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종교

방언과 신유에 관하여_ 김형석

정정진 2017. 1. 14. 12:22


모든 종교는 그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미신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미신적인 신앙도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기독교도 그 점에서는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미신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참 신앙의 길을 넓혀갈 것인가가 과제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미신 또는 이단이라는 관념을 갖고 나타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방언 또는 신유의 문제다. 우리는 흔히 '방언'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나 그것은 '헛된 소리'라고 해야 좋을 것 같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합동 번영에서는 헛된 소리로 번역하고 있다. 방언은 표준어가 아닌 지방 말이라는 뜻으로 알아듣기 힘든 말을 지칭한다. 헛된 소리 또는 헛된 말은 누구도 그 뜻과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가리킨다.


이러한 헛된 말로서의 방언은 옛날부터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말은 철학이나 사상계에는 없었고 종교계에만 성행했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심했고 예수나 바울 당시에도 성행했다. 그러다가 철학이 발달하고 과학 및 논리적 사고의 비중이 커지면서부터 헛된 말로서의 방언은 자취를 감추어가는 추세가 되었다.


신유에 대한 문제도 그렇다. 예수 당시나 초대교회에서는 기도와 안수에 의한 병의 치유가 흔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의학적인 치유보다 안수와 기도에 의한 치유가 더 손쉬우며, 의료적으로는 불가능한 치유가 기도와 안수로는 가능하다는 생각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런 뜻이 남아 있어 지금도 서울과 같은 도시 한가운데에 방언과 신유를 교회의 지표로 삼는 곳이 있다. 또 그런 교회일수록 그 신비성을 체험하고 효과를 얻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이 때문에 지금도 방언과 신유는 참다운 의미에서 기독교적인가를 묻게 된다. 어떤 곳에서는 그것들은 교회의 가장 소망스러운 본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초대교회가 그렇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적 수준이 높은 또 다른 교회에서는 그런 면에 치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심지어는 이단이라고까지 규정짓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대한 바른 판단과 신앙의 길이란 무엇인가.


한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우리 사회에 상당히 알려진 40대 후반 여성이 있었다. 대학에서 예능분야의 교수직을 맡은 바도 있었다.

그 교수는 개인적, 가정적으로 고민에 빠져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찰을 찾아갔다. 신앙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원로 스님과 협의를 해 얼마 후에는 백일기도를 작정하고 수도를 실천하기로 했다.


처음 얼마 동안에는 마음의 안정도 얻고 속세의 번뇌를 잊는 것 같아 좋았는데, 체질적으로 끊을 수 없었던 육식도 폐하고 소식과 금식을 이어가면서 기도를 드리는 동안 건강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기도를 드리다가 잠에 빠지게 되면 이상한 환상을 보기도 했고, 마귀가 엄습해 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입을 열면 자기도 모르는 말을 오래 계속하기도 했다. 허탈한 상태로 쓰러졌다가 얼마 후에야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일도 생겼다.


교수는 큰 스님에게 걱정스러운 실정을 이야기했으나 스님은 그것이 악마의 시험과 유혹이니 좀 더 참고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젊은 스님에게 그 사실을 상의했더니 스님은 집으로 돌아가 음식도 이전같이 먹고 건강회복을 위해 휴식을 취하라고 권고했다. 교수는 집으로 돌아와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즈음 나는 방송을 많이 하고 있었고 종교문제에 관해서도 방송을 할 때가 있었는데, 내 방송을 들은 교수가 나를 찾아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상의를 해왔다. 나는 그 교수에게 어떤 종교적 신앙을 갖더라도 좋으나 신체 및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하며 고요하고 안정된 정서와 인격을 갖고 신앙을 갖는 것이지, 비정상적이거나 과도한 흥분 상태에서는 건전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회생활에서 갖는 인간관계에도 조용하고 엄숙한 성품과 자세가 있어야 하는데, 하물며 신앙이 비이성적이거나 정상이 못 되는 성격과 자세로 이루어질 리가 없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해 주었다. 교수는 내 뜻에 공감했고 건전한 신앙생활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다.

광주의 한 젊은이가 대학입시에 낙방했다. 우울한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친구가 찾아와 교회에서 산으로 금식기도를 하러 가니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권고를 해왔다. 그는 우울한 심정도 달랠 겸 금식기도에 참여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교회에 나가본 일이 없는 젊은이였다.


그는 산에서 물만 마시면서 기도회에 참여했고, 자기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2~3일이 지난 후부터 정신상태가 혼미해지기도 하고 무의식 상태에 빠져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지곤 했다. 사람들은 그가 입신했다고 추켜세웠으나 젊은이는 도저히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부터는 자신도 모르는 말을 혼자서 지껄이게 되었다. 입만 열고 말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혼자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는 말씀대로 이 젊은이가 먼저 입신도 하고 방언도 하게 되었다며 부러워했다. 잡스러운 생각과 속된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깊은 회의와 피곤한 심신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즈음 그는 내 책을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정말로 그런 것이 신앙인지, 또 앞으로 그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좋겠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는 그에게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기를 권했고, 평상시와 똑같은 자세와 생활 속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를 배우며 친구들과 즐거운 사귐을 가지면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해 주었다. 신앙은 비범한 삶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비정상적인 삶이나 행동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니, 가장 성실하고 경건한 자세로 신앙적 교훈과 행위를 배우라고 이야기했다. 이상스럽게도 이 두 사람 다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방언을 체험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내 친구인 한 교수와의 대화다.

어떤 날 한 학생이 내 방에 찾아와 자기가 다니는 교회와 방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내 방에 들어선 K 교수가 다시 방에서 나가려고 하다가 내 권고로 그대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K 교수는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이였고 연세대학교 교수로 있기는 했으나 기독교와는 무관한 학문과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화를 끝낸 학생이 밖으로 나간 뒤였다. K 교수는 나에게 "기독교에서도 방언을 합니까. 제가 요즘 연구비를 받아 재래종교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있는데 그런 재래종교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방언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현대종교라고 볼 수 있는 기독교에서는 그런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요..." 라면서 의아해했다.


K 교수는 방언은 버림받은 미신적 요소인데 연세대학교가 소속되어있는 기독교도 그런 미신적 요소를 갖고 있는가를 이상하게 여겼다. 나는 그에게 "옛날에는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많은 종교가 방언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구약에도 방언 이야기가 자주 있고 예수 당시와 초대교회에서도 방언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의 이성적 비판과 학문적인 연구가 계속되면서 점점 방언이 없는 방향으로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의 모든 분야에서 방언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학생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아직도 방언하는 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왔던 것입니다." 라고 대답해 주었다. K 교수는 "그러면 이해가 갑니다. 저는 기독교에 방언이 있다고 해서 뜻밖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면서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성경을 읽어보면 초대교회에서는 방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이 대중화되었던 모양이다. 바울 사도도 그 문제에 관해서 큰 우려를 했던 것 같다. 바울은 그 당시에 방언하는 사람, 통역하는 사람, 예언하는 사람, 이성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모두 열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방언에 대해서는 명확한 태도를 보류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남이 모르는 방언을 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적 행동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으므로 통역자가 없거나 통역을 할 수 없는 방언이라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를 염려했다. 오히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폐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 개인의 신앙적인 방언을 하는 것은 권하고 싶으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는 요청할 수는 없다는 자세였다. 오히려 통역이 더 필요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 이성적인 교훈 중에서 방언보다는 예언이 중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이성적인 교훈이라고 못 박았다. 만 마디의 방언보자 다섯 마다의 이성적인 교훈을 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바울은 방언을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귀중한 것은 자신이 택하고 있는 이성적 개념을 통한 진리의 가르침이었다. 사실 예언은 필요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성적인 진리의 교훈은 인기가 적고 모두가 반기지는 않으나 그편을 택하라고 권고했다. 바울이 방언은 심령에 속하는 것이지만 진리는 이성을 통해 전달될 것으로 본 것은 감정이나 정서적인 신앙에 치우치는 것보다 이성적이며 지성적인 진리의 전달이 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길이 바로 바울이 택했던 신앙과 전도의 정도였다.


신유의 문제에서도 그렇다.

예수께서는 절망에 빠진 병자들을 많이 고쳐주었다. 사랑의 능력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 하나는 병고의 절망에서 구출해주었다는 것은 병 자체를 고쳤다기보다는 영혼의 치유와 인간애의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더 소중히 여겼다는 점이다. 예수의 더 큰 목적은 진리로서의 복음에 있었지 병을 치료하는 데 있지 않았다. 병을 고쳐준 것도 그의 인간적 구원을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요사이 일부 교회 사람들은 의사에게 맡길 책임까지 떠맡으며 병 치료가 전부이고 제일인 듯이 착각하고 있다. 안수기도 때문에 환자를 숨지게 했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교회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신유를 전도의 수단으로 삼는 지도자들을 볼 때는 기독교의 소망스러운 방향에 대해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원불교에서는 사찰이나 부처님께 병이 낫기를 기원하기보다는 의사를 키우며 많은 사람이 의료혜택을 받게끔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교의 장래를 위한 바른 선택이라고 우리 모두 믿고 있다. 방언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있었던 일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보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뜻과 더 일치되는 하늘나라 건설의 길인가를 계속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낡은 것과 새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사에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창조의 신앙인 것이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_ 김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