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관계

색칠공부_ 김정

정정진 2021. 2. 14. 12:19

우여곡절이 많았던 신입 시절이 지나고 드디어 나에게도 후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거의 나와는 다르게 대부분 아주 싹싹하고 눈치도 빨랐다. 입사하자마자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기도 하고, '선배, 친해지고 싶어요'와 같은 애정표현도 참 잘했다.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원래 후배들은 처음부터 다 이렇게 하는 건가? 사회생활이라는 건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였구나... 오히려 후배들을 보며 배우고 깨달았다. 신입 시절의 나는, 아직 서로에 대해 미처 잘 알지도 못하고 친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너무 빠르게 다가가려 하는 건 오히려 선배들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선배 입장이 되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먼저 다가와 주고 말을 걸어주는 후배와는 자연스럽게 더 빨리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생판 모르던 사람들이 친해지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라도 조금은 과감하게 다가가야 했다. 나는 늘 이런 과감함이 부족했다. 특히 성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냉랭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나는 잘 모르는 낯선 사람들에게 관심이 거의 가지 않는다. 내 마음속 울타리를 넘어온 사람들, 혹은 내가 보기에 유난히 멋진 사람이라 생각되는 이들에게만 마음이 끌릴 뿐 이들을 제외한 타인들은 대개 내 마음과 머릿속에 흑백사진처럼 저장돼 있다. 흑백사진을 보면 피사체의 색감은 물론, 질감이나 입체감 등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내가 낯선 사람들을 인식하는 방식도 이러하다. 조금 냉정하게 들릴 순 있어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사람을 처음 대할 땐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살아온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에 그를 마치 흑백 영화 속 인물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다 상대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고 좀 더 궁금해지는 과정 속에서 점점 그 사람의 모습이 흑백에서 컬러로, 2D에서 3D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사람을 사귀는 것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된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관심을 가져주었을 때 비로소 흑백이 컬러가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또 한 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색색깔로 기억하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 사람을 처음 알게 된 초반에는 속도가 느리다가 '이 사람이다' 싶은 느낌이 들면 그 이후부터는 가속도가 붙는 타입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회사 선배나 동료들에게 아주 살갑게 대하거나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능동적으로 펼치지는 못했다. 이건 낯을 가리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제 보니 나는 처음 본 순간부터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선배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주춤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사실 그것은 나 자신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처음 살아보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 초반에는 모든 길이 낯설고 헛갈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 길 저 길 다니다 보면 어느새 골목골목까지 섭렵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네와 정이 든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 두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이모저모가 궁금해지고, 그러다 이런저런 그의 삶의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점점 컬러풀하게,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건 시간 문제다. 그런데 왜 이 과정을 그리들 급하게 진행하라고 압박하는지 모르겠다. '선배들하고 빨리 친해져야지!' '동기들하고 어서 가까워져야지!' 여기에서 '빨리', '어서'라는 표현만 뺀다면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자고로 신입사원이라면 입사 직후부터 다소 과하다 싶을 만큼 열성적으로 충성심을 어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잘 못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나는 '될 놈은 된다'는 뜻의 '될놈될'이라는 표현을 패러디한 '친놈친'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친해질 사람은 결국 친해지게 되어 있다. 초반에 조금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오해를 받더라도 내 속도로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다. 굳이 억지스럽게 노력하지 않아도 매일 얼굴을 보고 함께 일하면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도록 서로간 조금씩의 공간을 두고 시간을 두면서 기다리면 된다. 물론 과감하고 적극적인 후배들을 애정하고 칭찬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만의 속도로 흑백 사진을 물들이며 살고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색칠 공부를 하는 마음과 자세로.

 

밥도 빨리 먹고 말도 빠른, 뭐든지 빠른 게 좋은 제가 한 가지 느린 것도 있었네요!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_ 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