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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감사원장_ 이회창

정정진 2026. 2. 16. 12:44

법관이 된 뒤에도 명쾌하게 이론을 펴는 동료 법관을 볼 때면 내가 법관으로서 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느껴지기도 했다. 또 복잡한 사건 기록과 씨름하다 보면 내가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심판자로서의 자질도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열등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먼저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씻어내야 했다. 내가 행했던 한 가지 방법은 하루 일을 끝내고 취침 전 묵상 시간에, 그날 일을 돌아보며 '나는 신이 이 세상에 내놓은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다. 누구도 나의 존귀한 삶을 해칠 수 없다'는 신념을 다지면서 상상 속에서 이 신념의 목표를 마음속의 옹달샘에 부어 부정적 생각의 쓰레기를 말끔히 씻어낸 것이다. 대법원,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쳐 정치에 들어온 뒤에도 이런 묵상은 계속 되었지만 다음날이 되면 또 쓰레기들이 쌓이곤 했고, 다시 씻어내야 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과거 심리학계의 주류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칼 융이 사람의 행동이나 트라우마는 과거의 경험이 그 원인이 된다는 원인론을 주장한 데 대해, 이러한 과거 경험의 원인론을 부정하고 사람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행동할지 목적을 정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목적론을 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자신을 발전시켜 나간다고 주장한다. 마음속에 있는 쓰레기들은 일일이 끄집어낼 필요 없이 당신이 바라는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고 그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뒤에 말하는 후기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에픽테토스의 사상과 매우 흡사한 데가 있다. 나는 끊임없이 쌓이는 마음의 쓰레기를 매일 묵상으로 청소했다. 그러는 사이 존귀한 존재라는 자각을 갖게 되고 현실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여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젊은 시절 앙드레 모루아의 <영국사>를 읽다가  유명한 토머스 베케트에 관한 대목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일이 있다. 영국의 헨리2세 때 30대의 젊은 베케트는 왕의 총애를 받던 유능한 대신이었다. 왕이 신임하는 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자 그가 말했다.

 

"폐하는 저를 사랑하셨던 만큼 앞으로 저를 증오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폐하가 교회 문제에 관해 갖고 있는 권한을 저는 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자는 하느님과 왕 중 어느 한쪽을 거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후 그는 교회의 권리와 관련해 왕과 강하게 맞서다가 결국 왕의 기사들에 의해 제단 앞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그의 시신에서는 수도자들이 고행 때 몸에 걸치는 고행대와 고행의 매 자국이 발견되었다. 그는 단순히 교회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왕과 맞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완전한 사제가 되기 위해 정진했고 순교도 불사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루아는 그를 왕 밑에서는 완전한 왕의 대신이 되고자 했고 대주교가 된 후에는 완전무결한 성자가 되고자 했던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나는 베케트가 가진 삶의 자세, 현재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그 직분에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자세에 감동을 느꼈다. 나는 감사원장으로 가면서 이 토머스 베케트의 말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렇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충신도 아니지만 감사원장을 맡은 이상 완벽한 감사원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이렇게 감사원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추진한 데 대해 자기 기관의 위상만 생각하는 부처 이기주의라거나 심지어 인기만을 의식한 소영웅주의라고 비판하는 소리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참으로 어처구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부임할 당시 감사원은 그야말로 동네북이었다. 전임자인 김영준 원장은 실력이 있고 통솔력도 훌륭한 인격자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구 정권에서의 부정부패와 기강해이가 마치 감사원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책임인 것처럼 질타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려 어쩔 수 없었다. 당시 감사원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직에 청와대 경호실이나 안기부 출신 인사들이 임명된 것도 한 가지 원인이 된 것 같다.

 

감사원장으로 부임해보니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감사원은 나름대로 성실하고 정직한 능력 있는 기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정권 교체기의 전 정권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 속에서 감사원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처럼 오해받고 질타당해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독립기관인 감사원이 대통령의 지시, 감독을 받고 대통령에게 좌지우지된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야말로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할 만큼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1. 나의 삶 나의 신념 / 이회창 회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