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성찰

우애의 경제를 위하여 3_ 김종철

정정진 2011. 9. 12. 20:30

사회주의는 '래디컬 데모크라시' 이다

 

저는 맑스 - 레닌주의가 사회주의의 가장 좋은 전통을 훼손시킨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가 무엇입니까? 흔히 사회주의라고 하면 생산수단의 국유화 내지는 공유화를 생각합니다. 사유재산을 폐기하는 게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사유제산제까지 폐기했던 사회가 어떻게 되었어요? 깨끗하게 망했잖아요.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국가에 의한 인민의 노예화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소련이 망한 것은 혁명 초기에 활기를 띠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패퇴한 데에서도 큰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단농장시스템을 강제로 밀어붙인 데서 시작됐다고 저는 봅니다. 농민들의 정서와 심리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할 수 있어요. 오랜 세월 동안 농노로 살아온 농민들이 혁명에 의해서 자유인이 되고,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대를 갖는 순간에 그 땅을 뺏고, 집단화를 강요한 것은 자멸적인 정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 대한 농민들의 애착은 만년 이상 뿌리내려온 거의 본능적인 것입니다. 농민에게는 자기 땅이 아니면 농사짓는 게 신명이 날 턱이 없습니다. 거의 강제노동일 뿐이죠. 그러면 결국 국가적 생산성은 형편없이 낮을 수밖에 없죠.

 

일반적으로 사유재산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자신의 소유에 대해 갖는 애착을 완전히 부정하는 사회운동은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사유재산의 규모는 제한해야 하고, 소유에 있어서 개인적 격차는 일정한 한도 이상으로 벌어져서는 안됩니다. 사회적 양극화는 도덕적으로도 용납되기 어렵지만, 반드시 사회적 안정성을 파괴합니다. 예를 들어,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의 수입이 생산직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백배 천배 이상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에요. 사회정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정치라면 이것만큼은 분명히 바로잡아야죠. 그러나 사유재산 제도 그 자체의 존립은 전혀 다른 얘깁니다. 사유재산제를 철폐하면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합니다. 사유재산제도와 시장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시장에서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 팔 수 있어야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 수가 있어요. 시장과 자본주의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일반적으로 시장과 자본주의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사회주의라고 하면 대개 시장을 폐기한 계획경제를 떠올립니다. 실제로 계획경제란 굉장히 문제가 많아요. 예를 들어, 예전에 소련에서는 관리들의 철제책상의 판 두께가 몇십센티미터나 되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계획에 따라 철강생산을 했는데, 그 철강을 사용할 데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무겁고 두꺼운 철제책상을 만들어내는 희극적인 일이 벌어지는 거죠. 물자의 공급과 수요는 계획적으로 어느 정도 예측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차질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장기능을 무시하는 경제는 원활하게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철제책상의 판 두께가 몇십센티나 되는 기괴한 현상이 나타나고, 이런 몰상식한 짓이 계속되면 결국 망하지 않을 수가 없죠.

 

사회 전체의 경제를 위해서도 시장이 중요하지만, 자유로운 시장 기능이 살아있어야 개인이 인격적인 자립과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해요.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사회주의인가? 저는 '래디컬 데모크라시'가 바로 사회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철저화'가 사회주의예요.

 

서양의 부르주아계급이 봉건체제에 대항하여 시민혁명을 일으켰을 때, 그 명분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과 우애, 즉 '민주주의'였습니다. 실제로 특권계급의 철폐를 요구하는 밑바닥 민중으로부터의 급진적 압력이 없었다면 시민혁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일단 시민혁명에 성공한 다음에는 부르주아계급은 혁명의 성과를 독점해버리죠. 소위 정치적, 시민적, 법적 권리는 명목상으로나마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인 사회적, 경제적 권리는 자기들이 독점하고 민중들을 배제하잖아요. 경제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어요. 단지 명목상의 정치적, 시민적 권리만으로 민주주의사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인민의 자기통치를 뜻합니다. 따라서 핵심은 내가 주체적으로 공동체의 정치적 토의에 참여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어요. 누군가에게 내 정치적인 권리를 위임해서는 절대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의 역사적 과제는 부르주아계급이 독점해버린 시민혁명의 성과를 사회구성원 전부가 고르게 나눌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철저히 추구함으로써만 모든 사람이 실질적으로 인간다운 위엄을 누릴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가 성립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래디컬 데모크라시'를 오늘날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거죠. 고대 도시국가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인구로 구성된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모든 개인이 실질적인 민주적 권리를 누릴 수 있을까요? 답은 협동조합이에요.

 

주식회사에서 결정적인 발언권은 대주주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협동조합에서는 1인 1표예요. 협동조합의 조합원은 스스로가 경영자이자 동시에 종업원이에요. 모든 조합원은 발언권이 동등해요. 모든 결정이 민주적인 토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에서 만인이 민주적인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협동조합적 틀밖에 없어요. 독립적 개인 혹은 소규모 단체가 모여서 협동적 결사체를 만들고, 또 그 대표들이 모여서 더 큰 결사체를 형성할 수 있겠죠.

 

간디는 일찍이 독립된 인도국가는 70만개의 자율적인 기층 마을이 모여서 횡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한 토대 위에 건설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국가의 실질적인 권력은 중앙정부에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하나의 기층 마을에 있어야 하고, 중앙정부란 기층 마을들이 파견한 대표자들의 협의체 같은 것이 돼야 한다는 게 간디의 생각이었습니다. 간디는 그게 제국주의시대를 제대로 극복한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화가 보장되는 정치체제라고 보았던 것이죠. 저는 간디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한 농경사회가 아니므로 간디가 말했던 마을중심 민주주의를 문자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식 해석이에요. 현대식으로 말하면, 간디의 마을들은 시민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형성된 협동적 결사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주적 협동체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정당정치, 즉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는 형식상의 민주주의에 불과할 뿐, 다수 민중의 진정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아무 것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가 협동조합이라는 토대 위에서 훌륭한 복지사회를 만들어온 덴마크와 같은 나라의 역사를 주의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이나 미국 혹은 프랑스와 같은 소위 '대국'들은 전쟁과 혁명 그리고 공업화를 통해서 근대적 정당정치를

발전시켜왔지만, 그 정당정치는 다수 민중을 배제하는 사실상 소수 엘리트에 의한 지배시스템을 구조적으로 강화해왔습니다. 하지만 덴마크 사람들은 일찍부터 풀뿌리 차원에서 협동적 결사체들을 광범위하게 형성하고, 그럼으로써 실질적인 민주주의사회를 발전시켜왔습니다. 이런 의미의 협동적 결사체를 누구보다 강조했던 사람이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사상가였던 프루동입니다. 프루동의 유명한 말에 "all associated and all free" 라는 말이 있어요. "모든 개인은 자발적으로 협동적 결사체에 참여함으로써 자유로운 인격체가 될 수 있다"는 얘기죠.

 

최고의 복지는 풍부한 인간관계다

 

우리가 자유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생활 속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향유해야 합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일찍부터 '국민고등학교'등을 통한 자주적 학습경험에 힘입어 이 원리를 체득하고 살아왔어요. 우리는 대체로 국가나 국민이라는 말을 들으면 혐오감을 느끼잖아요. 나라 국(國)자가 이렇게 역겨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겪어온 역사와 오늘날의 정치현실 때문이죠. 그러나 덴마크 사람들은 국가나 국민이라는 말에 대해 별 위화감을 느끼지 않아요. 덴마크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이나 가족의 생일날에도 집에 국기를 게양합니다. 굉장히 신기하게 들리죠? 덴마크 사람들에게는 국가가 바로 살아있는 공동체입니다. 국왕이 경호원도 없이 코펜하겐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나라입니다. 국왕이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데 경호원이 왜 필요해요? 시민들 전체가 경호원이잖아요. 2차대전 때 나치가 덴마크를 점령했을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닐스 보어라는 양자물리학자의 회고록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독일 점령군 사령부가 덴마크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덴마크정부에 몇날 몇시부터 유태인들이 전부 노란색 완장을 차도록 조치할 것을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각이 되자 덴마크 국왕부터 완장을 찼어요. 그걸 보고 모든 국민이 전부 완장을 차버렸어요. 독일군이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그 사이에 덴마크정부는 유태인들이 스웨덴으로 피신하도록 도와주었고, 그 덕분에 닐스 보어도 살아났습니다. 그런 국왕이니까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국민고등학교'라는 용어도 그렇습니다. 한때는 저도 이 학교 이름을 '민중고등학교' 나 '인민고등학교'로 부르는 게 올바른 번역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덴마크에 관해 공부를 해보니까 '국민고등학교'가 틀린 번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덴마크에서는 국민과 인민이 별 차이가 없어요. 우리나라에도 '국민고등학교'는 꽤 오래전부터 알려져왔죠. 1920년대에 일본의 저명한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라는 분이 그룬트비의 사상에 공명하여 일본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처음 세웠는데, 몇몇 조선의 기독교 사상가들이 바로 우치무라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분들이었거든요. 김교신 선생, 함석헌 선생이 그런 분이죠. 그리고 김교신 선생의 제자에 이찬갑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홍성의 풀무학교를 세운 분이에요. 그러니까 족보를 따져보면 홍성 풀무학교는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와 같은 혈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각자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협동적인 연대조직에 참여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개인적으로 고립된 채 일대일로 국가와 상대하고 있죠. 가정도 붕괴하고 있어요. 이웃 간의 친밀한 관계가 다 깨진 상태에서 고립된 개인들이 돈 없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국가를 향해 반값 등록금제를 실시하라, 무상급식, 무상의료를 하라고 요구하는 거죠. 따로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복지국가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경제성장이 계속돼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국민들이 높은 세금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최대한 고용문제가 해결돼야 하고요. 이게 모두 지속적으로 경제성장이 안되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예요. 그러나 앞으로는 갈수록 경제성장이 어려워질 게 틀림없습니다. 세계경제는 구조적으로 성장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돼있어요. 일자리도 더이상 만들어내지 못하게 돼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경제는 기본적으로 값싼 석유에 의존해온 시스템입니다. 석유는 비단 에너지뿐만 아니라 현대적 문명생활에 필요한 온갖 기초재료를 제공해온 마법의 물질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마법의 물질이 값싸게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성장도 가능했던 거죠.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값싼 석유시대의 마지막 국면이라고 봐야 합니다. 앞으로 10년 이상 지속되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죠. 전혀 다른 세상을 대비해야죠.

 

요즘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든다고 다들 걱정이 많죠. 소위 진보진영에서 더 걱정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부질없는 걱정이에요.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같은 사회는 아닙니다. 또 이런 식의 세상이 계속돼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세상은 완전히 망합니다. 생태적인 조건으로 봐서도 인구는 줄어들어야 마땅합니다. 노동인구와 소비인구가 줄어들고, 건강보험이나 연금 불입 인구가 줄어들면 산업사회를 유지하는 것도, 사회보장제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질 거라고 다들 걱정이지만, 그것은 앞으로 전개될 세상도 지금 세상의 단순한 반복, 확대일 것이라고 전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구태의연한 생각으로는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새롭다고 해도 전혀 낯선 세상은 아닐 겁니다. 새로운 세상은 오히려 옛사람들의 지혜로 돌아감으로써 열릴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런 조짐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어요.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대국주의가 아니라 소국주의의 논리가 새로운 세상의 원리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덴마크 같은 사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적 제도 개혁 이전에 시민들 자신의 자주적, 협동적 결사 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의 자주적 결사체가 활발해져야 국가도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건강해질 수 있어요. 원래 근대국가의 논리는 그대로 두면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국가는 국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원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국가나 자본의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결하고 연대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단, 개인들이 자신의 독자적 인격과 자립성을 유지하면서 연대하는 것이죠. 우선 나 자신이 강인한 인간, 실력 있는 인간이 돼야 합니다. 그러자면 끊임없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단련을 해야 합니다. 타인이야말로 내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이라는 진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장 훌륭한 복지는 제도가 아닙니다. 풍요로운 인간관계입니다. 물론 그 인간관계는 민주적인 관계여야 하죠. 자기 혼자 잘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자유인들끼리 형성되는 결사체 속에서의 자립적인 인간.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_ 김종철, <녹색평론 119호, 2011년 7월~8월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