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세대학교에 봉직하고 있을 때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구본명 교수가 부임해 온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우리 대학은 가능하다면 크리스천 교수를 맞아들였고, 또 학교에 와 있는 동안 신앙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것이 대학 측의 뜻이기도 했다. 나는 구 교수에게 "혹시 읽으셨겠지만 시간이 나시면 읽어 보세요."라며 성경을 한 권 선사했다.
얼마 후였다. 구 교수는 나에게 "주신 성경의 구약 부분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는 종교 경전이라고 보기에는 마땅치 않아 보이는 기록들이 자주 나오더군요. 떳떳한 이유나 목적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싸움을 하는가 하면,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하기도 하고요. 심지어는 아버지를 취하게 만들고 동침해서 아들을 낳는 장면도 있고요..." 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렇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것들과 사건을 통해 소망스러운 종교와 신앙의 길로 승화시켜 가는 것이 구약 역사의 과정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구 교수는 "그건 그럴 것입니다. 종교 경전이라고 해서 좋은 이야기만 쓰고 나쁜 장면들은 제외한다면 역사적인 정직성을 상실하게 되겠지요. 사회에는 선과 악이 섞여 있고 과오와 죄는 언제나 뒤따르게 마련이니까요. '논어'에는 선한 교훈이 쓰여 있고, 불교 경전에도 죄악스러운 인간적 기록들은 비교적 괄호 안에 넣어두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누가 보든지 역사적 기록 그대로였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유교 정신은 도덕과 윤리성에 있고 불교 경전은 철학적 사색과 이론이 중심으로 되어 있는데,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라고 평가받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아직 다 읽지도 못했고 충분한 사고의 여유는 없었습니다만...." 이라며 이야기를 덧붙였다.
종교의 목적이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다면 인간을 가장 비참한 위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환희에 찬 위상까지 알려주고 체험하게 해야 한다. 죄인에서 성자가 되는 과정이 신앙 아니겠는가.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 비참함을 아는 데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인간의 어두운 면, 즉 부족하고 죄스러운 면들을 덮어두거나 감추어놓으려고 한다. 가롯 유다와 같이 악의 평가를 받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극악한 사람으로 평가하며, 베드로와 바울 같은 인물들은 결함이 없는 인물로 묘사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진실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므로 가롯 유다와 같이 될 수도 있고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구약을 평가할 때도 그렇다. 사람들은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모두 훌륭하게 미화시키고 있다. 그래야 신앙의 선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비교적 경건하며 믿음의 조상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누구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이에 비하면 그의 아들인 이삭은 대단히 무능하고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무능하지만 착한 것이 장점이었고, 리더십은 갖추지 못했으나 덕스러움을 잃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경에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쓸 것 없어 장가든 이야기와 우물을 파서 소유했다가 싸움도 별로 하지 못하고 쫓겨 다닌 기록이 대부분이다. 장가를 든 것도 종들이 시키는 대로 따른 것으로 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착하지만 무능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 야곱은 대단히 간교하고 정직하지 못한 수단꾼이었다. 어머니의 성격을 좋지 못한 방향으로 이어받은 것 같다. 그에게는 친구도 없었고, 자신을 믿어줄 만한 친지들도 없었다. 필요하면 외삼촌까지도 부담 없이 속이고 이용하곤 했다. 만약에 야곱과 사업을 함께 한다면 덕을 볼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어린 나이에 형의 노여움을 피해 하란으로 갈 때, 벧엘에서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있다. 그는 하느님에게 조건부의 장사치 같은 기도를 드리면서 약속을 꼭 받아내고야 만다. 야곱과 같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자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형 에서를 만나면서도 4명의 아내를 사랑하는 순서대로 취급한다. 위급해지면 가장 사랑하는 부인만이라도 데리고 도망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믿음의 세 선조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느님께 바친 뒤부터 거듭난 삶을 살게 되었고, 이삭은 우물을 여러 번 유순히 빼앗긴 후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은총에 머물게 되었다. 야곱의 경우 형과 화해한 뒤, 인생의 노년기를 만족스럽게 찬양하고 싶어졌을 때 하느님은 야곱에게 '벧엘에서 나와의 약속을 잊었느냐'며 회개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야곱은 크게 뉘우치고 온 가족을 이끌고 벧엘로 가서 하느님께 제단을 쌓았다. 그는 이로써 제2의 신앙적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회개와 축복의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세 사람은 믿음의 선조로 남게 되었다.
따져보면 우리도 그 세 사람 중의 하나다. 세 사람을 닮은 부족한 면들을 가진 인간 중의 인간이다. 그런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뜻과 삶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게 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 신부도, 목사도, 선교사도,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다. 뉘우침이 큰 사람은 축복도 커지며, 새 출발이 특출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거룩한 체해 보이려고 하니까 위선적이 된다. 다 같은 사람인데 자기에게는 과오가 없을 것이라고 행세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지속되면 병적인 위선자와 이중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어째서 종교인들 가운데 노이로제 환자가 늘어나는가. 어째서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신부가 그치지 않으며, 인생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사는 불행한 신앙 지도자들이 속출하고 있는가.
내가 있던 대학의 교목실장이었던 신과대학 교수가 미국에 있는 모교를 오래간만에 방문했는데, 그 대학 교수의 반 이상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하는 것을 들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그 목사 교수들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목사가 아닌 다른 교수들의 이혼율보다 신학 교수들의 이혼율이 높은 수치에 달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것이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어려운 현실인 것이다.
나 개인의 생각이다. 가급적이면 경찰관의 직업은 갖지 않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의 단점과 범죄성만 찾아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직업도 귀한 것만은 아니다. 항상 가르치고 제자들을 이끌어가야 해서 자신은 공부도 안하고 성장도 못 하게 된다. 사회 여러 분야 사람들에 비하면 그런 불행의 요소를 스스로 안고 있는 직업이다.
그러나 이들보다도 더 괴로운 직업은 신부, 목사, 스님 등이다. 그것이 직업을 위한 직업이 되면 고달픔과 고뇌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우리나라 장로교의 대표적인 목사 중 한 사람이었던 최거덕 목사의 사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 '신학 이외에는 어떤 학문이든 마음대로 택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먼 후일에는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내 며느리가 목사의 부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직언했다.
내 누이동생도 전도사 생활을 했고 목사가 되었다. 수준이 높은 교회의 전도사였는데도 그때 겪은 어려움은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이중적 요소, 자신을 거룩한 위치에 놓으려고 하는 위선적인 풍토 때문이었다.
여기에 따르는 불행이 무엇인가.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상실이며 거룩해져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인간성도 거룩함도 다 잃어버리는 불행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님은 부부싸움도 안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부나 수녀에게는 인간적 고뇌가 없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기독교는 금욕주의도 아니고 향락주의도 아니다. 그것들을 초월한 경건에 머물기를 원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 성실한 노력이 귀한 것이며 그 뜻이 서서히 채워졌을 때 우리는 그들을 믿음의 선배, 또는 거룩함을 찾는 인물로 평가한다.
신학자인 내 친구는 프로이트를 공부해 보고 나서야 신학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게 되었고, 목회자들이 얼마나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지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사실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의 이론을 알게 되면 스님들의 설법과 목사들의 설교가 얼마나 무책임한지, 소박하고 순결한 신도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부담을 주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런 뜻에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나의 하느님이 됨을 깨닫게 된다. 파스칼은 그 하느님은 철학자의 하느님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이 신학자나 설교자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결과가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_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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