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다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미움과 분노를 가슴속에 담고 사는 것보다 용서하는 편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그건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은 또 그게 아니다. 어떻게 나를 심하게 비방하고 나에게 상처와 모욕감을 준 사람을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온갖 거짓말을 하고도 저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극을 하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혹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내가 힘없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무시하고 짓밟던 그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우리의 상처가 너무도 깊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이럴 때 상처 준 그 사람을 섣불리 용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용서하려는 마음이 올라오지도 않겠지만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은 치솟는 분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처가 깊을 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한 분노와 미움은 손상된 자아가 그 사람과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고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일으키는 지혜로운 감정이다. 분노는 일종의 보호 장벽과도 같아서 깨지고 부서진 자아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회복될 때까지 나름의 역할을 한다. 그 분노를 빨리 내려놓으라고 옆에서 자꾸 종용하는 것은 잘못하면 그 사람을 다시 상처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떠올리며 자기 스스로를 희생자라는 틀안에 가두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상처의 기억을 되살릴수록 힘없이 바보처럼 당하기만 했던 본인 스스로가 싫어지고, 마음은 지금 현재를 놓치고 우울한 과거 속에서 분노와 함께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이럴 때 머리로는 용서하고 털어내자고 결심을 해도 우리의 가슴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또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용서를 할 수 있는지 어디에서도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머리와 가슴은 완전히 따로 놀아 더 괴로워지기만 한다.
지난 한 주를 마무리하는 일요일 저녁, 아주 오랜만에 어릴 적 친했던 동창 한 명을 만났다. 내가 스님이 된 것을 뒤늦게 알았다며 연락을 해온 친구는 서로의 삶에 집중했던 시간의 간극 탓인지 처음에는 살짝 어색해했지만 이내 어렸을 때 모습으로 돌아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친구 역시 나처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이던 친구였다. 공부만 잘했던 것이 아니라 운동도 열심, 음악도 열심, 반 학생들 사이에서 리더십도 좋은 친구였다. 어른이 된 친구는 좋은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 일을 배우고 지금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업체를 꾸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성공한 케이스였다.
저녁 식사를 마칠 즈음, 그 친구는 한참을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불쑥 이런 말을 했다. "혜민 스님, 나 좀 치유해줘. 최근 들어 좀 마음이 우울하고 별로 하고 싶은 일이 없어. 그냥 좀 힘드네." 열심히 살고 성공한 그 친구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얼굴은 어렸을 적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의 집안 사정을 알던 터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거, 왜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 그러자 처음엔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이야기하다, 계속되는 나의 질문에 어렸을 때 이야기로 옮겨갔다.
"사실, 우리 집 형편이 좀 어려웠잖아. 내가 열심히 살지 않으면 엄마가 계속해서 힘들게 사셔야 할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아." 나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런데 그게 다야? 단지 엄마를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서?" 그러자 친구의 얼굴이 어두워져 갔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가난하고 못 배웠다고 우리 엄마를 항상 무시하던 큰고모를 미워했던 것 같아.그래서 내가 사촌들보다 더 공부도 잘하고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랬구나. 엄마가 큰고모한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큰 상처가 되었겠구나. 나라도 그런 큰고모가 밉고 분했을 것 같아. 자, 그러면 지금부터 내 말대로 해봐. 지금 네 앞에 어머니와 어린 너에게 상처 주었던 큰고모가 있다고 상상해봐. 그리고 어렸을 때 상처받았던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큰고모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는 거야. 어른이 하는 고상한 말들 말고 열 살짜리 꼬마아이들이 하는 말로 말이야. 도덕적 잣대는 잠시 접어두고 그냥 하고 싶은 말, 정말 내 속에서 올라오는 말. 있는 그대로 막 하는 거야."
용서하겠다는 머릿속의 결심을 가슴으로 이끌어주는 중요한 통로는 다름 아닌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다.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일어나는 분노와 미움을 부정하거나, 혹은 자각 없이 그 감정 안에 빠져 지내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허락하고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억눌러왔던 분노와 미움을 만나는 것이 첫 번째 과정이다. 오랫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이 올라올 때 그 감정들에 취해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고 분노와 미움의 에너지가 몸 안을 무대 삼아 어떤 모양으로 일어나는지 따뜻한 자비의 눈빛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아이의 마음 상태를 엄마가 지켜보듯 내 감정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러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내 안의 분노와 미움을 따뜻하게 보고 있으면 양파가 껍질을 한 겹씩 벗듯 더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의 속 모양이 드러난다. 나같은 경우엔 분노 바로 아래에 슬픔과 비통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더 따뜻하게 지켜보니 또 그 아래에는 단절에 따른 외로움과 공포가 더 깊은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나를 향한 자비의 눈길로 먼저 내 감정들을 지켜보다 보면 신기하게도 굳었던 내 마음이 점점 녹으면서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난 후 그 자비의 눈길을 이번에는 내게 상처 준 상대에게 향해보는 것이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아픔이 있었기에 나에게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는지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던 것들을 없었던 일로 하려고, 면죄부를 주기 위해 보는 것은 아니다. 용서의 목적은 과거 상처에 얽매여 힘든 내 감정의 족쇄를 스스로 풀어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즉,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가 내 안의 상처와 응어리로부터 자유로워지자고 하는 것이다. 그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내 마음이 열렸을 때 관찰의 눈길로 그를 이해하기 위해 바라보면 놀랍게도 전에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상처를 준 사람도 사실 어렸을 때부터 상처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를 무시하고 으스대던 그 모습 바로 아래에는 그도 역시 남들로부터 외모나 학력, 가난 때문에 과거에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점이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나와 똑같이 삶이 외로워서, 아니면 나이 드는 것이 서럽고 불안해서 저러는구나 하는 것이 보인다. 이러한 깊은 진실과 마주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좀 누그러지고 편안해진다. 그 상태에서 불안하고 외로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내 아픔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면서, 내 안의 비통함은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으로 전환되게 된다.
내면의 소리를 밖으로 꺼내보라는 내 이야기에 한참 동안 침묵하던 친구는 이내 허공에 대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억눌러왔던 분노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얼마나 서러웠으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나도 같이 눈물이 나왔다. 한참을 울고 난 후 좀 진정이 됐는지 그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그랬구나.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살았던 거, 큰고모한테 복수하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인정받고 싶어서 그랬던 거구나, 그런데 작년에 큰고모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 그 목표가 사라지고 나니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이 텅 빈 거 같은 거였구나."
며칠 후 친구에게 이메일이 왔다. 친구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본인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야 비로소 난 큰고모를 용서하고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집에 돌아와 혜민 스님이 하라는 대로 큰고모는 어떤 아픔이 있었을까 하고 보니까 큰고모 삶도 불행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모부가 성공은 했지만 매번 바람을 피웠고 또 고모도 시집살이를 아주 심하게 하셨다고 들었어. 고모도 행복하셨다면 우리 엄마에게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젠 나도 나를 힘들게 했던 과거와 화해하고 지금부터는 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안에는 분노와 미움, 슬픔과 비통함, 외로움과 공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내면의 감정들을 따뜻하게 지켜보는 자비한 마음의 눈이 있다.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래서 삶이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 때, 부디 내 안의 그 자비한 눈빛과 마주하시길 깊이 소망한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_ 혜민스님
'힐링&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색이 영롱한 구슬_ 퇴우정념 (0) | 2016.12.14 |
---|---|
힘들어하는 나를 허락하세요_ 혜민스님 (0) | 2016.09.06 |
모든 사람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_ 이나모리 가즈오 (0) | 2016.08.29 |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0) | 2016.02.21 |
행동하는 사랑_ 틱낫한 (0) | 2016.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