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우리가 많이 듣는 말이지만 실제로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 것이 바로 '내려놓는다'라는 말 같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내려놓지 못해서, 이룰 수 없는 내 안의 욕망을 내려놓지 못해서 괴롭다고 토로하는 분들을 그간 많이 만났습니다. 예를 들어, 관계 속에서 내게 실망감이나 상처를 준 누군가를 될 수 있으면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데 그런 기억들을 막상 내려놓자니 오히려 그 사람 생각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괴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는 내가 정말로 이루고 싶었던 일 문턱까지 다다랐었는데 최종 단계에서 이루어지지 못해 새로운 일을 다시 찾아 시작하려고 하니 아쉬운 기억과 좌절감에 마음을 내려놓기는커녕 방황만 하고 있다고 토로합니다.
삶이 가져다주는 실망과 좌절은 누구나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흔히 "다 잊어,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다 내려놓아."라고 조언을 하지요. 하지만 내려놓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잊고 싶은 사람, 정리하고 싶은 기억들이 이상하게 더 떠올라요. 하루빨리 내려놓고 마음을 완전히 비워버렸으면 좋겠는데,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내려놓는 것은 잘 안 되니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좀 편안해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려놓는다'라는 말은 사실 '받아들인다'의 다른 말입니다. '내려놓는다'고 해서 과거에 있었던 힘든 기억을 없애고 지운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면 과거의 아픈 기억을 지우개로 지우듯 지웠으면 좋겠지만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잊으려 애를 쓸수록 더 생각이 나고 더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실 내가 힘든 것은 과거의 기억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고 그 기억에 붙어 있는 아쉬움, 실망감, 좌절과 같은 어려운 감정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묘하지만 큰 차이입니다. 10년 전에 나를 힘들게 했던 상황을 기억해보면 지금은 그때처럼 그리 힘들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기억에 붙어 있던 감정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소멸됐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기억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잘 지워지지도 않는 기억을 억지로 없애려 하거나 누르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려놓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힘들어하는 나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과 함께 붙어 있는 감정들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힘들어하는 나를 허락하면, 허락하는 즉시 마음의 상태가 미묘하지만 곧 바뀌게 됩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힘들어하는 내 감정이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되는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버거워했는데, 허락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힘들어하는 마음이 계속 진행되지 않고 멈추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마음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힘든 감정들로부터 나와 그 감정들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힘든 감정을 내가 어떻게든 변화시켜보려고, 잊어보려고 했는데, 있는 그대로를 허락하고 나니 일체의 마음 활동이 쉬면서 자연스럽게 바라보게 됩니다.
마음이 조용한 상태에서 내 감정을 따뜻하게 지켜보고 있으면 뜻하지 않은 다소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는 힘든 감정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감정을 따뜻하게 지켜보는 '또 다른 나' 혹은 '그분'이 계시는구나 하는 알아차림입니다. 세상에서 나만 홀로 분투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항상 나를 떠나지 않은 채 고요 속에서 자비하게 내 마음을 바라보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그분께서 '마음아, 지금 많이 힘들어하는구나, 얼마나 아팠니?' 하고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지켜봄을 통해 힘든 감정과 거리감, 공간감이 생기면서 그 감정들을 내가 수용할 수 있을 것같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은 그 감정들을 받아들이고도 남을 더 큰 공간이라는 자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마치 작고 어두운 마음의 방 안에 아픈 감정이 갇혀 있었는데, 갑자기 벽이 무너지고 햇살 좋은 공원처럼 넓고 따스한 공간 속에 자리한 그 감정을 바라보게 되니, 비록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커다란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과 같아요. 굳이 그 감정을 피하려고 하지 않아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아도, 그래, 이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혹시 살면서 뭔가를 내려놓지 못해서 감정적으로 힘들다고 느낄 때, 있는 그대로의 마음 상태를 허락해보세요. '좀 힘들어도 괜찮아, 좀 아파도 괜찮아.' 마음속으로 속삭이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내 안의 상처를 자애의 눈길로 보듬어주시는 내 안의 또 다른 큰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_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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