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

희망은 길이다_ 루쉰

정정진 2011. 2. 13. 13:09

희망은 길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
 
사람들은 망각이라는 것이 있기에 자기가 겪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만,
망각이라는 것 때문에 왕왕 앞사람들이 범한 오류를 다시 범하게 된다.
학대받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며느리를 학대한다.
지금 학생들을 증오하고 있는 관리들은 모두 학생일 때 관리를 욕했던 사람이다.
지금 자녀를 억압하는 자들 중 혹자는 십년 전만 하더라도 가정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나이나 지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억력이 나쁜 것도 큰 원인이다.
그 구제책은 각자가 노트를 한 권씩 사서 자신의 지금의 사상과 행동을 모조리
적어 두었다가 나이와 지위가 변한 다음에 참고로 하는 것이다. 가령 아이가
공원에 가자고 졸라서 귀찮을 때, 그것을 꺼내 펼쳐본다. 거기에
" 나는 중앙공원에 가고 싶다 " 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곧 화가 누그러질
것이다. 다른 일도 이와 같다.
 
'다수'라는 간판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반드시 다수로서 소수를 억압하면서 대중정치
라는 구실을 붙이는데, 그 압제는 폭군보다 더욱 심하다.
 
비겁한 자의 분노
 
용감한 사람은 분노하면 칼을 빼어들고 강자에게 향한다.
비겁한 사람은 분노하면 칼을 빼어들고 약자에게 향한다.
구제 가망이 없는 민족 중에는 아이들에게만 눈을 부라리는 그런 영웅들이 허다하기
마련이다. 그런 얼간이들이.
 
명망 있는 학자와 대화하는 법
 
명망 있는 학자와 이야기를 할 때는 상대방의 말 가운데 군데군데 이해가 되지 않는
척해야 한다. 너무 모르면 업신여기고, 너무 잘 알면 미워한다. 군데군데 모르는
정도가 서로에게 가장 적합하다.
 
누가 복고를 원하는가
 
전에 잘 살았던 사람은 복고를 원하고, 지금 잘 살고 있는 사람은 현상 유지를 원하고,
아직 잘 살지 못 하는 사람은 혁신을 원한다. 대체로 이러하다. 대체로.
 
민중 속으로
 
서재에서 책이나 떠받들면서 종교를 논하고, 법률을 논하고,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논한다해도 민중의 습관과 풍속을 알아야 하며, 이들의
어두운 측면을 직시할 용기와 강인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은 불가능
하다. 그저 미래의 광명만을 외치는 것은, 게으른 자신과 게으른 청중을 기만하는
일일 뿐이다.
 
내 붓이 날카로운 이유
 
나도 안다. 중국에서 나의 붓이 비교적 날카롭고, 말도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역시 알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공리니 정의니 하는 미명으로, 성인
군자란 간판으로, 점잖고 성실한 체하는 가면으로, 유언비어와 여론이란 무기로,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의 글로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칼도 없고 붓도 없는 약자들을
숨도 못 쉬게 하는지를. 나에게 이 붓이 없었다면 수모를 받고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깨어났다. 그러기에 늘 이 붓
을 들어 기린의 피부속에 감춰진 마각을 드러내고 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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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1881~1936
 
중국 근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작가, 문학사가이다. 본명은 저우수런이다. 일본
유학 시절 의학을 공부하다가 병든 육체보다 중국인들의 병든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문학으로 전환한다. 봉건주의와 서구 근대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일생을 중국 현실의 변혁을 위해 살았다. 새로운 역사,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위해 중국의 문명과 중국 현실을 철저히 해부하고 비판하는 한편, 봉건주의와 근대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시각을 지닌 문명비판을 전개하였다.
 
그런 글들을 '잡문'  혹은 '잡감'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창조하였고, 총 20여권의 산문집
으로 묵었다. 또한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고향> <아큐
정전>등을 발표하였고, 그의 소설은 <외침> <방황> <고사신편>등의 소설집에 실렸
다. 루쉰은 중국 근현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이래 우리 현실을 읽는 거울 역할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