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문화와 지적 풍토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지의 문제는 제도적 측면에서만 고려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언급된 여러 제도적 요인과 더불어 영국을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분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문화적, 정신적, 지적 풍토였다. 여기서 영국의 개신교 신앙과 과학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전통이 중요하다.
우선 영국의 산업혁명과 경제 발전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는 개신교 윤리부터 살펴보자. 개신교와 경제 발전의 밀접한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독일 사회과학자이며 역사가인 베버다. 베버는 왜 자본주의가 북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에서 가장 발달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칼뱅이 주장한 예정설에 주목했다. 베버에 의하면, 예정설을 신봉한 부르주아 기업인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세속적 성공에서 찾고자 했다. 그들은 금욕과 부단한 노동에 의해 재산을 형성했지만 세속적 쾌락에 전혀 무관심했고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 부를 축적했다. 따라서 부가 계속 축적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들에게 재산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였다. 즉 부의 축적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 것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요체라는 것이다. 개신교도에게 이상적 삶이란 자신의 물질적 자원을 극대화해 개인의 이익을 증진시키면서 동시에 공익을 증진시키고 그 영광을 신에게 바치는 삶이었다. 이 두 목적은 특히 17세기 말 잉글랜드에서 완전히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개신교와 가톨릭 신앙은 몇 가지 점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첫째는 부에 대한 태도다. 개신교 신앙은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전통적인 윤리적 장애에서 해방시키고 상업과 제조업에 위엄과 정당성을 부여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폄훼되던 이익 추구 행동이 합법화되고 나아가 신의 뜻으로 간주된 것이다. 두 번째로 현세적 일에 대한 태도의 차이다. 개신교의 출현은 예전 가톨릭 사회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인간형을 탄생시켰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속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는 것을 최고 경지로 간주했는데, 개신교에서는 현세적 일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도덕적 의무의 최고 형태로 보았다. 그 결과 합리적 자본주의 기업과 기업인, 직업의식이 투철한 훈련된 노동자, 자본의 규칙적 투자가 나타났다.
베버의 명제는 세부 사항에서 비판을 받아왔지만 전체 틀로서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베버 이래로 자본주의 정신, 부르주아지의 부상, 과학혁명, 기술의 발달, 정치적 민주주의 등 지난 200~300년 동안 인류 사회를 변화시킨 거의 모든 요인을 개신교 신앙에서 찾아내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실제로 1940년경에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들보다 40% 더 부유했다.
베버가 강조한 개신교 윤리는 특히 청교도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청교도는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를 따르지 않는 개신교도들을 칭했다. 1534년 헨리 8세는 개인적 이유로 로마로부터 떨어져 나와 잉글랜드 국교회를 수립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교회는 기존 가톨릭 교회에 유사한 의식과 체제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런 국교회의 타협적 성격에 반대하고 교회를 더욱 정화해야 한다고 믿은 개신교도들이 널리 존재했다. 그들이 청교도였다. 청교도들은 주로 제조업자, 상인, 전문 직업인들, 장인들 가운데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16세기 이후 영국이 다른 나라들과 다른 길을 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우선 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영국의 경제적 발전은 그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청교도 문화는 시간에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은 금'이라는 근대적 자본주의 원칙을 심어주었다. 청교도에게 시간 낭비는 가장 심각한 죄였고 여가는 게으름을 의미했다. 청교도에게 인생은 각자의 소명을 확인하기에 너무 짧고 소중했다. 그들은 주일을 엄격히 지키고 축제일의 수를 줄임으로써 전통 사회에서 생산을 억제하는 습관을 극복하고 근대 경제의 생산 체제로 변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간관념은 개신교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다른 나라에서보다 훨씬 중요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가톨릭교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프랑스나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에서도 시계 제조공은 대체로 신교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개신교 문화는 또한 교육을 강조했다. 그것은 교회 조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직접 신과 소통하는 것을 중시한 개신교의 특성 때문이다. 심지어 여자아이들도 교육을 받았는데, 이러한 전통 속에서 산업혁명기에 활약한 기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 퀘이커교도나 감리교도 같은 비국교도들이 운영한 학교는 산업혁명을 이끈 많은 인재를 양성해냈다. 종교적 관용 덕분에 영국의 비국교도들은 제약 없이 활동하고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소소했지만 제조업의 혁신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거의 반을 차지했다. 이처럼 근대 초에 영국과 저지대 국가들에 부를 쌓거나 물질적 재화를 축적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생각을 거부하는 '부르주아 가치'가 생겨났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산업혁명과 근대적 경제 성장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개신교 신앙보다 더욱 영국적 특성을 보인 현상은 지적 탐구와 과학적 검증 방식을 장려한 문화와 지적 풍토다. 영국은 기초 과학 수준에서는 일류가 아니었지만 숙련도가 높고 실용적인 기계를 만들고 개량하고자 하는 의욕이 충만한 인력을 어느 나라보다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산업혁명기의 발명가들은 소수 과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술자들이었다. 그것은 영국만의 독특한 풍토에서 기인했다. 면직물 공업이든 증기기관이든 초기 기술은 고도의 전문적인 첨단 과학적 자식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현장에서 조금 더 개선해보려는 의지를 가진 기술자들이 간단한 아이디어를 적용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영국의 많은 발명가가 독학으로 지식을 습득했다. 1700~1850년 동안의 과학기술자 498명에 관한 연구는 그들 가운데 329명이 독학으로 지적 세계를 개척해갔음을 밝혀준다. 그들은 역학에 관한 과학 문헌들을 스스로 공부할 정도로 지적 수준이 높았다. 예를 들어 와트는 수학에 능통했고 체계적으로 실험을 했으며 증기기관의 열효율을 계산해내고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의 대학교수들, 저명한 과학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들 엘리트 출신이 아닌 기술자들이 지엽적으로 작은 규모로 이룬 미시적 발명들이 쌓여 산업화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런 영국의 문화적, 지적 토대는 베이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에는 전 유럽을 통해 과학적으로 호기심이 강하게 발흥했는데 특히 잉글랜드에서 그러했다. 잉글랜드가 개신교 국가였다는 사실이 이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종교의 권위에 굴복했지만 잉글랜드 사회는 종교적 관용, 출판과 논쟁을 통한 자유로운 사상의 교류 덕분에 낡은 지식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이론들이 폭넓게 수용될 수 있었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 정신계를 지배하던 연역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귀납적 방법론을 창시했는데 갈릴레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갈릴레오의 관찰과 귀납적 추론에 크게 매료된 베이컨은 이론이 아니라 실험이 새로운 과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면서 경험주의의 기초를 마련했다.
베이컨 이후 영국에는 뉴턴과 하비등의 걸출한 과학자들이 나타나 과학혁명을 주도했다. 과학혁명의 핵심은 3가지 현상 즉 과학적 방법, 과학적 정신 상태, 과학적 문화로 구성되었다. 과학적 방법은 측정과 실험, 재현 가능성에 대한 집착을 포함했는데, 과학 연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은 베이컨의 영향이 컸다. 이제 '정확성'이 무엇보다 중시되었다.
과학혁명에도 영국의 청교도주의가 영향을 끼쳤다. 청교도들은 현실적인 지식보다 형이상학적 지식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과학이 신의 영광을 증명하고 인간의 이익을 증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과학에 관심을 가졌다. 보일은 "실험 철학은 우리를 기독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좋은 기독교도가 되도록 도와준다"라고 주장했다. 볼테르를 위시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런 영국의 지적 문화를 이해하고 있었고 베이컨과 뉴턴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우러러보았다. 볼테르는 뉴턴의 이론을 '인류의 승리'라고 단언했고, 콩도르세는 베이컨 과학과 뉴턴의 유산의 결과로 자연 과학의 발전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제퍼슨은 베이컨, 로크, 뉴턴을 물리 과학과 도덕 철학을 통해 사회의 근본 구조를 마련한, "이제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3명의 인물"로 칭송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은 과학혁명의 선두에 있었고 그 시작은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베이컨의 진정한 업적은 경험주의를 개발하고 확산한 것보다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즉 지식은 생산 활동에 '유용'하게 쓰여야 하고, 과학은 산업 현장에 '적용'되어야 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사상을 전파한 것이었다. 베이컨은 지식 확산의 첫째 목표는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과학의 진정하고 정당한 목적은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통해 인간의 삶에 힘을 주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베이컨의 생각은 사물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사물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과 지식의 공유가 중요하다는 깨우침이었고, 이 주장이 후대 영국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실제로 교육받은 엘리트와 일반인들이 격의 없이 교류하는 관행은 영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과학과 대중의 만남은 영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심지어 어린이용으로 쓰인 대중적인 뉴턴 입문서가 있을 정도였다. 인쇄술을 배우기 위해 런던에 온 10대의 프랭클린도 그런 식으로 뉴턴 물리학에 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영국에서는 특이하게도 과학적 발견과 발전이 자유롭게 대중과 공유되었다.
과학혁명이 산업혁명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과학과 대중의 만남은 결정적이었다. 경제사학자 모키르는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사이에 '산업 계몽주의'를 설정한다. 산업 계몽주의는 지식을 집대성한 학자들과 기술을 생산에 직접 응용하는 현장 기술자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강화시켜 과학혁명이 현실 경제에 응용되어 실제 산출물을 창조해내는 사회적 과정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과학자들은 유용한 지식을 독점하지 않고 기술자들과 공유했다. 전자는 주는 데 열심이었고 후자는 받는 데 열심이었는데 그것이 실질적으로 산업혁명에서 과학과 기술의 결합으로 나타났다. 대륙에서 과학은 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기술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각각 분리하여 담당하면서 소통이 없었지만 개방 사회인 영국에서는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고 서로 배우는 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기에 사업가, 과학자, 철학자를 한곳에 모아 과학과 기술을 결합하는 데 목적을 둔 공식, 비공식 학회와 아카데미가 꽃을 피웠다. 과학협회와 동아리, 학계, 심지어 커피하우스에서 행해진 강의들이 지식을 사회에 확신시켰다. 토목공학협회는 1771년에 창립되었는데 19세기 중엽이 되면 영국에는 1,020개의 과학기술협회가 존재하고 회원 수는 20만 명에 이르렀으며, 왕립 지리학회 등 지식을 전파하는 동아리나 협회에 기부금들이 몰리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기술자들은 각종 협회 활동을 통해 소통했다. 아주 중요한 기술을 발명하거나 개발한 슈퍼스타급 기술자들은 특히 출판과 과학기술 관련 협회에서 활발히 활동했는데 전체의 52%에 이르는 기술자들이 그러했다.
유용한 지식에 대한 접근은 영국인들의 문자 해독율이 상승하고 책을 포함한 각종 읽을거리가 증가함에 따라 더욱 확산되었다. 인쇄술에서 일어난 기술적 발전도 이에 기여했는데, 19세기 초에 연속 종이 생산기술과 실린더식 인쇄 기술이 도입되어 책의 출판이 더욱 용이해졌고 책값이 떨어졌으며 읽을거리가 더욱 풍성해졌다. 1840~1870년 사이에 책의 발간은 400% 증가했을 뿐 아니라 책을 빌려주는 도서관들이 많아지면서 그 효과가 한층 더 커졌다.
제국의 품격_ 박지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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