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워라밸'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다. '워크-라이프 밸런스', 즉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이다. 나는 한동안 이 단어에 꽃혀 주변 친구들에게 '너의 워라밸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을 주고 싶냐'는 질문을 하곤 했다. 친구들의 대답은 매우 주관적이고 천차만별이어서,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분석할 수가 없었다. 좀 더 표본을 넓힌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들은 답변들은 '어떤 근무 환경에서 일하는가' 혹은 '연봉을 얼마나 받는가'와 같은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전혀 일관성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주의 깊게 관찰을 지속한 결과, 무조건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업무가 적성에 맞으면 '워라밸'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관대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는 '워라밸'이 나쁘지 않은 듯 보이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더라도, 당장 이직을 하고 싶을 만큼 일이 맞지 않는다면 자신의 '워라밸'을 평가할 때에도 다소 회의적일 수 있다. 하지만 방송 업계에서 만난 친구들 대부분은 우리의 '워라밸'이 객관적으로는 높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스스로 꽤 높은 점수를 매기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방송 관련 일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 업계에서 객관적으로 '워라밸' 점수가 높기는 어렵다. 나의 경우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에 가려다 말고 속보가 들어와 다시 스튜디오로 뛰어들어간 적도 있었고, 심지어 이미 퇴근을 했거나 잠을 자고 있어야 할 시간에도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아본 적이 있다. 뉴스 진행 경력이 6년이 다 되어가던 시절에도 철야 근무를 하면서 백만 원 대의 월급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일과 삶의 균형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일과 나 자신의 균형이다. 나와 일의 궁합은 업무 외의 삶에도 직, 간접적으로 반드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워크'와 나의 밸런스', 줄여서 '워나밸'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에게 일이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노동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일이 현실이 된 사건이자, 나의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해가는 작업이다. 흔히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지만, 나의 경우 다행히 그 두 가지가 일치했다. 일과 나 사이의 궁합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후로도 나는 일을 찾을 때 '워나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객관적인 지표인 수익이나 근무 환경, 안정성보다는 내가 그 일을 좋아하면서도 잘하는지,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걸 했으니 즐거웠다' 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지 따위를 먼저 생각한다.
어쩌면 그래서 삼십 대 중반이 되도록 여태까지 한 번도 하기 싫거나 재미가 없는 일을 직업으로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일지 모른다. 아나운서를 그만둔 이후에 시작한 유튜버, 작가, 선생이라는 직업 모두 이런 생각의 과정을 거쳐 선택한 일들이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질려 버린다고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여전히 일하는 시간이 즐겁다. 방송을 처음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놀면서 돈을 버는 느낌이 들었었다. 금전적 대가를 받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기면서 하는 일이라도 내 노동의 가치에 합당한 임금을 챙겨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하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다.
나는 때때로 주변 어른들로부터 '무리하지 마라', '그렇게 열심히 돈 벌지 않아도 된다'와 같은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무리한 적도 없고 돈을 많이 버는 데에 집착한 적도 없다. 내 일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계속 샘솟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 자체가 내게는 즐거운 놀이이기 때문에 열중했을 뿐이다. 이건 나와 일의 궁합이 좋지 않았다면 절대 생겨날 수 없는 순환 구조다. 가령 내가 청소나 빨래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는 매우 적다. 설거지나 밥을 하는 데 쓸 만한 에너지는 더더욱 적다. 하지만 나는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때만큼은 배가 좀 고파도, 잠을 좀 덜 자도 힘을 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워나밸'이 만들어내는 차이다.
사주를 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말로 벌어먹고 살 사람'이었어요. 이 정도면 정말 공식적(?)으로도 찰떡궁합 워나밸 아닌가요?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_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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