 깨달은 평화가 여기에 있었다. <리빙 라이브러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사람 입장이 되어보자는 것. 그러면 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릴 수 있다는 로니의 설명에는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바로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출해 읽어보는 즐거운 독서를. '사람 별 도서관'에 푹 빠져 대출하고 또 다음 책(사람)을 대출했다. 그래도 사연이 더 듣고 싶은 사람들에겐 특별히 간청해 그들의 집이나 직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예쁜 카페에서 만나 향기 좋은 커피와 달콤한 케이크를 앞에 두고 끝없는 수다에 빠지기도 했고, 깊은 밤, 선술집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종종 논쟁을 하기도 했다. 세상에 무덤덤했던 내가 좀처럼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 속으로 빠져들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놀라거나 당황하는 일은 부지기수며, 눈물이 질금 날 정도로 감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새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된 것. 그동안 발을 딛고 살아오면서도 잘 알지 못했던 영국 사회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또 하나의 중요한 배움이었다. '나'라는 작은 세계에 머물러 있던 자세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엿보면서 조금씩 시야가 트이는 걸 느꼈다. 그러자 마음이 넓어졌고 꽉 조이는 옷을 입다가 넉넉한 옷으로 갈아 입은 것처럼 여유로워졌다. 이 새로운 경험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전파시키고 싶어졌다. 시선이 바뀌면서 들어선 여유만큼 우리들 삶도 바뀌지 않겠는가.

 

물론 <리빙 라이브러리>에 참가한 '책 사람들'은 영국을 대표하는 표본 집단은 아니다. 잘 나가는 사람들도,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진 편견을 줄이기 위해, 편견이 부를 수 있는 폭력의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리빙 라이브러리>라는 무대에 등장한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지만 우렁찬 웅변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편견과 차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리빙 라이브러리>가 곧 생기길 소망하며 이제부터 나의 새로운 영국 친구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_ 김수정,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