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이밖의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여라! 단 한 시각도 아깝고 아깝다. 인생은 짧디짧으니!"
원효가 뗀 운을 한순간도 머뭇거림 없이 의상이 받았다. 열린 법당 문으로 뉘엿한 저녁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섭 존자와 관계된 세존의 삼처전심 이야기를 해 보면 좋겠군요. 소승이 문 앞에 있겠습니다. 문을 밀고 들어올지 말지는 벗님이 결정하시오."
원효의 제안을 법거량을 하겠다는 뜻으로 헤아린 의상이 씨익 웃었다. 원효가 연좌대 옆에 놓인 거문고를 끌어당겨 무릎에 뉘었다. 술대 끝에 '일심'이라 새겨진 붉은 광목 매듭이 달려있었다. 해가 지듯이 소리통이 울렸다.
"영산회상거염화"
원효가 느릿한 선율 위에 글자를 얹어 입을 열었다. 의상이 원효의 노래를 서사의 시로 받았다.
"영산의 붓다께서 법문하시던 어느 날 허공에서 연꽃잎이 눈처럼 흔날렸네.
설법을 멈춘 붓다께서 한 송이 꽃을 주워서 가만히 그 꽃을 들어 보였네. 붓다의 뜻을 알 수 없어 다들 황망한 그때 가섭 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네. 이심전심 염화미소. 팔만 설법의 문자나 교리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미소로 나타낸 가섭 존자를 붓다는 사랑하셨네."
의상은 흘러가는 물결처럼 거침이 없었다. 원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자탑전분반좌"
"붓다께서 다자탑 주위에 앉아 설법하실 때 가섭 존자가 분소의를 걸치고 뒤늦게 참석하였네. 설법을 듣던 수많은 수행 승이 가섭의 분소의를 얕보며 꺼려했네. 이때 붓다께서 가섭을 불러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그를 곁에 앉히셨네."
술대를 잡은 원효의 손에 신명이 붙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하하하. 웃음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사리쌍수곽시쌍부"
"임종 무렵 붓다께서 사리수 여덟 그루가 둘씩 짝지어 마주 선 사이에 자리를 깔게 하고 열반에 드시었네. 임종하는 자리에 부처의 으뜸 제자 가섭이 없었네. 부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가섭이 오거든 정법안장을 드러내리라 하셨네. 토굴에서 수행하던 가섭이 갑자기 수승한 광명을 보고 곧바로 붓다께 왔으나 붓다의 육신은 이미 관 속에 들어 있었네. 여래의 열반이 어찌 이리도 급작스러운가. 가섭이 울었네. 이 육신을 버리고 먼저 홀로 가셨군요. 가섭이 관 주위를 돌고 세 번 절하며 슬피 울며 말하였네. 그러자 관 속으로부터 붓다의 두 발이 나와 이를 내보이셨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거문고를 내려놓은 원효가 의상에게 물었다.
"지금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부처님의 금란가사를 전해 받아 불조법맥 1조가 된 가섭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순간, 원효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좀 전의 호쾌하고 갓맑은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원효는 굳은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돌변한 분위기에 긴장한 의상이 가만히 침을 삼켰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저는 의심합니다."
침묵을 깨고 원효가 입을 열었다.
"부처님의 금란가사라니요? 평생을 탁발하며 사신 붓다께 무슨 금란가사가 있겠으며, 누군가 비단으로 지은 가사를 바쳤다 해도 붓다께서는 그것을 소유하지 않았을 분입니다. 어찌 생각하오?"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듯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의상이 입술을 깨물었다. 국통 자장이 당에서 가져왔다는 금란가사 이야기를 한심하게 여겼으나, 부처님 당신의 금란가사에 대해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부처님은 거룩한 존재이시니 금란가사를 두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가섭 존자가 불조법맥을 이어받는 과정에서 스승의 가사가 전해지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들에게서 부처님의 금란가사와 법맥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의상은 한 번도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불조법맥이라니요? 이 또한 무슨 가당치 않은 말입니까? 경전을 통해 아는바, 붓다가 열반에 들려 할 즈음 아난다 존자가 간곡하게 붓다께 여쭈었습니다.
'붓다가 떠나신 다음 우리가 의지할 스승은 누구입니까?'
그때 붓다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후계자는 따로 없다. 영원한 스승은 내가 깨닫고 설파한 가르침이다. 그대들은 오로지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법이야말로 영원한 그대들의 스승이다!"
의상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지금 원효가 하고 있는 말은 의상 역시 경전을 통해 이미 아는 바였다. 그런데도 왜 자신은 가섭이 붓다의 법맥을 전수받았다고 생각한 걸까. 당혹스러워하는 의상을 보며 원효가 좀 전보다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방금 우리가 나눈 삼처전심 이야기 말입니다.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스님들을 통해 알음알음 전해진 이런 이야기들이 저는 흥미롭습니다. 비록 경전 바깥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듣고 받아들이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붓다와 그 제자들은 1000년도 더 전의 인물들이니 후대로 오며 다양한 일화들이 재구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에는 문향이 가득하지요. 시심이 느껴집니다.
저는 삼처전심 이야기를 음미할 때마다 스승과 제자간의 깊은 신뢰가 느껴져서 참 좋습니다. 일체의 권위와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서의 붓다..... 그분이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보여 준 곡진한 믿음과 정성 어린 배려 같은 것.... 저에게도 그런 스승이 계셨습니다...."
원효의 눈 속이 촉촉해지며 눈자위가 붉어졌다. 그런 원효를 관찰하며 의상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사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의상은 원효가 꺼려지면서도 끌렸다. 잠시 숨을 돌린 후 원효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재구성된 이야기 자체가 아닙니다. 이런 상징들은 경전과는 다른 감동을 주니 아름답습니다. 문제는 상징을 역사의 사실이라 믿게 될 때 부처님 말씀에 왜곡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붓다께서 후계를 정하지 않았음에도 가섭이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왜곡과 착각이 발생하면 법은 오염됩니다. 곡두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천축국에서 부처님 금란가사가 전해져 법맥을 이루고 그 법맥을 이어받은 달마가 중국에 와 중국 불교의 초조가 되고 그 밑으로 다시 법맥이 인가된다는 환각! 이런 환각이 은밀히 퍼져가면 필연적으로 중화주의와 사대주의를 강화하게 됩니다.
중국으로 유학 가서 법맥을 받아 오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벌어집니다. 요즘 나타나는 황룡사 현상을 보십시오. 황룡사의 물질적 타락은 이미 오래된 일이나 최근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유학파들이 일으키는 정통성 분란에 계파 싸움까지 가세한 데다 금란가사와 사리 다툼까지 얽히고설켜 있으니, 대체 거기를 어찌 절집이라 하겠습니까? 여기는 신라입니다. 당나라 장안의 어느 학파가 인가해 준 불교가 아니라 이 땅에는 지금 이 땅의 백성들이 원하는 불교가 필요한 거요!"
발원_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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