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둑들의 거짓말
자본주의적 시간 비판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 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모모>라는 소설을 아는가?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가 1973년에 집필한 흥미진진한 동화로 우리에게도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소설이다. 독일 어느 마을 원형극장 유적지에 말라깽이 소녀 모모가 살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에게는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외롭거나 우울할 때, 혹은 삶에 지쳐 피곤할 때, 그녀에게 달려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모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삶을 살아 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곤 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과 모모 앞에 아주 강력한 적들이 등장한다. 바로 시간도둑들이다. 그들은 효율적인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설교하러 다니는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의 전도사들이다.
잠시 모모가 마을을 비운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시간도둑들에게 설득되어 버렸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모모를 찾아오지도 않고 찾아올 필요도 없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모모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시간도둑들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시간을 훔친 핵심적인 결과다. 시간을 빼앗기자마자,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분주하고 바빠졌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부과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그들은 타인들, 심지어 가까운 가족과 희로애락을 함께할 시간만저 상실한 것이다. 결국 시간을 합리적으로 통제한다는 환상만 심어 주었을 뿐, 시간도둑들은 마을 사람들의 소중한 인간관계를 와해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지금 해야 할 일만 완수하면 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낼 거라고 끊임없이 기대하곤 한다. 그렇지만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그들의 기대는 하나의 일이 마무리되면, 어느 사이엔가 새로운 일이 그들앞에 놓여 있을 테니 말이다.
자본주의는 시간이 항상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촌각을 다투어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현재 자체는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소모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기묘한 시간 관념이 출현하게 된다. 결국 자본주의적 시간 관념에 따르는 순간, 우리는 현재를 잃어버리고 미래만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를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떻게 현재가 없는데, 과거나 미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시간도둑들에게 시간, 즉 현재를 빼앗긴 마을 사람들은 덧없이 미래만을 꿈꾸면 영원히 분주하기만 하다. 그러니 그들은 이제 모모는커녕 가족과도 함께 보낼 시간도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비록 동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모모>라는 소설이 우리 가슴 부분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우리는 자신이야말로 시간도둑에게 시간을 빼앗긴 마을 사람들과 다릉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까 말이다.
이렇게 <모모>라는 소설은 도둑맞은 시간, 혹은 강탈당한 시간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실 시간의 비밀을 알려면 원시시대로 돌아고 보면 된다. 원시인들에게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과실을 채집하는 시간과, 사냥한 것을 가족이나 부족과 나누며 향유하는 시간이 있다. 전자가 '노동하는 시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축제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원시인 누구나 노동하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원시적이고 고단한 삶을 영위했지만 그들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이다. 행복이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 인생 전체 시간에서 사랑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물론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노동하는 시간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어떻게 배가 고픈 사람이 타인과 사랑을 나누며,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노동하는 시간과 사랑하는 시간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일 말이 있다. 그것은 노동과 사랑이 가진 시간성과 관련된 논의다. 노동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고통을 대가로 내일의 행복을 희망하는 행위가 바로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월급이어도 좋고 연금이어도 좋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바라던 미래가 도래하는 순간, 그 미래는 바로 현재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니 다시 새롭게 도래한 현재를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사랑에는 미래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바로 여기서 기쁨을 누리지 않으면 사랑은 어떤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일이 찾아와 새로운 현재가 온다면, 사랑은 다시 그 현재를 기쁨으로 향유할 테니 말이다. 이렇게 노동에서 현재의 행복이 끝없이 유예된다면 사랑에서는 현재의 행복은 바로 향유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노동하는 시간에서 우리는 행복을 기대하지만 그 행복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반면 사랑하는 시간에서 우리는 행복을 향유하게 된다.
기대되는 행복과 향유되는 행복! 그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알았던 것이 과거 원시인들 아니었을까.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원시인들의 지혜로부터 우리는 진보의 잣대 한 가지를 얻게 된다. 노동하는 시간이 줄어 상대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 그 사회는 과거보다 진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랑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과거 사회보다 더 진보한 사회인가?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서 사회 성원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더 많이 허용하는 좋은 사회인가'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과거 농경 사회를 떠올려 보자. 남루해 보이는 이 시절에도 사람들은 노동하는 시간만큼 사랑하는 시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시간, 즉 농번기만큼이나 노동에서 면제되는 사랑하는 시간이 넘치도록 충만했다. 바로 농한기다. 겨울 동안 아이들이나 친구들과 토끼 사냥이나 꿩 사냥을 떠나는 농부의 행복한 얼굴을 떠올려 보라.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과거 농경 사회에서 그렇게도 많은 축제들이 벌어질 수 있었던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하는 시간이 많은 경우, 축제를 어떻게 염두에 둘 수 있었겠는가.
물론 우리 시대 시간도둑들은 당시 농경시대의 낮은 GDP를 내보이며 그때가 불행한 사회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농경시대 경제난을 상징하는 보릿고개가 사라졌다고, 그래서 지금 자본주의 사회가 더 진보한 사회라고 설레발을 칠 것이다. 항상 시간도둑들은 이런 식이다. 인간의 행복이 질적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우리의 행복은 자본의 양에 의존한다는 궤변을 펼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금 그렇게 GDP가 높은데도 우리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이웃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방증 아닌가? 그리고 덤으로 알아 두자. 과거 농경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됐던 보릿고개라는 현상의 이면에는 정부나 지주의 창고에서 곡식이 썩어 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최소한의 공동체가 이루어진 다음에 정의로운 삶의 규칙이 존재한다면,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까 공동체의 총샌산량이 성원들을 먹여 살릴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경우는 그야말로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거의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도둑들로 가득하다. 안정적 직장을 허용하지 않는 자본가들, 저임금을 유지하면서 맞벌이를 하도록 강요하는 자본가들, 농한기에 비해 너무나 적은 휴가 일수를 생색이라도 내듯이 허락하는 자본가들, 살인적인 경쟁 교육으로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마저 빼앗고 있는 교육 당국자들,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늘려 주는 것이 아니라 분배를 더 늘리겠다는 미사여구만을 읊조리는 정치가들, 자본주의 체제가 과거보다 진보적이라고 역설하는 지식인들. 그들은 모두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를 대비하라고 역설한다. 한마디로 사랑하는 시간을 없애고 노동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미래를 위한 지혜로운 행동이라는 것이다. 농가성진이라고 했던가. 거짓말도 반복되면 진실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시간도둑들의 거짓말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지금 자신이 처한 삶의 불행에 눈을 감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우리는 시간도둑들의 말에 순진하게 속고만 있을 것인가.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원시인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우리는 노동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소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건은 아닐까? 소는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까지 밭을 갈다가, 축사에 들어오면 잠에 곯아떨어진다. 옆에 있는 소와 하루의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하거나 몸을 비빌 시간도 없다. 소의 일과와 우리의 그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1주일 내내 노동하다가 주말이 되면 쉬기에 바쁜 우리가 어떻게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예술을 만끽하는 사랑의 시간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간혹 축사의 소처럼 널브러진 남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아이들과 잠시 집을 떠나는 아내도 있다. 얼마나 슬픈 광경인가?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과, 그리고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과 사랑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GDP가 오른 만큼 사회체제는 주 5일 근무가 아니라 주 4일, 혹은 주 3일로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불행히도 시간도둑들의 집요한 설교 탓인지 우리는 사랑하는 시간의 증가야말로 사회의 진보를 나타낸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소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비상경보기_ 강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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