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성북동 길상사를 다녀왔다. 길상사라면 다 알다시피 예전의 유명한 요정이었던 대원각 건물과 그 땅이 사찰로 바뀐 곳이다. 시인 백석의 연인이라고 뒤늦게 알려진 대원각 주인 '자야' 여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거의 억지로 길상사를 떠맡게 된 이가 법정 스님이었고, 금년은 그 법정 스님의 입적 5주년이다. 스님이 만든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 관계자에 의하면, 최후까지 스님은 법회 때마다 환경문제를 걱정하고, 곁들여서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읽어보라고 늘 신도들에게 권유했다는 것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에 수많은 나무들에서 붉게 혹은 노랗게 물든 잎사귀들이 흩날리며 조용히 떨어지고 있는 길상사의 분위기는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강원도 산골에 홀로 기거하시던 법정 스님은 법회가 열리는 날 오셔서 단 하루도 길상사에서 주무신 적이 없다고 한다. 아무리 늦어도 강원도까지의 먼 길을 당일로 되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혹시 이 길상사의 지나치게 아름다운 경색 때문이었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진영각'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스님이 쓰셨던 유품들이 보관된 조그마한 전각이다. 과연 <무소유>의 저자답게 정말 몇 가지 안되는 소박한 물건들만이 유리장 속에 전시되어 있었다. 가사 한 벌, 목탁과 염주, 돋보기, 붓과 벼루, 원고지와 만년필 그리고 두메산골에서 세상소식과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준 소형 트랜지스터라디오 한 대가 전부였다(그리고 한구석에는 스님이 평소에 애독하셨다는 어떤 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아무 그림도 사진도 장식도 없이 그저 글자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책이 궁금해서 자세히 보니, 황송하게도, 그것은 <녹색평론>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법정 스님을 생전에 한 번도 뵙지 못했다. 젊을 적에 나도 그분의 책 <무소유>를 애독했고, 때때로 여러 지면에서 스님의 글들을 읽으며 잠깐씩이지만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녹색평론> 창간 직후부터 소문을 통해 스님이 이 잡지를 매우 아낀다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차일피일하다가 끝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스님의 5주기에 그분의 유품을 돌아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크나큰 회한에 잠겼다.
오늘날 절간이든 세속이든 법정 스님이 보여준 것과 같은 '무소유'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은 점점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물론 인간이 글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한 벌의 옷, 안경 하나 등등, 개인 소유물을 일절 지니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소유'란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가급적 필요한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소박하게 산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소유'의 삶이란 '무욕'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견강부회적인 말일지 모르지만, 법정 스님이 누구보다도 환경문제에 민감하고 늘 그 문제를 걱정한 것은 그분이 무욕의 인간, 그리하여 정신이 맑고 사리분별이 분명한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져보면 인간은 누구나 (오랜 수련을 행한 수도자라고 할지라도) 에고이즘을 벗어날 수 없다. 사심을 버리라고 우리는 곧잘 얘기하지만, 생각해보면 완전히 사심을 버리라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에고이즘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인간조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고이즘에 관한 간디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간디의 생애 말년에 주변에서 간디의 삶을 관찰하고 취재하던 한 서양인 기자가 있었는데, 그 기자가 한번은 간디에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평생 남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적인 생애를 살아왔느냐"라고. 이에 대해 자신이 자기희생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게 간디의 답변이었다. 간디는 자기가 남들을 위해서 살았다고 보는 것은 전혀 오해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만, 내 이웃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 내 조국이 독립에서 떳떳한 나라가 되어야 내 자신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비타협적으로 싸워왔을 뿐이며, 그런 점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해 살아왔을 뿐이라는 게 간디의 설명이었다. 이 논법대로 한다면, 결국 간디도 에고이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에고이즘 여부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이 자신의 진정한 이익인지를 옳게 이해'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 만약에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이익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정말로 제대로 이해한다면 지금 가장 화급한 문제는 기후변화로 대변되는 환경문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기후변화가 이대로 진행되고, 토지와 물, 바다 등 '환경'이 돌이킬 수 없이 오염, 파괴된다면 인간생존의 자연적, 물리적 토대 자체가 붕괴된다는 것은 너무나 기초적인 사실이다. 그런데도 갖가지 구실을 붙여서 이 문제를 외면하고 딴전을 피운다면,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자해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 대부분은 바로 그런 자멸적인 어리석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상황의 엄중함을 사람들이 몰라서가 아니다. 물욕, 권세욕, 명예욕 등 온갖 욕심으로 가득 찬 생활에 깊숙이 빠져 있는 마음의 습관 때문에 뻔히 알면서도 자멸의 길로 빠르게 가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환경문제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의가 이 상태로 방치된다면 곧 사회공동체 자체가 붕괴할 게 명확한데도 이 나라의 지배층, 엘리트들은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정책을 '경제개혁',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른 의견, 비판적인 목소리를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어리석은 행동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무욕'이란 개인뿐만 아니라 정치의 세계에서도 가장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이 나라가 지금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결국 한국정치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이 덕목의 현저한 결핍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경향신문, 2015-11-26)
발언2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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