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그 이념으로 하고 있는 국가이다. 그렇지만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체계적으로 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사랑과 날씨처럼 느끼기는 쉽지만 막상 설명하기는 어렵다. 자유민주주의는 다양한 사상들과 제도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결합되어 발전해 왔다.
문재인 정부는 교과서 집필 기준을 발표하면서 '자유'를 뺀 '민주주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 이것은 커다란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를 빼면 그 민주주의가 '민중민주주의'인지 '인민민주주의'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라고 정확하게 명기를 하고 그 핵심 원리들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 옳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는 크게 다섯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보호를 최우선적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 우리는 이것을 '천부인권'이라고 부른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이런 권리들에는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이 포함되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런 권리를 가진 인간을 우리는 '개인'이라고 부른다. 자유민주주의는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바로 그 권리의 주체이다. 개인은 국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이런 권리들을 갖고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 원리이다.
둘째, 자유민주주의는 입헌주의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입헌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헌법에 명문화하여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오늘날 모든 국가의 헌법이 '기본권' 조항에 명시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헌법의 경우 전문과 총강에 이어 바로 '국민의 권리와 의무'라는 기본권 조항이 나온다.
그러나 이 조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개인보다 훨씬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폭정으로 바뀔 수 있다. 미국 <연방주의자 논고>에서 제임스 메디슨은 "만약 인간이 천사라고 한다면 국가는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천사가 국가를 지배한다면, 국가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제도적 장치는 필요 없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주장을 다시 설명하면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가 필요하다. 천사가 국가를 지배하지 않기 때문에 지배자와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입헌주의는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 국가를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로 나누고 있다. 이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 입헌주의이고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원리를 구성한다.
셋째,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사회라고 하는 자율적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민사회의 존재는 개인은 국가로부터 독립된 사적 영역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큰 원 안에 작은 동심원을 그려보자. 안에 있는 작은 동심원이 국가라고 한다면 그 원과 밖에 있는 큰 원 사이에 존재하는 그 영역이 시민사회이다. 이 영역이 바로 개인의 종교와 경제 활동, 친목단체와 교육 활동 등 다양한 개인의 자율적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다. 이 공간이 국가에 의해서 압살될 경우 그 체제는 북한과 같이 전체주의로 타락하고 만다.
서양에서 종교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이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과 종교전쟁을 불러온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종교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개인의 독립된 사적 영역을 확보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나긴 투쟁 과정에서 탄생한 정치사상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국교가 존재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
개인의 사적 영역은 종교를 넘어서서 집회와 결사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자유의 보장, 자유로운 시장경제활동의 보장, 다양한 이익단체의 결성 등으로 그 영역이 더욱 확대되면서 오늘날처럼 성숙한 '시민사회'의 모습이 형성되게 되었다. 건국 직후 한국의 시민사회는 매우 취약했지만 산업화와 경제발전과 함께 국가로부터 독립된 영역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넷째,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는 법치주의이다. 이것은 인간이 남녀, 종교,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치주의는 자유민주주의 또 다른 원리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의 범위 내에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고, 남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마음대로 하는 '방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는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려야 할 권리이다. 권리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권리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와 권리의 평등성은 법치주의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 위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기자 마이클 브린은 <한국, 한국인>이라는 책에서 한국의 법치주의는 '국민정서법'에 의해서 종종 침해받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국민정서'라고 하는 괴물을 감옥에 가두지 않는 한 한국에서 법치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그의 비판에 한국인들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섯째, 자유민주주의의 중요한 원리는 국민주권론과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여 국민주권론을 명시하고 있다. 국민주권론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서 처음 제시된 후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 원리로 자리 잡았다.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국민은 주권자이지만 그 권력을 직접 행사하지 않는다. 위의 헌법 규정에서 말하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의미는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해서 대표를 뽑아 일정기간 국정 운영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대통령은 전국구 대표, 국회의원은 지역구 대표인 것이다.
클로드 르포르가 주장하는 것처럼 왕조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왕이 떠나버린 '빈 자리'에 왕을 대신해서 '국민'이라는 상징적 존재가 그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한국의 경우 그 '빈 자리'에 5천만이 모두 앉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권자인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하여 대표를 뽑아 그들로 하여금 일정 기간 동안 그 '빈 자리'에 앉아서 통치를 하게 하는 것이다.
북한처럼 그 '빈 자리'에 김일성과 김정일이 앉았다가 김정은으로 세습되어 김씨 일가가 영구히 그 '빈 자리'를 차지하는 정치체제는 전체주의체제로 타락하는 것이다. 전체주의체제 하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소멸되고 만다. 김씨 가문의 지배를 받는 북한 사람들은 김정은을 빼고 모두 평등하다. 그것은 '노예 속의 평등'일 뿐이다.
이와 달리 자유민주주의는 왕이 떠나버린 그 '빈 자리'를 항상 비워두고 복수의 정당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 경쟁이 바로 '정치'인 것이고, 그 정치는 대의제 민주주의로 수렴된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주권론을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제도화시킴으로써 개인들은 '자유 속의 평등'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아 직접민주주의를 못하기 때문에 편의상 채택된 제도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직접민주주의는 좋고 대의제 민주주의는 간접민주주의로서 나쁘다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는 노예의 존재에서 보는 것처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오늘날의 대의제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원리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 국민의 대표자들이 국민적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사욕을 채우고 당파 싸움에 골몰하는 타락한 정치현실을 볼 때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불신감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 자유민주주의체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국민들은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선거를 통해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대표들을 교체해나가고 항상 대의제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비판과 감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상의 다섯 가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들과 함께 우리가 놓쳐서 안되는 중요한 사실은 자유민주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생활양식의 문제라는 점이다. 자유 없는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체제하에서 사는 것과 '자유 속의 평등'을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에서 사는 것은 생활양식의 측면에서 볼 때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체제에 기반한 통일한국을 추구하는 것은 북한 동포들도 우리처럼 자유와 인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전체주의적 사고의 일상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 원리들에 대한 이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미중 패권전쟁과 위기의 대한민국_ 김영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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