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외교

홉스의 자연상태와 국제정치 현실_ 김영호 교수

정정진 2020. 3. 17. 14:49

 

국제정치현실을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다. 이 책은 영어로 된 책 중에서 최고의 고전으로 꼽힌다. 플라톤의 <국가론>이 서구 정치사의 최고 고전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희랍어로 쓰인 책이다.

 

<리바이어던>은 전설에 나오는 바다 속의 커다란 괴물이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에 비유하고 있다. 그의 책 제13장에는 '인간의 자연적 조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것은 인간이 리바이어던과 같은 국가를 만들기 이전에 처해있는 '자연 상태'를 말한다.

 

홉스는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강력한 욕망의 덩어리이다. 인간의 평등성은 욕망의 동일성을 낳는다. 인간들 사이의 욕망의 충돌은 인간관계를 전쟁상태로 몰고 간다. 이 갈등을 규제할 수 있는 국가 혹은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인간관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발전한다. 그 결과 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보잘것이 없고, 추잡하고, 난폭하고, 그리고 단명한다"는 홉스의 유명한 말로 요약된다.

 

이 자연상태는 인간이 매일 쉬지 않고 싸운다는 의미의 전쟁상태가 아니다. 자연 상태 하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막을 수 있는 국가와 같은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에 국제정치현실처럼 전쟁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의미에서 전쟁상태이다.

 

이러한 전쟁상태 하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자신의 창의력을 총동원하여 자신을 지켜야 한다. 노동분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산업, 문화, 주택, 예술 등 자신의 생활에 유용한 어느 것도 발전시킬 수 없다. 국가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언제든지 뺏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 하에서 인간들 사이의 상호불신은 너무 깊어서 '안보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전쟁상태인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한다는 조건 하에서 자신이 가진 천부인권의 일부를 국가에 양도하는 사회계약을 체결한다. 이렇게 성립된 리바이어던과 같은 국가가 강력한 힘을 갖고 사회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인간들은 자신의 생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홉스의 자연상태자연 상태 개념과 사회계약론은 국제정치현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세상에 여기저기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사회계약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국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된다. 여기서 '대내적 자연 상태'와 '대외적 자연 상태'라는 두 가지 개념 구분이 필요한다.

 

개인들 사이의 계약을 통해 대내적 자연상태는 극복된다. 그와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수많은 국가들이 탄생함으로써 이 국가들 사이에는 또다시 '대외적 자연 상태'가 생겨난다. 이 '대외적 자연 상태'가 국제정치현실인 것이다.

 

홉스의 논리를 따라 가보면 이 '대외적 자연상태'는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국가들 사이에 세계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또 다른 사회계약이 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홉스는 <리바이어던> 제13장에서 국가들이 전쟁상태인 대외적  자연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딱딱한 조개껍질처럼 개인들을 보호해주기 때문에 대내적 자연 상태만큼 개인의 삶이 비참하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면 만약 국가들이 서로 군사력을 해체하고 각각의 내부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부의 병력과 무기만 보유하기로 합의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남아있는 그 병력이 국가들 사이에 또 다른 안보딜레마의 원인이 된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군비경쟁과 같은 안보딜레마에서 생겨나는 전쟁의 소지를 완전히 없애고 내부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 남겨둔 병력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을 선호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들 사이에 대외적 자연 상태가 존재하고 전쟁 가능성이 있어서 내부질서 유지를 위해 그 병력 유지를 용인할 것인가?

 

우리는 당연히 내부질서 유지를 위해 전쟁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병력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부질서 유지를 위한 병력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인간이 또다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인 자연 상태, 전쟁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외적 자연상태는 홉스가 말하는 대내적 자연 상태와 다르다. 개인들이 평등하기 때문에 욕망의 동등성이 생겨나고 인간들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국제정치현실을 구성하는 국가들은 당구 볼에 비유하면 큰 것과 작은 것들이 공존한다. 이것은 대외적 자연 상태는 불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평등성이 국제정치에서 패권국가의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패권국가가 '보이지 않는 주먹'의 역할을 하면서 국제정치 질서와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국제정치현실을 자연 상태에 비유하는 홉스의 주장이 수긍이 간다. 유엔은 세계정부가 아니라 193개 주권국가로 구성된 국제기구에 불과하다. 이들 국가들은 여전히 홉스가 말하는 '대외적 자연 상태'를 구성하고 있고 이들 사이에 전쟁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가들은 자신의 주권을 세계정부에 양도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행사하기를 원한다. 이런 현실적 이유 때문에 국제정치현실은 여전히 '대외적 자연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자연 상태는 중앙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이고 전쟁 가능성이 상존하는 전쟁상태이다. 국제정치현실을 무정부 상태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제정치현실은 전쟁상태인 대외적 자연상태의 지속과 반복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 현실이 무질서의 세계는 아니다. 패권국가가 질서를 유지한다. 국가들이 위협적인 국가가 나오면 거기에 대항해서 세력균형정책을 펼친다. 국가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국제법과 국제 레짐을 만들어낸다.

 

홉스의 이론이 갖고 있는 위대함은 자연상태 하에 인간이 처한 곤경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 그 곤경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과 이론을 발전시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높이고 그 극복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데 있다. 홉스가 직면했던 그 현실은 바로 1640년대에 두 번에 걸쳐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영국 내전이었다.

 

이런 시대적 위기에 직면하여 홉스는 자연 상태라는 병 속에 갇힌 새와 같은 인간을 그 병 자체를 깨지 않고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설명함으로써 위대한 정치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외적 자연 상태'라는 개념을 통해서 중앙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로서의 국제정치현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다.

 

미중 패권전쟁과 위기의 대한민국_ 김영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