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성찰

탈 진실의 시대_ 안철수

정정진 2020. 4. 15. 06:46

스티븐 핑커 교수와 피터 턱슨 추기경과의 만남

 

독일에 오고 달리기를 하며 보낸 지난 1년간의 시간이 나에게는 달리기의 본질과도 같은 '견뎌내는 삶'이었다. 정치를 했던 만 6년을 보낸 후에 맞는, 연구년과도 같은 시간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묵묵히 뚜벅뚜벅 순례의 길을 걷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냈다. 그리고 달리기를 하는 과정에서 마음속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상처와 제대로 마주하기가 쉽진 않았지만, 나의 상처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 물론 사실 왜곡이나 드루킹의 댓글 공격으로 인한 여론 조작도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내가 공동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실천했던 희생, 헌신, 책임 등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상황에 큰 상처를 받았다.

 

나의 상처는 달리기를 통해 치유되는 동시에,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의 시간을 더욱 풍요롭고 충만하게 채워주면서 아물고 있다. 독일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과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역시 배움의 시간이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새롭게 배우는 것들을 내 안에 채우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시간을 보냈다. 나의 지난 1년은 그 아름다운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한 번은 심리학자이자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스티븐 핑커를 만난 적이 있다. '뉴욕 타임스'에서 빌 게이츠와의 대담을 보고 나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프랑스 하원에서 열린 그의 강연을 듣고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근거에 기반을 둔 정치'였다. 스티븐 핑커는 사실에 근거해 정치적인 주장을 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에 동의한다고 했다.

 

감성적으로 접근해 호감만 얻는 이미지 정치, 적을 하나 만들고 그 대상만 공격하면서 문제 해결 방법은 전혀 내놓지 못하는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이 갔다. 나 역시 '탈 진실의 시대'에 문제의식을 느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탈 진실'을 올해의 국제적 단어로 선정한 바 있다. 탈 진실이란,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감성적으로 접근해 형성된 여론이 더욱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방송에서 엉터리 내용인데도 진지한 얼굴로 말하면, 많은 사람은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가짜 뉴스'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미 이러한 사회적 문제가 상당히 대두되었기 때문에 신조어가 생겼고, 그 말이 국제적으로 통용될 정도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는 뜻이다.

 

꼭 정치만이 아니다. 요즘은 어디에서나 진실을 쉽게 접하기가 어려워졌다. 넘쳐나는 정보들 중에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많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너무 바쁜 나머지 그 정보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밝힐 겨를이 없다. 거짓된 이야기를 그냥 믿기도 하고, 거짓으로 판명이 나도 이미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른 곳으로 옮겨간 다음이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득세하기 딱 좋은 환경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실과 거짓을 구분해주어야 할 언론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떨어진 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가 계속될수록 실제 사회경제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우리 모두의 삶은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는데 이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떻게 하면 탈 진실의 시대를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 감성적인 수법으로 여론 조작을 시도하는 것에 대중은 계속 속지만은 않을 것이며 인공지능 등을 활용한 솔루션으로 가짜 뉴스 등을 가릴 수 있는 기술 발전을 기대한다는 스티븐 핑커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그의 낙관적인 전망을 정말 믿고 싶어 졌다. 나 역시 이러한 탈 진실의 시대에서, 현 세대가 미래 세대를 사실상 착취하며 펼치는 포퓰리즘이 만연한 사회를 보며, 미래 세대를 위한 일들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그런 절실한 마음으로 독일의 바이로이트 대학과 인공지능, 창의력, 글로벌을 접목시킨 '러닝 5.0'이라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 내가 달리기를 하며 배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