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발심의 수행자가 보여주는 모습
하루가 짧듯 인생 또한 짧다. 진실되게 순간순간을 살아가지 않는 자는 원효의 탄식을 모른다.
지는 해 앞에 선 원효의 탄식을 알기 위해서는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가는 진실이 필요하다.
원효의 탄식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순간이 영원이 되고, 내가 전체가 될 때 그 삶은 진실하
다고 말할 수 있다.
초겨울, 감나무가 모두 옷을 벗고 그 아래는 마른 콩대가 수북이 쌓여 있다. 마른 콩대 곁에 앉아
웃으며 담소하는 스님의 모습에서 내가 본 것은 작고 왜소한 스님의 모습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그 불길은 웅대하지 않았다. 차라리 작고 아름다웠다. 그 불길은 가까이해도 손을 데지 않을 것
같았고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너무나 투명해 내 자신의 모습이 투영
되는 것 같았고, 지극히 맑아 내 자신의 무지와 일탈이 부끄러웠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사람 하나를 만나는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박수를 보내고픈 사람 하나를 만나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른다.
그의 곁에 서면 나는 부끄러워진다. 가까이 오라고 하지만 나는 선뜻 가까이 가지 못한다. 그의
곁에서 그와 같은 색으로 보이는 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곁에 서기
위해서 나는 버려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으름과 무지와 비도덕성 그리고
이기적인 속성까지도 모두 버려야 한다.
누구든 쉽게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단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그는 그 소수 가운
데 한 사람이다. 그가 버리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미 버린 사람이었고 그가 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었다.
말보다 앞서 실천을 담보하는 사람, 나는 그에게서 수행자의 전형을 본다. 안과 밖이 같고 말과
행동이 하나인 투명한 사람이 수행자라는 것을 그는 실천으로 일깨워 주는 사람이다.
그는 주로 걸망을 메고 버스를 타고 다닌다. 자가용이 일반화된 절집이지만 그는 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운전을 할 줄도 모르지만 차를 소유한다는 것이 수행자의 삶과는 맞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비환경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가끔 서울에 올 때면 걸망을 메고 버스를 타고 온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역시 버스를
타고 간다. 늦은 밤 버스터미널을 향해 가는 걸망을 멘 그의 뒷모습을 나는 가끔 보았다. 많은 연배
와 높은 출가의 나이에도 초심을 잃지 않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투영되어 왔다.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답게 그는 언제나 겸손하다. 무엇을 일방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함께 대화
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그의 자세다. 누가 그를 비방해도 그는 그 비방에 화를 내지 않는다. 다만
치열하고 진지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 자리는 으레 길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그를
간혹 우리는 폭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고 싶지만 자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그의 정신력 앞에서
항복을 선언한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몸도 왜소하고 키도 작은 그가 우리를 압도해 나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체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는 대화를 할 때 진지하고 사고를 할 때 치열하다. 그는 순간순간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서 있다.
그는 출가자란 언제나 출가의 정신을 일깨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말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깊은 진실이 배어 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그의 전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언젠간 그가 폭력에 대하여 21일 단식 정진을 할 때 그가 정말 아름다운 출가 수행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폭력이 만연한 종단을 걱정했다는 그의 말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그는 그 순간 폭력이 없는 종단을 그리며 자신을 미련 없이
바친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버려 바르고 올바른 길을 열어 나가는 그의 삶의 자세는 부처님의 길을
신명을 다해 걷겠다는 처음 출가의 다짐을 잃지 않고 있다는 확연한 증거였다.
지리산 아래서 출가의 정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 수행자가 일으키는 삶의 반향은 크다. 그리고
그의 출가 정신은 일출처럼 빛을 밝히고 있다. 그 빛은 어둠을 지우고 생명의 바다로 이어지는 먼 길을
낸다. 모두가 하나 되어 사는 세상, 더 이상 분별이 없고 대립이 없어 서로가 돕고 서로가 하나임을
깨닫는 날을 위해 그는 출가의 정신으로 매순간 깨어나고 있다.
누구나 초발심을 지키며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확고한 결심이 없다면 초발심은 깨지고 만다. 유혹에
흔들리고 의식의 게으름을 이겨내지 못하면 초심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나는 무수히 깨지고 있다.
초심을 다잡자고 하지만 결단은 언제나 순간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기 위해서는 초심의 순간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야만 한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 것도 모두 초심을 잃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말의 잔치는 홍수와 같이 범람하지만
실천은 사라져 버린 시간 속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곧 진실이 없음을 의미한다. 진실은
자기를 버릴 때 찾아오는 것이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진실은 찾아오지 않는다. 출가는 위대한 포기라고 한다. 그것은 곧 자기를 극복
한다는 의미다. 작은 자기는 분별과 대립을 낳는다. 그러나 자기를 극복해 버리면 비로소 자유의 의미를
알게 된다. 출가는 진정한 자유를 향해 떠나는 길이다. 출가자가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여전히
구속의 굴레 속에 있는 것이다.
콩대 곁에 앉아 "왔어" 하고 그는 웃는다.
까칠하게 야윈 그의 미소 속에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출가 때의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수행자의
모습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소리 없는 대답을 듣는다.
- 성전스님의 <유혹>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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