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기 불교귀농학교]
제1강. 세계관_생명평화의 삶, 귀농
도법스님(인드라망 상임대표)
(2009.09.04.금)
귀농 또는 대안적인 삶
⇒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찾는 것.
∵ 지금의 내 삶이 답답하고 불만스럽고, 의문, 불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계속된 의문, 문제. 이 문제를 풀기위해 노력을 해 왔지만, 늘 있다.
많은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다. 왜 그럴까?
① 인생은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잊고 국가, 종교, 이웃, 가족 등에 의존한다.
이런 관계를 떠날 수는 없지만 내 삶은 내가 사는 것이다.
하지만 삶의 주체적인 것.
②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른 안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것은 거두어내야 할 두 가지 환상 때문이다.
1 물질적 환상
; 사회 일반적 현상. 하지만 쫒아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이후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2 정신적 환상
; 물질적인 가치를 쫒지만 답을 찾지 못해 정신적 가치를 쫒는다. 하지만 기도, 참선, 천국, 부처 등등 이런 것들에 현혹되어 답을 찾지 못한다.
실상과 허구가 뒤범벅.
⇒ 정확하게 가려내야 한다.
1. 물질적 환상 (부자타령, 경제타령, 자본주의)
부자.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부자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부자들은 행복한가?
부자라는것. 글, 말, 생각으로는 이루어지지만 구체적 사실, 내용으로는 없는 것. 즉 허구, 환상이다.
부자는 실현될수 없는 생각, 글 말 일 뿐. 이것을 쫒으면 안된다.
그런 것을 쫒는 것을 불교에서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한다. 망상, 거꾸로 됐다는 의미다.
인생은 사실, 진리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우리가 통상 부자라고 말하는 이들은 항상 부족하다고 느낀다.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이 돌아갈수 있는 것은 그만큼 희생당하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누구는 부자, 누구는 가난한 사람. 이 얼마나 非인간적인가.
우리는 모두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벋어나야 한다.
몇 년 전부터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새해 덕담처럼 쓰이고 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실현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도록 만들고 있다.
2. 정신적, 종교적 환상
부처는 깨달은 자, 완성된 자를 의미한다.
그 깨달은 자, 완성된 자 부처도 실패 한 적이 있다. 우리도 실패한다.
우리는 ‘완성, 깨달음, 부처, 예수, 하나님, 천국 등’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다.
세상 어디에도 평화,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지는 그 순간 그곳이 평화이고 행복이다.
부처는 얻어먹으며 다녔다. 제자에게 살해당할 위험도 있었다. 부처의 실제 삶을 보면 정말 비참한 삶이었다. 바로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환상을 가지고 살지 않았다. 환상을 가지고 살지 않는 다는 것은 헛된 욕심, 꿈을 쫒지 않는 것이며, 사실을 보고 구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을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제2의 화살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보자. 여기 꽃이 있다고 할 때, ‘저 꽃 아름답다’고 하는 생각. 이것은 제1의 화살로 누구나 가지는 생각이다. 하지만 ‘가지고 싶다’생각 하는 것이 제2의 화살이다. 부처는 제1의 화살까지만 가진다. 바로 이것이 차이이다. 모든 사람이 제1의 화살을 가지게 된다면 꽃 한 송이로 60억 모두가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제2의 화살을 가지게 된다면 60억이 싸우게 된다.
삶은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바로 중도(中道)적,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과학적으로 다루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체적 사실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은 과학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적으로 삶을 다루지 않는다.
구체적, 과학적 사실은 바로 상식이다.
상식이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알고, 당연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모르기에 전도몽상, 왜곡, 허상을 쫒는다.
이 당연한 것이 바로 공동체이다. 온 우주의 존재는 모두 그물의 그물코 처럼 연결되어 있는 한생명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생명평화의 삶이다.
불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 생명은 어떻게 이루어 진 존재인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인생화두의 답을 찾는 종교이다.
요즘은 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 인생화두를 가지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어느 한 순간도 이 화두를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 속에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고, 나와 동등한 너도 존귀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귀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 된다. 그것이 바로 ‘생명평화의 삶’이다.
온 우주는 공동체. 연결되어 있고, 함께 있다. 공동운명체, 한 몸 한 생명이다.
공동체적 삶이란 바로 사랑, 자비의 삶이다. 다시 말하면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다.
귀농, 대안적 삶, 생명평화의 삶 등을 잘 살아가려면 세계관, 가치관, 사회관, 인간관 등을 바르게 찾고 쫒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두 눈과 같다. 바르게 서 있어야 바르게 간다.
생명평화의 삶도 그렇다. 주체적으로 상식, 진리에 맞는 삶의 모습을 정립해야한다.
그리고 그 실천 방법으로 귀농을 제시한다. 물론 도시에서도 생명평화의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도시보다 농촌에서의 삶이 생명평화의 삶을 살기 더욱 좋다.
생명평화의 삶이란 바로 단순 소박한 삶이고, 상식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 어울림의 삶이다.
① 자연과 어울린 삶 vs 자연파괴
② 이웃과 어울린 삶 vs 사회양극화
③ 상대와 어울린 삶 vs 인간 소외
이렇게 어울려 사는 것은 화목, 평화, 편안, 자연스러운 삶이다.
도시는 절대가지인 생명을 하나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농사란 인간이 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귀농인은 운동성을 가져야 한다. 이 운동성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공동체성이다. 여기서 공동체라 함은 이웃사촌과 품앗이로 이루어진 마을공동체를 의미한다. 좋은 것을 주변사람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농심(農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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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한 강의 내용입니다.
기록 : 유이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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