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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불 즉탈 즉도, 조사선_ 용타스님

정정진 2021. 5. 16. 19:47

여러분과 인연이 되어 진정 반갑고 감사하다. 저의 스승은 생불로 추앙받았던 청화스님이다. 은사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머리를 깎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 복을 참 많이 입었다. 스님을 떠올리기만 해도 옷깃이 여며진다. 스승이어서 찬탄하는 것이 아니다. 은사 스님을 한 번 겪어본 사람은 모두 팬이 될 정도였다.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 스승을 만난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처음 스승 말을 들었을 때는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몸에 익숙한 옷처럼 느껴진다. 여러분도 복이 참 많다. 선재동자님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면서 스승을 한 분씩 만나 배움을 얻었는데, 이렇게 좋은 법당에서 법문을 들으니 복덩이들이다.

 

조계사 법당에 임해 있는 지금 이 순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어떤 답이 떠오르는가. 법당에 있는 현재 마음속으로 기초가 될 만한 신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지금 어떤 마음가짐으로 있어야 하는지를 평소에 묻고 있는지, 묻고 있지 않는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스스로 묻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한 수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습관적으로 살고 있는지 의도적으로 살고 있는지를 들여다봤으면 한다.

 

습관적으로 사는 것은 발전이 없다. 의도적으로 살면 인생은 한 단계 더 레벨이 높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의도화 할 것이냐. 바로 스승의 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덕대로 살라고 했는데, 마음속에 이런저런 답이 있겠지만 (저는) 이 답을 쓰게 한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해탈로 존재하라.' 여러분에게 권장하는 답이다. 저는 이 답을 쓰게 하고 큰 소리로 외치게 한다. 아승기겁을 닦아야 해탈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정곡을 뚫는 답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부처님 말씀 한두 마디 들으면서 '아하' 하고 깨달으면 마음에 자유가 오고 이것이 해탈이다.

 

부처님 제자인 5비구 가운데 한 분인 마성비구가 아라한이 되어 거리를 여행하고 있었다. 이때 사리불이 마성비구를 보자마자 저분은 위대한 스승이거나, 위대한 스승의 제자일 것이라고 알아차린다. 사리불이 마성비구에게 "당신은 위대한 스승입니까, 그 스승의 제자입니까?" 라고 묻자 "나의 스승은 고타마 붓다이며, 제법종연생 역종인연멸 이라는 연기법을 배웠다."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사리불에게 안심입명이 왔다. 이처럼 해탈은 앉은 그 자리에서 바로 오는 것이다. 왜 하필 멀고 먼 깨달음을 잡고들 있는가. 여러분에게 지금 바로 묻는다. 이 순간 나는 해탈로 존재하고 있는가.

 

조계사 법당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해탈에 버금가는 일이다. 구류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금강경' '대승정종분'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만 해탈하고 말면 안 된다. 우리 주위에는 고통 받는 존재들이 너무 많다. 그들이 고통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뭔가를 해야 한다. 행동하기 이전부터 마음속으로 고통 받는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 하는 서원, 진정성 어린 서원이 필요하다. 이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고 해탈의 조건이 된다고 '금강경'은 가르치고 있다. 평소에 구류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가. 불법이 대단히 복잡한 것 같지만 나는 이 두 가지가 불법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 해탈해 버리는 일 하나와 구류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 이 일만 딱 하고 있으면 걸림 없는 자유를 느낄 것이며, 보살행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정리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시도 때도 없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 어느 때이고 이 화두를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인생의 전부, 불교의 전부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여러 차원의 불교가 답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가운데 선불교의 답, 달마 불교, 혜능 불교의 답이 진정으로 좋다. 법 자체가 돈법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온전히 살아버리는 불교를 해야 한다. 맨날 준비만 하고 공부만 하는 불교가 아니라, 온전히 살아버리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알고 제대로 살아버리는 것이지 무슨 불법 공부한다고 1년, 2년, 3년, 10년, 20년까지 공부만 하고 있는가. 조사 불교는 공부는 별로 안 시키면서 불법이 삶으로 드러나게 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달마불교가 바로 조사 불교이다. 달마불교의 정수는 즉불 즉탈 즉도이다. '즉'이라는 글씨는 정말 매력적이다. 바로 즉, 시간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즉불, 바로 부처, 정말 멋있지 않나. 제가 뱉은 소리가 아니라 달마가 뱉은 이 말이 좋아서 제가 자기 소리인 것처럼 뱉고 있는 것이다.

 

즉불은 선불교의 바탕개념이다. 이대로 부처, 이미 선불교의 제자들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부처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가장 첫 번째로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것저것에 걸려선 안 된다. 선불교는 이것저것 공부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해탈이 목적이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해탈시켜 버린다.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중국 선종의 2대 조사가 된 혜가가 처음 달마대사를 찾아왔을 때 마음이 괴롭다며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달마는 간단하게 물었다. "그 괴로움을 가져와 봐라, 그러면 해결해 주겠다." 혜가는 내놓을 괴로움이 없다고 답했다. 이것이 불조의 가르침이다. 달마는 그 자리에서 혜가를 즉탈시켰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나라고 하는 존재는 같은 것이 더 많을까, 다른 것이 더 많을까. 가만히 명상해 보라. 따지고 들어가 보면 99%는 같고 단지 1%만 다르다. 다른 점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했다면 부처님은 단지 '욕을 하고 있네'라고 받아들이는 반면, 여러분의 경우라면 속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차이가 조금 있다. 지금부터 살아 있는 부처를 받아들이자.

 

천하는 그 자체로 평등하다. 돈법을 갖고 있는 불교 속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큰 복을 지니고 있다. 보리 아닌 것이 없다. 접근하고 적응하다보면 천하가 일미평등임을 확연하게 알게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실체로 보는가 연기로 보는가가 있는데, 실체로 보면 비불교이고 연기로 보면 불교가 된다. 가능하면 실체에 떨어졌을 때 정신이 차리고 연기를 떠올렸으면 한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나'라고 하는 실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불행을 가름한다.

 

즉탈은 이미 확보되어 있는 해탈을 확인하는 것이다. '해탈이야'라고 했을 때 '해탈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정신 차려야 한다. 이미 해탈되어져 있는 영역이 정말 많다. '안이비설선의'를 놓고 보라. 눈 뜨는 것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듣는 것도 자유롭게 듣고 있다. 귀의 해탈이다. 해탈을 교묘하게 특별한 무엇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자유 속에 있다. 보는 것, 듣는 것, 맛보는 것, 감촉하는 것 등 자유롭게 다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한정 없는 자유와 해탈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확보된 해탈을 확인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정리해 보자. 지금 바로 부처한다. 즉불이다. 즉불인 나는 즉탈한다. 지금 바로 걸림 없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다음엔 절로 즉도가 되어지고 인연 따라 뛰어가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조계사에서 길을 물었더니(53선지식 구법여행)_ 용타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