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티브 세금'과 부유세
온 국민에게 일정액을 조건 없이 주는 '기본소득제'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1516년 토머스 모어는 소설 '유토피아'에서 "훔치는 것 말고는 목숨을 부지할 다른 어떤 방법도 없는 사람은 아무리 가혹한 형벌로도 막을 수 없다. 절도범들을 끔찍한 형벌로 다스리고 있지만, 그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약간의 생계 수단을 제공하여 목숨 걸고 훔치는 절박한 상황을 없애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다"라고 썼다. 그 후 계몽주의 사상가 토머스 페인,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 등이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제 논리를 개발하는 데 일조하였다.
20세기 들어서는 제임스 토빈같은 좌파학자들이 '기본수당'을 제안하였다. 기본소득제나 기본수당과 부분적으로 상통하는 개념으로, 노벨 경제학상(1976) 수상자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부의 소득세' 개념을 제시하였다.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프리드먼은 소득 있는 사람이 국가에 내는 세금은 '포지티브'한 소득세, 다시 말해 국가 재정에 돈을 더해 주는 덧셈법의 소득세이지만, 직업이 없어 소득세 납세 의무도 없는 사람이 국가로부터 받는 돈은 네거티브한 세금, 즉 국가 재정에서 돈을 빼내는 뺄셈적 의미의 세금이라고 했다. 기본소득제, 기본수당, 네거티브 세금 이론 등은 20세기 중, 후반 한때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이들의 제안은 현실 정치에서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에서 보수파 대처와 레이건이 등장했으며, 유럽 대륙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후퇴했다.
그러나 미국의 현재 상황은 다시 만만치 않다. 일례로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한 민주당의 유력 대권 주자 엘리자베스 워렌 메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은 미국 '슈퍼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부유세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워렌은 자산 규모 최상의 7만 5천 가구를 대상으로 가구 합산 자산 5천만 달러(약 590억 원)를 초과하는 순자산에 대해 매년 2퍼센트, 10억 달러(약 1조 1,900억 원)이상 자산에 대해서는 3퍼센트의 부유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위스와 핀란드의 실험
현대의 기본소득제 논의는 좌파 쪽에서 먼저 주장했지만, 우파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단순화된 복지 제도를 원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 제도에 별 거부감이 없다. 기본소득제야말로 복잡한 복지 시스템 대신 관료의 재량권이 최소화된 복지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본소득 제도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기존 복지 제도의 복잡성과 비효율성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평등주의 성향의 좌파 지식인들은 수혜자들에 대한 '낙인 효과'를 방지해 준다는 이유로 이 제도를 선호한다. 다시 말해, 빈곤층 자녀에게만 급식을 제공하면 '가난한 집 아이'라는 게 다 알려져 아이의 인권이 침해되므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급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보편복지론과 같은 얘기다.
컴퓨터 기술 발전과 기본소득제를 연결시키는 논리도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사람의 노동력을 로봇이 대체함에 따라 일자리 감소가 필연적인 만큼,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여 최소한의 기본 생활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좀 더 가치 있는 다른 삶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즐기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반드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구시대적 고정관념이라고 말한다. 수렵채집 사회의 인간은 먹고살기 위한 만큼의 수렵과 사냥을 했을 뿐 그 이상의 노동은 하지 않았는데, 현대인은 노동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그러니 앞으로 노동 시간을 더 줄일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이 필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자고 말하며, 스포츠, 연극, 영화, 시, 소설, 미술, 음악 등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로봇과 인공지능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불안감이 짙게 드러워진 주장들이다. 스위스의 기본소득 주장 시민단체 BIS의 체 바그너 대변인도 "앞으로 로봇으로 인해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기본소득을 주면 그들의 무임금 노동이 보다 가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기본소득이 있으면 사람들은 직업을 선택할 때 돈 이외에 다양한 조건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2016년 6월, 드디어 스위스에서는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성인 한 사람에게 매월 2,500스위스프랑(약 275만 원)을 주는 법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내용이었다. 얼핏 모두가 찬성할 것만 같았던 이 제안은 그러나, 투표일 46.3퍼센트(246만여 명)에 찬성 23.1퍼센트, 반대 76.9퍼센트라는 압도적 표 차이로 부결됐다. 대다수 국민들은 재정 부담이 커지고, 복지 제도가 축소되며, 이민자가 급증할 것을 우려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2017년 1월 핀란드 정부는 무작위로 뽑은 시민 2천 명에게 매달 560유로(약 70만 원)씩을 지급하는 기본소득 실험을 실제로 가동했다. 조건 없이 돈을 주면 사람들이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을 것이라는 핀란드 정부의 설명은 우리를 다소 당황하게 만들었다. 공짜 돈이 생기면 일을 적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는 이 의문은 너무나 잘 갖추어진 핀란드 복지 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세계 1위 휴대폰 제조사이던 노키아가 몰락하고, 최대 교역국이던 러시아가 유럽연합의 경제 제재를 당하면서 교역 시장이 축소되자, 핀란드는 2012년 이후 마이너스 성장이 계속되었다. 실업률이 9.5퍼센트(2016)에 이르렀고, 특히 청년 실업률은 22퍼센트 수준을 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한 복지 제도 때문이었다. 경제 사정이 나쁘다 보니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상당수는 저임금의 파트타임이나 임시직이고, 이런 일을 해서 받는 돈은 실업 수당과 비슷한 소액이다. 그러니 일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놀면서 실업 수당을 챙기는 것이 훨씬 더 몸이 편하고 좋다. 당연히 놀고먹는 젊은이가 늘어나고 실업률이 치솟은 것이다.
그래서 핀란드 정부는 이미 돈을 벌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공짜 돈을 주어 보기로 한 것이다. 기존 실업급여는, 저임금의 파트타임이라도 일단 일자리를 얻게 되면 지급이 중단되지만, 기본소득은, 일자리를 얻더라도 계속 지급된다. 일을 더 하면 소득이 더 늘어날 것이고, 따라서 젊은이들은 더 큰 소득을 위해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핀란드 정책 입안자들의 생각이었다. 실험 대상자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취업 증가세가 나타나면, 이 제도는 일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게 정부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시행 초기부터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섰다. 찬성론자는 최소한 먹고살게는 해 줘야 실업자가 제대로 된 좋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욕구가 생길 것이라고 주장했고, 반대론자들은 세금으로 놀고먹는 베짱이를 대거 양산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론조사도 호의적은 아니었다. 처음엔 핀란드 시민들 70퍼센트가 기본소득 도입에 찬성한다고 응답했지만, '소득세를 증세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기본소득 도입에 찬성하는가'라는 2차 질문에 찬성 응답은 35퍼센트로 떨어졌다. 경제개발협력기구의 2018년 3월 분석에 의하면 핀란드가 기본소득제를 국가 전체로 확대하려면 국민의 소득세 부담률은 기존보다 30퍼센트 더 높아진다.
결국 핀란드는 실험 1년 3개월 만인 2018년 4월에 계획을 완전히 접었다. 유의미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국가가 개인에게 조건 없이 '공돈'을 주는 실험은 사실상 실패했다. 기본소득제 신중파의 우려가 옳았다. 핀란드의 실험 실패와 스위스의 국민투표 부결로 이제 기본소득제 논의는 세계적으로 완전히 설득력을 잃었다.
한국의 경우
한국의 현금 뿌리기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 실업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선심성 정책일 뿐이다.
일부 지자체들이 청년층 등을 대상으로 지급하는 '디딤돌', '드림' 등 다양한 명칭의 수당은 기본소득과 비슷한 개념이다. 취업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활동비 명목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2016년 서울시가 제일 먼저 도입했고 이후 다른 광역시와 도로 확대되었다. 2019년 7월 말 현재 청년 수당을 지급하는 곳은 12곳이다. 서울, 부산, 인천, 대전, 전남, 제주 등 여섯 곳이 6개월간 300만 원을 지급했고, 강원도는 2019년 하반기에 역시 300만 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경남은 200만 원, 울산은 180만 원, 대구 150만 원, 경기 100만 원을 지급했다. 광주광역시는 2020년 상반기에 240만 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연령 기준은 대부분 만 18세 또는 19세부터 시작해 만 34세 또는 35세까지이다. 인천은 연령 기준을 만 39세까지 넓혔고, 경기도는 만 24세로 한정했다.
충청남도는 2018년 11월부터 만 1세 영아에게 '충남 아기 수당'을 별도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부가 주는 아동 수당(7세 미만에 월 10만 원)에 더해 월 10만 원을 추가로 더 주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 안산시와 강원도 정선군은 저출산 극복 차원에서 유사한 수당이 별도로 나간다.
지방 재정 가운데 사회복지 예산은 2013년 34조 9,920억 원에서 가파르게 상승해 2019년에는 66조 1,588억 원에 달해, 6년 만에 2배가 되었다. 중앙정부 전체의 사회복지 예산이 같은 기간 99조 3천억 원에서 161조 원으로 66퍼센트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중앙정부보다 지자체의 복지예산 증가 속도가 훨씬 빠르다(조선일보 2019.10.10). 과도 복지로 재정에 구멍이 나면 지자체들은 중앙정부에 떠넘길 것이고, 그 부담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경제 성장이 자꾸만 둔화되는데, 국민이라고 무한정 세금을 낼 여력이 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이미 기본소득제가 폐지되었음에도, 그리고 이미 기본소득에 버금가는 수당을 받고 있음에도, 2019년 10월 서울에서는 기본소득제 지지 행진이 벌어졌다. 150여 명의 젊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은 아무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피켓을 들고 대학로에서 보신각까지 시위 행진을 했다. 이날 전 세계 10개국 26개 도시에서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국제 기본소득 행진'을 동시에 진행했다고 주장하면서.
참여자들은 차별과 낙인, 사각지대, 불필요한 행정 비용 등의 문제를 기본소득제 실시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우리나라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이 가난하고 무능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것부터가 차별이므로, 빈곤을 증명하지 않고도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소득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될 것에 대비해 기본소득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까지는 소득이라면 자산 소득 혹은 노동 소득밖에 없었는데, '제3의 소득'을 한번 생각해 볼 때가 됐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계속 가려면 어쩔 수 없이 소비할 사람이 필요하고, 부자들도 혁명을 안 당하려면 뭘 좀 내놓고, 그러면서 같이 사회가 돌아가야 하지 않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대놓고 '부자 돈 뺏기'를 주장하는 이 말은 현금을 마구 살포하는 복지 포퓰리즘이 젊은이들의 영혼을 얼마나 타락시키는지 적나라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자본주의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 실험을 한 목적은 일하는 사회를 만들고 사회보장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지 단순히 집권 세력의 선거운동 차원이 아니었는데, 한국의 현금 복지는 세금을 내는 중산층 이상 납세자들과 나라 경제만 멍들게 하고 있다.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_ 박정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