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발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_ 최진석

정정진 2019. 8. 11. 11:22


훈고적 기풍을 대개 다른 사람이 만든 이론을 그대로 따라 배우거나 자기 삶의 근거를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지식 체계나 이념 체계에서 찾게 합니다. 내 생각으로 내 삶을 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미 해놓은 생각의 결과로 내 삶을 꾸리는 격이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라하기'는 쉽고 편하지만 주도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어렵고 힘듭니다. 요즘 TV를 보면 어느 방송에서나 이런저런 음식 관련 내용을 진행합니다. 소위 '쿡 방'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방송에서나 이런저런 노래 경연 방송을 내보냅니다. '쿡 방'을 처음 만든 사람이나 노래 경연 방송을 처음 만든 사람은 창의적 시도를 감행하면서 온갖 생각에 잠을 설치고 많은 불안을 극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쿡 방'이 인기가 있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방송사에서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따라하기'를 시도합니다.


이렇게 '따라하기'를 하면 최초의 사람이 겪었던 고뇌와 숙고와 불안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매우 편하고 안전하지요. 편하고 안전한 느낌이 너무 크기 때문에 따라하면서 느끼는 '쪽팔림' 정도는 쉽게 감당해버립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스스로도 '쪽팔림'을 모르게 되어버리지요. 거기다가 매출이 올라가고 시청률이 나와주기만 하면 오히려 따라하고도 당당해져버립니다. '쪽팔림'이 사라지면서 너도 나도 창피해하지 않고 따라하기에 동참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대한민국 방송이 아무 개성도 없고 차이도 없는 천편일률적인 방송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죠. '따라하기'가 주는 편안함과 안전함이 '쪽팔림'마저도 느낄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 결국 모두가 어떤 차별성도 없이 몰개성화 되면서 공멸하는 것이지요.


반면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일은 이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계속 파고 들어야만 가능해집니다. 이것을 저는 '지적인 부지런함'이라고 표현합니다.


계속 강조하듯이 대답에만 빠지는 일도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품고 있는 지식과 이론을 요구에 따라 그냥 뱉어내기만 하는 일은 편하지요. 이에 비해 질문은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새로 등장하는 조짐이나 신호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로 즉각 반응하는 일도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좋다'거나 '나쁘다'라는 판단은 이미 내면화된 가치관을 근거로 해서 거기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만 따지는 일입니다. 이때는 숙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미 있는 가치관이 등장하여 즉각적인 판단을 해주지 않습니까? 편리하지요. 하지만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편한 길을 애써 피하고, 그 조짐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 부단히 숙고합니다. 힘들고 불안하지요. 이 힘들고 불안한 내면을 극복하고 계속 질문을 해대는 일은 지적으로 부지런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창의적 결과나 독립적 활동은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지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질문을 발휘하는 능력이 점점 퇴화되어 궁금증과 호기심도 점차 줄어듭니다. 하지만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불편함을 이겨내고 질문을 생산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기 때문에 궁금증과 호기심이 살아 있습니다.


지적인 편안함에 빠져들면 들수록 인간은 급속히 늙어갑니다. 반면 궁금증과 호기심이 살아 있다면, 그는 결코 늙은 사람이 아닙니다.


창의적 기풍은 인격의 문제다


우리가 물컵을 본다고 했을 때, 실제로 그 물컵을 정말로 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들을 조합시켜 그냥 '물컵'이라고 '판단'해버리고는 중간에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보지 않고 중간에 판단해버리면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물컵에 대한 기존의 인식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겠죠. 하지만 물컵을 정말로 보는 사람은 자신의 시선을 물컵까지 보내고 또 시선을 거기에 계속 머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시선을 물컵까지 보내고 또 거기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부지런하지 않고는 시선을 대상에 가져다 붙이고 또 머물게까지 하는 수고를 감당하지 않겠지요. 결국 지적으로 부지런하다는 것은 정해진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현상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향해 계속 돌파해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인식 너머로 넘어가려고 스스로가 부단히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훈고적 기풍을 벗어나서 창의적 기풍을 세운다는 것은 이렇듯 지적인 게으름을 벗어나 지적인 부지런함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관찰, 통찰, 사유의 집요함 같은 부지런함이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격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여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와 사회를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기풍으로 채우는 일은 결국 나와 사회를 인격적으로 성숙시키는 일이며 또한 인격적으로 준비시키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지식의 습득보다 인격적 성숙은 난이도가 훨씬 높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가는 난이도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리는 것도 선진국으로 올라서도록 해주는 대부분의 조건이 인격적 차원의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입니다. 창의성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인격이라는 토양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삶의 깊이와 인격적 성숙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존의 '나'를 죽여야 새로운 '나'가 드러난다


인격의 문제를 매우 깊이 있게 제기한 장자는 '장자' '대종사' 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


여기에서 참된 지식이라는 것은 이 세계를 제대로 반영해주는 진실한 지적 체계를 뜻합니다. 그러니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는 말은, 인격적으로 참되지 않으면 참된 지식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열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지적인 통찰을 발휘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고 건립하거나 창의적인 관점을 제기하는 일 등이 모두 그럴만한 인격이 갖추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뜻이죠.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같은 교육을 받고, 비슷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그냥 그런 일반적인 학자로 남고, 어떤 사람은 인류에게 빛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등극하기도 합니다. 서로 간에 어떤 차이가 있어서 이렇게 큰 격차가 벌어지는 것일까요?


결국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인격의 차이입니다. 인류에게 빛을 보여주는 참된 지식의 생산은 그럴만한 인격적 함량을 가진 바로 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들이 다 그 일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의 크기와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된 사람일까요? 장자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장자' '제물론' 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승 남백자기에게 안성자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성자유가 어느 날 자기 스승을 보니 앉은뱅이책상에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선생님 모습이 예전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르냐고 스승이 물으니, 제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실연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어깨가 축 처지죠. 짝을 잃은 사람은 불 꺼진 재나 마른 나무처럼 풀기가 없이 무너져내립니다. 다 타고난 재는 불이 꺼진 후 겨우 형태만 남아 있다가 손만 대면 으스러지지요.


안성자유가 봤을 때 예전의 스승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실연당한 사람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에 스승 남백자기가 제자를 칭찬하면서 말합니다.


"안성자유야, 너 참 똑똑해졌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고는 분명한 어조로 결론을 맺듯이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 (오상아 吾喪我)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는 이 말을 저는 좀 더 자극적으로 표현하려고 '자기살해'라 합니다. 똑똑하건 똑똑하지 않건 모든 사람은 다 각자 세계를 보는 나름대로의 시각, 즉 이론과 지적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와 관계하지요.


그런데 그 이론이나 지적 체계들, 가치관이나 신념이나 이념들은 사실 생산되자마자 부패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그 부패하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을 매우 강력하고 분명한 가치관으로 신봉하면서 그것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받아들여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로 채워져 있는 가치의 결탁물인 것입니다.


가치의 결탁물로 되어 있는 자기를 장자는 '아'로 표현하고, 이 가치의 결탁을 끊고, 즉 기존의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 태어나는 자기를 '오'로 새겼습니다. 가치관으로 결탁되어 있는 자기를 살해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자기살해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합니다. 이 참된 인간을 장자는 '진인'이라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무아'라는 표현도 글자 그대로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자기로 등장하는 절차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아라는 말은 '진아'라는 말과 같아집니다. 진인으로 새롭게 등장한달지 진아로 우뚝 서는 일을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그것을 반성이라고도 하고, 각성이라고도 하며,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살해 이후 등장하는 새로운 '나', 이런 참된 자아를 우리는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하는 것이지요.


탁월한 사유의 시선_ 최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