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성찰

우애의 경제를 위하여 2_ 김종철

정정진 2011. 9. 11. 20:48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사회'를

 

요즘 한국사회의 주요 화두가 복지국가이지만, 저는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는 다른 개념이죠. 국가와 사회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니까요. 복지국가는 국가적 시스템으로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고, 복지사회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들 자신이 자주적으로 상호 연대하고 협동함으로써 만들 수 있는 사회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당장에 실현 가능할 뿐 아니라, 확실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틀입니다.

 

여러분, 지금 세계 일류의 복지국가라고 하는 덴마크에서는 당연히 무상급식을 하고 있다고 다들 생각하시겠지요? 놀랍게도 덴마크 학교에서는 무상급식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무상급식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아무리 이 사회가 고약한 사회라 해도 밥을 굶거나 눈칫밥을 먹는 아이들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인간사회로서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입니다. 그러나 덴마크의 경우를 보면, 사회적 성격이나 질적 수준에 따라 무상급식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지금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도 옛날처럼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고 실업자도 늘고 해서 국가적 복지시스템이 흔들림 조짐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기왕의 복지혜택이 축소되거나 상당히 수정되고 있다고 하죠. 그러나 저는 이 북유럽 국가들에서 국가적 복지시스템이 설령 무너진다 하더라도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아요. 특히 덴마크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덴마크는 국가적 복지시스템 이전에 지역적 차원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해온 협동적 생활구조의 전통이 매우 뿌리가 깊어요. 무상급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덴마크는 개인들의 자립적 역량과 자기책임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덴마크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스스로 도시락을 싸야 합니다. 부모가 싸주지 않아요. 6살짜리 아이가 자기가 먹을 샌드위치 도시락을 직접 준비합니다. 아이들을 굉장히 강인하게 키우는 나라예요. 혹시 늦잠 자거나 게으름 피우다가 도시락 못 싸고 학교에 가더라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도와주지 않아요.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강조하는 게 자립과 자기책임, 그리고 협동정신이에요.

 

심지어 덴마크의 어떤 지방에서는 마약중독자들에게 공공기관에서 공짜로 주는 마약을 사용하든지, 치료소에 들어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답니다. 공짜로 주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값비싼 마약 때문에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철저한 자기책임이 강조되는 사회입니다. 탁아소나 유치원에서 어린아이들 낮잠을 재우잖아요. 기온이 섭씨 영하 15도로 내려가지 않으면 아이들을 옥외에서 재운다고 합니다. 물론 옷을 두툼하게 입혀서요. 지독한 사회예요. 그냥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피상적인 이미지와 많이 다른 게 느껴지지 않아요? 튼튼한 사회란 튼튼한 개인들이 이룩하는 사회라는 철학이 여기에 엿보입니다. 아이들을 건강하게, 강인한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는 거죠. 요즘의 한국 부모들이라면 자기 아이를 추운 바깥에서 재우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어요?

사실 지금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을 어떻게 키울지 아무 생각이 없잖아요. 지금과 같은 한국식 양육이나 교육방식을 통해서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밖에 나올 수가 없어요. 덴마크사회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부터 우리사회와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복지국가를 운위하기 전에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예요.

 

그런데 150년 전에 덴마크는 굉장히 비참한 나라였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에 패해서 국토의 절반, 그것도 가장 비옥한 토지를 빼앗겼습니다. 남은 국토는 유틀란트반도와 몇몇 섬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황무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덴마크인들은 희망을 찾아냈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는 그보다 좀 전에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유럽의 봉건체제가 흔들리던 와중에서 덴마크의 왕이 현명한 결단을 내려 농노들을 해방시켰던 일입니다. 당시 덴마크의 절대 다수 인민이 이렇게 해서 독립 소농의 지위를 획득했던 것이죠. 그럼으로써 피를 흘리는 혁명을 거치지 않고, 계몽군주의 영단에 의해서 덴마크는 근대국가로 성장할 준비를 했던 셈입니다.

 

만일 대다수 인민이 농노신분으로 전쟁을 하고, 국토의 절반을 잃는 비참한 상황에 빠졌다면 덴마크는 회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사회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각자가 소규모지만 자기 토지 소유가 가능한 독립 농민들이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땅을 살리거나 확보하기 위해서도 나라의 재건에 헌신했던 거죠. 예나 재나 농민에게는 자기 땅보다 더 소중한 게 없습니다.

 

게다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제대군인 중에 달가스라는 열렬한 애국자가 있었어요. 그는 덴마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안으로 유틀란트반도의 광범한 녹화를 제창했습니다. 달가스는 수십년 동안 죽을 때까지 나무심기에 온몸을 바쳤습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후풍토에 맞는 수종을 찾아내는 데에 결국 성공을 했고, 그 결과 유틀란트반도 전역이 푸른 숲과 목장과 기름진 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의 인민이 자유인으로 존재하면, 그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극복해낼 수 있다는 전형적인 예를 덴마크는 보여준 것이죠. 인민이 자유인으로 산다는 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더욱이 그 무렵 덴마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출현합니다. 그룬트비라고 아마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그룬트비는 원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육을 받고, 영국유학까지 갔다 온 사람으로,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종래 덴마크 교회에서 성직자들이 설교를 라틴어로 하던 관습을 깨고 농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토박이 덴마크말로 하기 시작했고, 교육도 철저히 평민교육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 성경의 문자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교회에 예배를 보러 오는 가난한 민중들 속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기성 제도권 교단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렇게 하면서 그룬트비가 옹호하고자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다수 민중의 이익이었던 거죠. 그는 덴마크어로 직접 시를 쓰고, 찬송가를 짓고, 스칸디나비아의 옛 전설, 민담, 신화를 열심히 수집하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내 보급했습니다.

 

우리는 덴마크라고 하면 대개 안데르센이나 키에르케고르를 떠올리지만, 지금도 덴마크 사람들은 그룬트비를 제일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그룬트비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국민고등학교'라는 농민교육기관의 설립입니다. 이 학교는 시험도, 자격증도 없고, 다만 배우고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몇개월이든 모여서 생활을 같이 하면서 농사에 관한 실습 이외에 철학과 문학과 역사를 배우는 선구적인 성인 자유학교였습니다. 이 '국민고등학교' 운동은 많은 호응을 얻어서 덴마크 전역으로 확대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덴마크 복지사회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국민고등학교'를 통해서 덴마크 사람들은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창조적인 실험을 했습니다. 덴마크가 지금 풍력발전으로 유명하잖아요. 풍력발전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곳도 바로 '국민고등학교'였어요. 오래전에 벌써 에너지문제를 생각한 거예요. 1970년대 초 오일쇼크 이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국민고등학교'에 모여서 생활과 학습을 같이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풍차를 돌려 전기를 생산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온 거죠. 모든 것을 자기들 힘으로 해보겠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귀리와 보리, 잡곡을 심고, 돼지를 키우며 자급하며 살았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짓다 보니 잉여가 생겨나고, 그것을 다른 유럽국가에 수출을 했습니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값싼 곡물이 유럽으로 쏟아지니까 경쟁상대가 안돼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국민고등학교'에 모여서 같이 고민을 하고 의논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해답이 협동조합입니다. 소규모 경영으로는 국제 농산물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재빨리 이해한 농민들이 각자의 독립성은 철저히 유지하면서 서로 연합하여 협동조합을 만들어 공동생산, 공동구매 활동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생활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한 거죠. 그래서 처음에 돼지사육 농민들부터 시작해서 전국 곳곳에 축산협동조합 운동이 일어나고, 점차로 다양한 협동조합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저도 어렸을 적부터 덴마크라고 하면 협동조합의 나라라고 익히 듣고 자랐어요. 협동조합이란 소규모 독립생산자들의 자주적 연합조직입니다. 그 조직에는 상전과 하인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참가자 누구나 대등한 자격으로 민주적 권리와 책임을 나누어 가지는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연합의 정신이 중요한 거죠.

 

_ 김종철, <녹색평론 119호, 2011년 7월~8월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