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이야기

책은 당신을 구원한다_ 송민경

정정진 2022. 10. 3. 18:36

(중략) 흔히들 책을 읽는 이유는 간접경험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책에서 얻는 간접경험을 통해 누구나 현명하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은 절반쯤 맞고 반쯤은 틀리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으듯 지식이나 경험 따위를 부지런히 쌓아간다고 해서 지혜와 분별력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만약 당신이 한 권의 책을 읽는다고 가정해보자. 그게 무슨 책이든 상관없다. 수고스럽겠지만,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인쇄되어 있는 검은 활자들을 모두 해독해야 한다. 하지만 책 한 권을 읽어내려가기 위해서는 한 단어나 문장, 그리고 단락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한 단어, 문장, 단락의 의미를 앞뒤의 단어, 문장, 단락의 의미와 대조해서 읽어야 하고, 심지어 지금 읽고 있는 문장을 수십 페이지, 아니, 수백 페이지 앞에서 읽었던 어느 모호한 대목과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작가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 이 모든 것을 통해 제시되는 전체적 그림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추론해야 한다. 이때 책을 통해 얻는 지식이나 이론, 경험, 사건, 즉 '간접경험'이라 불리는 것은 텍스트를 구성하는 소재에 불과하다. 물론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주가 되는 교과서나 전문서적 같은 책도 있지만, 그러한 책조차 올바른 독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지식을 효과적으로 습득하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습득하는 건 부차적인 일이고,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우선인 것이다.

 

읽는 행위는 수많은 복잡한 기호로 이루어진 메마른 텍스트에 숨을 불어넣어 독자 자신의 내면 안에서 유기적으로 종합된 하나의 살아 있는 의미로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활동을 '독해'라 부른다. 우리는 독서의 경험을 통해 텍스트를 독해하는 법을 자연스레 배운다. 독해는 일종의 기예이기 때문에 자주 그리고 많이 할수록 늘 수밖에 없다. 같은 시간 동안 책을 읽는다면 좋은 책을 선별해 깊이 생각하며 읽는 사람은 독해 기술이 더 빠르게 는다. 독자는 한 권의 책을 읽는 경험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독해력을 높이는 도상훈련에 참여하는 셈이다. 결국 다독이 가져다주는 유익은(독서를 통해 얻는 간접경험에 있다기보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책을 통해 배우는 일의 부박함을 비웃는다. 나 역시 세상이란 그렇게 간단히 이해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관념만으로 설명할 길은 없다. 직접 살아보고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숱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 의미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온갖 사물과 사건, 사람들로 가득차 있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숱한 말들과 기호들과 상징들이 난무하는 엄청나게 크고 복잡한 책이라면.

 

그간 내가 책과 인생을 통해 배운 게 한 가지 있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건 책을 읽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삶을 사는 인간이든 책을 읽는 사람이든 그 앞에 하나의 텍스트가 주어지고,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당신 앞에 놓인 텍스트가 소설이라면, 텍스트 저편에 숨겨진 의미에 닿기 위해 현명한 평론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마주한 텍스트가 법률이라면, 유능한 법률가의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텍스트가 삶 자체라면, 인간의 실존 자체가 하나의 거리로 주어진다면 누구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바로 이 실존적 거리에 대한 여러 의문들이 인생에 관한 어려운 질문들을 이룬다. 나는 어찌하여 태어나 존재하는가,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

 

이러한 의문에 대해 철학이나 종교가 줄 수 있는 답변은 심오하고 근본적일 테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철학이나 종교가 당신에게 일어난 특수한 사건, 이를테면 열한 살짜리 소년이 어려서부터 자라왔던 곳에서 내쫓기듯 떠나가야 할 이유에 대해 특별히 설명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신 발밑에 난 시커먼 구멍을 이해하고 메울 책임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거대한 텍스트라면, 독서의 유익이 텍스트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는 데 있다면 독서를 통해 이해력을 넓힌 독자가 '인생' 텍스트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삶에 대한 이해력이 절실해지는 순간은 어느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이해하기 힘든 불행과 상실이 우리를 찾아들었을 때다. 특히 그것이 자기 잘못과 무관할 때, 누군가의 악의나 부주의 혹은 사회적인 부조리 따위로 손쉽게 설명 가능할 때, 우리는 자칫 객관성을 잃고 피해의식에 빠져들기 쉽다. 

 

그런데 눈앞의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에게 피해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면 진실처럼 들리겠지만, 한편으로 기만이자 현혹이기도 하다. 피해의식은 말한다. 지금 당신이 받고 있는 고통은 전적으로 당신 아닌 누군가의 탓이라고. 그러니 당신과 무관하게 불가피하게 생겨난 이 고통을 그저 불가피하게 겪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당신에게 아무 책임도 없다는 말은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뜻과 같다. 열한 살짜리 소년에게 닥친 불행처럼 소년 자신에게 아무런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사건일지라도.

 

나는 비관적인 생각 대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자는 따위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아무리 공정한 피해의식이라 할지라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편협함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피해의식은 다친 동물이 웅크리고 앉아 제 상처를 핥는 것처럼 불행한 사람을 자기 상처 안에 가두고 머물게 한다. 피해의식은 인간이 자기 불행을 이해하는 가장 손쉽고 안이한 방법이다.

 

그 시절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어느 구립도서관에서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책을 통해 내게 생겨난 일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무언가 이해한다는 건 어떤 문장들로 그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문장들이 나를 구원했다. 문장들이 호기심 많은 올챙이처럼 내게 생겨난 구멍에 다가와서 그것을 둘러쌌다. 문장들은 내 구멍이 인생의 중요한 주제인 것처럼, 그 일을 통해 내 삶이 하나의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말했다. 간혹 문장들은 냉정하고 심술궂은 관찰자마냥 굴었지만, 어느 때는 나를 열정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어떤 관점을 취하든 사태를 바라보는 또다른 관점이 있었고, 때문에 어떤 관점도 절대적이지 않았다. 문장들은 거부할 수 없는, 귀에 익숙해서 쉬이 알아들을 수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다가왔을 뿐이다. 

 

물론 상실을 이해한다고 해서 상처가 저절로 아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할지쯤은 알게 된다. 나는 독서를 통해 삶의 불가피함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언젠가 그 모든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인생 텍스트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한 장으로 인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든 글자가 새롭게 쓰일지도 모를 신비롭고 가변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누군가 내가 준 상처에 갇혀 있기에 이 세상이 어느 구립도서관 서가에 놓인 모든 책,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부신 디지털 혁명이 도래한 이 시대에 책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구식 매체일지 모른다. 나는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에게 책 읽기를 권한다. 당신이 상실을 겪고 있다면 책은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언젠가 겪은 이름 모를 상실로 당신 가슴 한구석이 허전하다면, 책은 그것을 이해하고 차츰 메워줄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책을 읽는다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태도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심지어 책을 한 자도 읽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무의식중에 견지하고 있는). 삶을 이해하지 못 하는 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우리는 삶의 독자인 동시에 저자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삶을 잘 살기 위해서는 삶을 잘 읽어야 하고, 나는 이러한 이해력을 높이는 데 독서보다 멋진 것을 알지 못한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한 조언 2

 

(중략) 독서, 운동, 사색 같은 활동은 기업의 연구개발 활동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개인에게나 기업에게나 이러한 활동은 현재의 자원을 미래의 목표를 위해 투자하는 성격을 갖는다. R&D 투자를 게을리 하는 기업은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듯이,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하는 사람 역시 삶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평소 자기 계발을 게을리 하는 이에게 이런 상투적인 권고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자기 발전의 선순환을 가져오기 위한 그 외의 다른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속는 셈치고 일단 해보시라. 어떤 종류의 일은 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필요가 깨달아지는 법이니까.

 

법관의 일_ 송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