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대목에서 돈 이야기를 안할 수 없군요. 돈은 그 자체 절대로 나쁜 게 아닙니다. 돈은 우리들의 자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관계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시장에서 우리가 돈을 가지고 물건이나 서비스를 교환하는 것은 단순한 상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식을 넓히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생명활동이기도 합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불가결한 게 돈입니다. 우리는 돈 문제를 기피해서는 안됩니다. 돈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따라 돈을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요.
한때는 저도 돈에서 벗어나야 좋은 삶이 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강조했지만, 그것은 종교인으로서 할만한 발언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얘기예요. 돈 없이도 유일하게 가능했던 문명사회가 역사적으로 딱 하나 있습니다. 잉카제국이에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보면 잉카제국에서 사람들이 물자를 어떻게 구했는가 하는 게 그려져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신대륙을 탐험하거나 방문했던 초기 여행자들의 견문록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잉카제국에서는 모든 생산자들이 자기가 생산한 물건, 옥수수나 감자나 호미나 짚신을 마을의 공동저장고에 갖다 놓습니다. 그러면 짚신이 필요한 사람은 짚신을 갖다 쓰고, 감자 먹고 싶은 사람은 감자를 가져갑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쓰는 문자 그대로의 공산사회죠. 물론 이렇게 되면 좋죠. 복잡한 문명생활은 안되겠지만, 웬만큼의 문명적 생활이 가능합니다. 도시도 건설할 수 있죠. 다들 이런 식으로 사는 데 동의하면 그렇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잉카제국은 희귀한 예외일 뿐입니다. 다른 모든 문명사회는 공동물품창고 대신에 시장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화폐를 사용한 교환을 통해서 사회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장제도와 화폐제도가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되는 동안에 왜곡이 일어납니다. 돈이 단순한 교환수단을 넘어서 축적수단이 되고, 부를 독점적으로 차지하는 게 가능해지고, 강자에 의한 약자의 노예화라는 비참한 상황이 벌어진 거죠. 가장 악질적인 형태가 오늘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끊임없는 시도가 계속되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혁명운동이 그렇고, 협동조합운동도 모두 이 상황에 대항하기 위한 운동이죠. 그런데 화폐문제를 직시함으로써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논리를 극복하려는 시도들도 여기저기서 행해져왔습니다. 이것은 주목할만한 운동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발도르프학교라는 특이한 자유학교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발도르프학교를 창안한 루돌프 슈타이너는 20세기 초의 현인 중의 현인이었죠. 18세기 괴테가 있었다면 20세기는 슈타이너라고 할 수 있어요. 굉장히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20세기 초에 이미 근대적 농법 때문에 장차 세계 전역의 토지가 피폐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어떻게 하면 땅을 보존하면서 지속적인 농사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분이에요. 농업문제뿐 아니라 종교, 교육, 의료, 경제, 금융, 과학기술 등등 온갖 방면에 걸쳐 풍부한 대안적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인지학이라는 이름으로 종합했지요.
그 슈타이너의 이론 중에 사회삼층론이라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우리가 인간다운 생활을 하자면 그 사회는 기본적으로 세가지 영역이
제대로 기능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 세가지 영역이란 첫째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제생활, 둘째는 법과 정치, 즉 국가라는 테두리 속에서 영위되는 생활영역, 셋째가 인간의 정신생활, 즉 개인의 창조적 정신과 상상력이 발휘되는 문화, 예술, 학문, 교육활동이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슈타이너는 이들 영역이 제대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각 영역에 고유한 원리가 있다고 합니다. 경제생활의 원리는 우애, 그리고 법과 정치의 원리는 평등, 정신생활의 원리는 자유라는 거죠. 물론 이것은 프랑스혁명이 내건 이상입니다. 그런데 흔히 부르주아 정치사상가들에 의하면, 프랑스혁명의 이 이상은 실제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와 평등은 현실적으로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이상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뿐만 아니라, 우애라는 것도 현실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이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부르주아 정치사상가들이 자본주의사회를 영구불변의 절대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슈타이너가 사회심층론이라는 이론을 제시한 것은 자본주의사회를 넘어선 진실로 인간다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슈타이너는 그가 말한 사회의 세가지 기본영역이 실제로는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 침투,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습니다. 가령 인간의 정신생활은 국가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또 경제의 제한을 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영위되어야만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적 기량이 활짝 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정신생활의 자유가 보장됨으로써만 인간의 잠재적 소질이 마음껏 발휘되고, 따라서 경제도 국가도 활력을 띠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 영역은 어느 것도 경시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중에서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은 역시 우애의 원리에 의한 경제생활이라고 슈타이너는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사회란 무엇보다도 우애의 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슈타이너의 철학에 따라서 지금 독일의 일부 인지학회 회원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경제공동체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각자의 직장이나 일터에서 얻은 소득을 개인적으로 챙기지 않고, 공동계좌를 만들어 거기에 자신들의 소득을 개인적으로 모두 예치해 놓고, 개인적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꺼내서 쓰는 방법입니다. 마치 잉카제국의 공동물품저장고 같은 방식이죠. 누가 번 돈인지 따지지 않고, 소득 일체를 공동의 재산으로 간주하고,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료를 읽어보면, 자신이 애써 번 돈을 다른 사람이 고급 자동차를 사는 데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동체에 계속 참여하는 것은 우애의 정신을 강조한 슈타이너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사상운동은 지속적인 확대가 어렵습니다. 사회변혁운동이 개인들의 희생을 계속해서 강조한다면 그 사회운동은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인간적인 성숙을 위한 수련은 부단히 해야 하지만, 개인적 이기심의 전면적 부정은 인간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하기는 뜻이 맞는 이들끼리 자발적으로 재산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말릴 이유가 없지요.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복지시스템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애의 경제'를 이런 예외적인 소공동체를 넘어서 좀더 의미있는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자면, 역시 어느 정도의 제도적인 틀이 필요합니다.
그 제도화된 금융시스템이 바로 지금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여러 지역에서 수십년 전부터 실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회적 은행'이란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세계경제든 지역경제든 경제에 있어서 금융시스템보다 더 중요한 게 없어요. 2009년에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 파산 이후에 현대적 금융제도라는 게 근본적으로 사기협잡이라는 게 밝혀졌죠. 투기로 망한 금융회사와 그 CEO들을 배불리는 데 미국 국민의 세금이 1조달러나 들어갔습니다. 금융파생상품이니 뭐니 하면서 서민들의 재산을 강탈해간 사기꾼들을 살리는 데 말이죠.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까 당장의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자면 그 사기꾼들을 살리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가 지배했기 때문이죠. 아무튼 그런 현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현대금융제도의 허구성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사회적 은행'이 유럽에서 새삼스럽게 더 주목을 받고, 고객도 급격히 늘어난 것 같아요.
'사회적 은행'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보다도 금융시스템이 좀더 윤리적이고, 생태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 돼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설립, 운영하고 있는 금융협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이자가 매우 낮은 은행이에요. 그런 은행으로 전형적인 게 독일의 GLS(대부와 증여를 위한 공동체은행)이라는 겁니다. 물론 유럽의 '사회적 은행'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GLS은행은 슈타이너의 아이디어에 따라 설립된 은행입니다. 그래서 이 은행에 예금을 하는 사람들은 이자가 낮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돈이 공익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은행에는 은행 운영진과 주요 고객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있어서 대출금이 어떤 목적과 용도로 사용될 것인지 면밀히 검토한 뒤에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무상증여를 해줍니다. 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원칙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대체로 우리가 은행에 저금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이자가 한푼이라도 더 많은 은행이나 저축형태를 택하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생각해봐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것은 내가 예금한 돈이 어떻게 이용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서민들의 저금액은 물론 약소하겠지만, 그게 한푼 두푼 모이면 막대한 금액이 될 수 있잖아요. 그 돈이 악덕 기업이나 부패한 정치가들에게로 건너가서 아동과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착취하는 데 사용되고, 강과 숲을 파괴하고, 무기를 생산하는 데 쓰일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니, 단기적으로 고수익을 내는 사업일수록 대개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파괴하는 사업이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모르게 내가 결과적으로는 비윤리적인 범죄의 공범이 되고 마는 거죠. 이런 것을 생각하면 몇푼의 이자를 더 많이 받는 것보다는 내 돈이 좀더 가치있게 쓰이기를 바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회적 은행'이라는 게 굉장히 소중하죠.
그러나 이 은행도 수익을 전혀 도외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운영을 계속하자면 최소한의 이익이 있어야죠. 그래서 3P원칙이라는 것을 늘 강조합니다. Profit, People, Planet, 즉 이익을 내되 사람을 위하고, 지구를 위한다는 원칙입니다. 놀랍게도 이 은행은 197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 독일의 웬만한 도시에 지점들이 있고, 현재의 은행 총자산 규모는 독일 최대 은행이라는 도이체방크의 약 1/1000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순수한 서민들의 금융협동체로는 굉장한 실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것을 보면 독일 시민들의 수준이 느껴져요. 이번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태에 대해서도 가장 이성적인 반응을 보여준 국가가 독일이잖아요. 원자력발전을 조만간 모두 폐기하겠다는 결정을 국가적 차원에서 과감하게 내렸잖아요. 메르켈 수상이 선거가 무서워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수 없습니다. 시민적 성숙성이라는 기반이 없으면 불가능한 결정이죠. 독일에서 녹색당이 왜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겠어요? 열렬히 호응하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나라에도 녹색당을 만들어보겠다는 그룹이 있는데, 당분간은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녹색당 창당이 가능하자면, 보다 기초적인 작업이 선행돼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 하나라도 '사회적 은행'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운영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협동체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히 전개될 때 녹색당은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_ 김종철, <녹색평론 119호, 2011년 7월~8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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