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정책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대북정책_ 송민순

정정진 2017. 7. 15. 18:21


북한 인권, 흔들린 원칙


유엔인권위원회는 2003년부터 북한에서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왔다. 우리 정부는 2005년까지는 논란과 고민 끝에 세차례에 걸쳐 이 결의안 표결에 불참하거나 기권했다. 나는 인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어느 나라든 예외일 수 없다고 보았다. 우리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채택에 앞장설 필요까지는 없지만, 회원국들의 집단적 권고인 만큼, 남북관계와는 분리하여 이 결의안에 찬성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1970~80년대 우리나라가 미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인권 상황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을 때,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경제 성장 및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인권도 개선되어왔다. 국가의 대외의존도가 높아진 것도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북한이 빈곤과 고립속에서 인권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걸어온 인권 역사의 교훈과 어긋난다. 인권 상황을 이유로 북한과의 교류와 접촉을 억제하는 것은 오히려 인권 개선에 역행하는 것이다. 한국의 입장은 이 두가지 가치의 중간에 있을 수밖에 없다.


2006년 북한인권결의안은 11월 중순 표결 예정이었는데 9월부터 정부 내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우리는 이미 그해 7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후부터 식량 지원 중단 등 대북 압박을 가하던 중이었다.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해 외교부는 찬성, 통일부는 기권으로 갈렸다. 표결 며칠 전 안보정책 조정회의가 열렸는데 통일부의 기권 주장이 우세했다.


나는 대통령 안보실장으로서 부처 간 입장을 조율해야 했다. 상황을 보니 그해에도 전년처럼 기권으로 갈 것 같았다. 나는 할 수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당시 내가 주도하여 북한 핵의 해결책으로 미국과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을 가동시키고자 하던 때였다. 이 방안의 핵심 바탕은 적극적인 대북 타협 제안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거부할 경우에는 강공책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온 세상이 아는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라는 결의안에도 찬성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미국에 대해 한국을 믿고 대북 강공책을 전제로 한 과감한 타협안에 동참할 것을 요청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통일부의 입장은 달랐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해서 기권하자는 주장을 고수했다. 실제 북한과 얼굴을 맞대고 협상하려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보정책조정 회의에서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보통 합의된 의견을 대통령에게 건의해서 최종 결정을 받는 것이 순서였지만, 이날은 할 수 없이 외교부와 통일부의 입장, 그리고 안보실장의 견해를 병기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여당도 결의안 찬성에 반대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여당과의 의견충돌도 생각해야 하겠지만, 명분상의 문제이니 찬성 쪽으로 설득하자"고 결정했다. 북한인권결의안이 유엔에 상정된 후 한국은 처음으로 찬성투표했다.


2007년에 다시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외교부장관으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1년 전에 심한 논쟁 끝에 대통령의 결정을 받아 찬성투표했는데, 인권의 보편적 원칙은 물론이고 국가 정책의 일관성은 유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정부가 유럽 국가들이 발의한 초안 내용의 강도를 어느정도 완화시키도록 교섭한 결과 북한 지도자를 지칭하는 부분을 삭제하는 등 내용이 상당히 조정되었다. 11월 1일 기자회견에서 결의안 찬성 여부에 대해 질문을 받고 나는, "정부가 2006년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 투표한 것이 우리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확인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 전의 10월 남북 정상회담이 사정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이번 결의안이 이미 우리의 요구를 반영해서 크게 완화되었고, 또한 우리가 북한의 인권 상태를 중시한다는 입장을 취해야 국제사회도 우리의 대북정책에 신뢰를 보이고 지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재정 통일부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백종천 안보실장의 입장은 달랐다. 북한인권결의안이 북한의 체제에 대한 내정간섭이 될 수 있고, 또 인권결의안으로 실제 북한 인권이 개선된다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으며, 특히 어렵게 물꼬를 튼 남북관계 발전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기권을 주장했다. 김장수 국방장관은 특별한 의견이 없었다.


내가 "꼭 그렇다면 찬성과 기권 입장을 병렬해서 지난해처럼 대통령의 결심을 받자"고 했다. 그랬더니 문재인 비서실장이 왜 대통령에게 그런 부담을 주느냐면서 다수의 의견대로 기권으로 합의해서 건의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동의할 수 없다면서 버티자 회의는 파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마침 이 시기, 서울에서 남북 총리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11월 16일 노 대통령은 북한의 김영일 총리를 포함한 남북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을 가졌다. 11월 20일에는 유엔의 표결이 예정되어 있었고, 월요일인 19일에는 대통령이 '아세안+3' 정상회담 참석차 싱가포르로 출국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11월 16일 오후 대통령 주재하에 나와 통일부장관, 국정원장, 비서실장, 안보실장 등 5인이 토론했다. 대통령은 다 듣고 나서는 "방금 북한 총리와 송별 오찬을 하고 올라왔는데 바로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하자고 하니 그거 참 그렇네" 하면서, 나와 비서실장을 보면서 우리 입장을 잘 정리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우리는 뒤에 남아서 더 격론했지만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집무실로 돌아와 혼자서 많은 고민을 했다. 결국 대통령에게 마지막 호소문을 올리기로 했다. A4 용지 4장에 만년필로 나의 생각을 담아서 밤 10시경 대통령 관저로 보냈다. 서한의 요지는 이러했다.


저의 거칠지만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6자회담 수석대표, 안보실장, 그리고 외교장관에 봉직하면서, '한반도 분단 해소'를 향한 대통령의 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부족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왔습니다. 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가 함께 진전되도록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을 우리 정책으로 끌어오기 위해 한시도 눈을 옆으로 돌릴 수 없었습니다. 이번 인권결의안 문제는 인권정책을 넘어 우리가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하여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우리 외교안보 정책의 추진동력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지난해 우리는 처음으로 이 결의안에 찬성했고 그때도 북한이 소리만 냈지, 실제 자신들이 필요하면 수시로 우리에게 접근해왔습니다. 이미 우리의 주도로 결의안 내용을 많이 완화시킨 것도 북한이 알고 있습니다. 기권할 경우 앞으로 남은 기간 비핵화를 진전시키고, 평화체제 협상을 출범시키는 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막막합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왕조시대에 상소문을 올릴 때 이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이 지나 11월 18일 일요일 저녁에 연락이 왔다. 장관들이 다시 모이자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나의 편지를 보고, "그동안 외교부가 여러 나라를 설득해서 결의안 문안까지 완화시켰는데 지금 와서 기권하자면 민망할 것이다. 그런데 찬성을 해서 남북관계에 영향을 줄 위험도 생각해야 한다. 엊그제 북한 총리에게 이 문제를 가볍게 언급했더니 '일 없다'고 지나가듯이 이야기하던데 좀더 챙겨볼 걸 그랬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주무기관인 외교장관이 그토록 찬성하자고 하니 비서실장이 다시 회의를 열어 의논해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저녁 늦게 청와대 서별관에 도착하니 다른 네 사람은 미리 와 있었다. 이구동성으로 왜 이미 결정된 사항을 자꾸 문제 삼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나는 다시, 인권결의안에도 찬성 못하면서 어떻게 북한 핵과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우리의 방안에 협력해달라고 다른 나라들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면서, 내가 장관 자리에 있는 한 기권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북측의 반발에 대해서 너무 우려하지 말라면서 유엔에서 남북대표부 간 막바지 접촉 경과를 설명했다. 당시 유엔에서 북한 외교관들은 지난 5년간 몇몇 나라가 정치적 목적으로 북한인권결의안을 추진했다고 비판하면서 한국이 결의안에 대한 찬성을 전제로 수정안을 내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교관들은 남북 경제협력과 인도적 지원, 그리고 국제사회의 대북 지원을 원활하게 하려면 한국이 나서서 완화시킨 결의안 정도에는 찬성하는 것이 현실적 방안이라고 북측을 설득하고 있었다.


나의 주장이 계속되자 국정원장이 그러면 남북 채널을 통해서 북한의 의견을 직접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다른 세 사람도 그 방법에 찬동했다. 나는 "그런 걸 대놓고 물어보면 어떡하나. 나올 대답은 뻔한데. 좀 멀리 보고 찬성하자"고 주장했다. 한참 논란이 오고 간 후 문재인 실장이, 일단 남북 경로로 확인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더이상 논쟁할 수가 없었다. 한밤에 청와대를 나서면서 나는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남북관계를 좀더 진전시켜두고자 하는 의지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런 방식으로 남북관계의 허상을 쫓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인 11월 19일 아침 대통령을 수행해서 싱가포르로 출국했다. 11월 20일 저녁 대통령의 숙소에서 연락이 왔다. 방으로 올라가보니 대통령 앞에 백종천 안보실장이 쪽지를 들고 있었다. 그날 오후 북측으로부터 받은 반응이라면서 나에게 읽어보라고 건네주는 것이었다. "역사적 북남 수뇌회담을 한 후에 반공화국 세력의 인권결의안에 찬성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북남 관계 발전에 위태로운 사태를 초래할 테니 인권결의 표결에 책임있는 입장을 취하기 바란다. 남측의 태도를 주시할 것이다"라는 요지였다.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적반하장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백 실장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나올 줄 모르고 물어봤느냐"라고 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백 실장은 자리에서 떴다. 나는 달리 쳐다볼 곳이 없어 한참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도 기분이 착잡한 것 같았다. "북한한테 물어볼 것도 없이 찬성투표하고, 송 장관한테는 바로 사표를 받을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는데..." 하며 말을 끝맺지 않았다. 외교장관이 알아서 찬성투표하게 해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체면은 살리고, 그후 장관을 해임하여 북한에 대한 입지도 살리는 고육지계를 생각했던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게 오히려 맞습니다. 지금 이 방식은 우리의 대북정책에도 좋지 않고 대외관계 전반에도 해롭습니다"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그런데 이렇게 물어까지 봤으니 그냥 기권으로 갑시다. 묻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송 장관, 그렇다고 사표 낼 생각은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정부 임기가 6개월 정도만 남았더라도 사표를 냈겠지만 석달을 앞두고 나의 명분만 차리겠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노 대통령은 잠시 후 "나 참, 공기가 무서워서 안되겠네" 하면서 침실로 들어갔다. 이날 청와대 대변인은 "노 대통령이 외교장관과 안보실장으로부터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해 보고를 받고 기권 방침을 결정했다"고 언론에 설명했다. 다음 날 유엔에서 한국은 북한인권결의안 투표에 기권했다. 4년 사이에 한국은 이 결의안에 대해 불참-기권-찬성-기권으로 가는 지그재그 행보를 걸었다.


11월19일 서울에서는 버시바우 미국대사가 조중표 차관에게 한국이 전년도와 같이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투표해줄 것을 마지막으로 요청해왔다. 미국 행정부는 한국이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동참하지 않을 경우 대북정책 공조에 미칠 영향은 물론 의회와 언론으로부터 동맹 관리를 잘 못하고 있다고 비판받을 것을 우려했다. 대북정책에 대한 의회의 지지를 받기도 어려운 것이다. 당시 나는 라이스에게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라도 비핵화를 진전시키고 평화체제 협상 출범 여건도 만들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보편적 원칙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키면서 미국더러 우리와 공동보조를 취해서 평화체제의 기반을 같이 닦자고 하는 것이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11월 말 나는 이화여자대학교 강연에서 한국의 국민총생산 규모가 전세계 80위에서 200위에 걸친 국가들을 다 합친 것만큼 큰 나라임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교력을 발휘하여 더 큰 국가이익을 창출하고 미래의 지평을 여는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는데, 남북문제만 나오면 국제사회에 나가서 작아진다고 내 심정을 토로했다.


이후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 및 박근혜 정부에서는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해 단순한 찬성투표를 넘어 결의안 발의를 주도했고 대북정책도 전면 전환했다. 만약 노무현 정부가 2006년에 이어 2007년에도 일관되게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했다면 다음 정부가 10.4  정상선언을 포함한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뒤집을 명분을 찾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발의한 결의안에 그냥 찬성하는 것과 발의에 앞장서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를 일단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협상을 통해 상호 신뢰를 쌓으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 불가피하다. 한국이 국제사회의 북한 비난을 선도하는 것과 남북 신뢰구축을 주도하는 것은 병립하기 어렵다. 북한인권결의안에는 찬성하고 대북 지원은 늘리는 것이 균형있는 정책일 것이다. 그래야 한국이 국제사회의 대북 자세를 주도할 입지를 만들 수 있다. 특히 미국의 대북 협상파들로 하여금 필요시에 한국의 대북 압박을 기대할 수 있으니 한국이 제시하는 협상전략을 존중해주자는 목소리를 내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빙하는 움직인다_ 송민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