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놀이
의자놀이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 하던 그 놀이. 의자를 사람 수보다 하나 덜 놓고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다가 노래가 멈추는 순간
재빨리 의자에 앉는 놀이. 행동이 굼뜬 마지막 두 명은 엉덩이를 부딪치며 마지막 남은 의자를 차지하려 하고, 대개는 한 명이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정말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마지막 순간이 되면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 친구를 밀어버리고 내가 앉아야 하는
그 의자놀이. 쌍용자동차 관리자들은 이 거대한 노동자 군단에게 사람 수의 반만 되는 의자를 가져다 놓고 마치 그런 놀이를 시키는 것 같았다.
기준도 없고, 이유도 납득할 수 없고, 즐겁지도 않으며, 의자를 놓친 자들에게는 죽음을 부르는 그런 미친 놀이를.
15년에서 20년을 다닌 정든 일터. 나태하지도, 규율을 어기지도 않았다. 몸이 아파도 열심히 일했다. 라면과 요구르트 지급을 중단한
것도 치사하지만 참았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생애 마지막으로 만져볼 유일한 목돈, 퇴직금을 담보로 내놓자는 노조의 의견에도 모두 동의했다.
그런데 이제 "너, 나가!" 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나가야 하나? 사람이라면 질문해야 하고 합리적인 납득을 기다려야 한다. 당신이라면
그렇지 않겠나?
일터는 단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가는 장소가 아니다. 돈만 벌면 어디든지 다 좋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터, 우리에게 생활을
보장해주고, 우리에게 밥과 의복을 주며, 사람들을 엮어내서 인간의 사회적 욕구를 펼치게 해주는, 우리의 품위와 자부심, 그리고 긍지를 주는 내
인생이 펼쳐지는 현장이다. 가정과 직장, 이 두 들판이 우리의 인생인 것이다. 그리고 가정이 무너지면 가끔 직장생활도 무너지지만, 일터가
무너지면 가정은 거의 대부분 무너진다. 아무런 사회안전망, 즉 재취업과 실업보험, 혹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주거 등에 대한 약속 없는
정리해고는 삶에서 해고된다는 말과 같다.
정리해고 확정 발표가 있은 지 약 20일 후인 5월 13일, 세 사람은 짐을 싸가지고 높이가 70미터나 되는 굴뚝으로 올라간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 김을래 부지회장, 정비지회 김봉민 부지회장,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부지회장이 그들이다. 아직 전면 파업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그들이 내건 구호는 '정리해고 반대, 총고용 사수!', '함께 살자.' 였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나란히 올라간 것이 큰 의미일 것이다. 70미터는 30여 층 건물의 높이와 같다. 이들은 8월 6일 헬기로
구출되기까지 86일간 거기에 머무른다. 파업이 끝났을 때는 걸어 내려올 수 없을 만큼 몸이 허약해져 있었다. 시퍼런 장정 셋이 제대로 몸을 누일
수도 없는 좁은 곳에서 그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중에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씨는 바로 병원으로 호송되었지만,
그들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그 자리에서 바로 구속된다. 그들에게는 김진숙씨를 주시하고 보호하려고 둘러싼 시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끌려갔다.
처음 사다리를 오르던 날, 86일 동안이나 굴뚝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지붕이 없는 한뎃잠을 자야 했고, 용변은 페인트 통에
해결했다. 바람이 불면 굴뚝이 흔들렸다. 낮엔 덥고 밤엔 추웠으리라. 왜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것일까? 왜 이토록 일자무식하게 삶과 죽음의 벼랑 끝에 서 있어야 하는 걸까? 그들은 어쨌든 그곳에 갔다.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물의를 빚은 점은 인정되나" 라던 판사에게 김진숙씨는 말했다. "물의라도 빚지 않으면 누가 우리의 말을 들어줍니까?"
서맹섭 부지회장의 두 살짜리 아들이 가끔 굴뚝 밑에서 손을 흔들며 전화기를 통해 말했다. "아빠, 왜 그렇게 높은 데 있어? 개미같이
쪼그맣게 보이잖아. 내가 아빠 얼굴 잘 보고 싶은데." 며칠 후 노조는 조합원들의 절대적인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한다.
5월 22일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관리자들은 쌍용자동차 성격상 400명도 오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당시 조합원 수 5150명.
그러나 예상을 깨고 농성 첫날 1038명이 모였다. 이는 점점 늘어나 한때 1500명에 육박한다. 여기에는 정리해고 대상이 아닌 조합원 100여
명도 포함되었다. 형제 중 한 사람은 해고, 다른 한 사람은 근무, 매제와 처남이, 중고등학교 친구가 그렇게 갈라졌다. 죽은 자(정리해고자)는
서럽고 산 자(계속 고용자)는 괴로웠을 것이다.
조합원들은 미리 준비한 컨테이너 4개로 정문을 막고 평택 공장의 전 출입구를 자물쇠로 잠갔다. 그리고 컨테이너에 스프레이로 이렇게
썼다.
'여보, 사랑해' '해고 1순위 매각 당사자'
며칠 후인 5월 26일, 조합원들은 그때까지 공장 안에 있던 관리자들을 밖으로 내몰고 지게차 등으로 바리게이트를 쳤다. 그러나 서로
휴대전화가 통하는 상황에서 관리자들은 끊임없이 조합원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 나오면 해고자 명단에서 빼주겠다. 마지막 기회다." 라고
회유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한참을 멈추어야 했다. 나라면, 나는 노동자가 아니고, 나는 해고당해본 적은 없지만, 나라면 흔들렸을 것 같아서였다.
다른 분들은 아니겠지만 마지막으로 나는 흔들렸을 것 같다. 아직 정리해고 명단이 법원에 제출된 것도 아니므로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날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조합원이 자택에서 쓰러져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사인은 신경성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 가족은 그가
정리해고뿐만 아니라 거듭되는 회사의 회유, 협박, 그동안 임금 체불에 의한 생활고 등으로 몹시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그도 아마 관리자들의 전화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나오면 빼주겠다."는 말에 동요하는 자신을 책망했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그렇다고 짐작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으리라.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이때까지 공장 안에 있던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해고되는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였다. 모호함과 의혹은 회사가 노동자들을 다루는 가장 큰
무기였다. 실제로 명확히 보여주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해고통지서가 집으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거라는, 없는 이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압류 협박이 이어졌다. 그것도 아직은 실체가 없었다. 유령들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평택경찰서는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노조 간부들을 체포하겠다고 발표했다. 회사 측은 '살아남은' 자들을 모아놓고 동의서에 서명하게 했다.
"기본금 동결, 상여금 250% 반납, 연월차 수당 반납, 복지부분 중지/반납"
한 사람당 금액만 환산해도 1000만 원이 넘는 돈을 포기하라고 했다. 이유는 어이없게도 "희망퇴직자들에게 약속한 2개월 치 월급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글쎄, 멍텅구리배를 타고 무인도로 끌려간 사람들에게나 강요될 약속이 소위 대기업 노동자들에게 강요되고 있었다. 해고된
동료의 해고수당을 노동자들에게 내라고 하더니....
만일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공상소설을 쓴다면, 이 대목에서 그동안 참아왔던 사람들이 이런 악랄한 희생을 강요하는 관리자들에게 분노하여
파업의 대열로 들어가게 했을까? 만일 모든 노동자가 이런 조건을 거부하고 조합이 제시한 대로 자구적 노력을 함께하자고 말했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 후로도 생각하곤 했다. 당시 용산 참사에서 6명의 인명을 앗아가놓고 "법대로!" 했다고 소리치던, 역사상 가장
법을 안 지키는 현 정권이 더 잔인한 진압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22명의 자살자들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폭력보다 절망에
의해 죽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이 배운 관리자들은 가난한 피고용자들이 빵 앞에서 얼마나 비굴하고 절망적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예측한 대로 모두가 단결하여 승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산 자들은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노동계약에 도장을 찍었다.
쌍용자동차 파업의 후유증은 나중에 이야기할 잔인한 진압, 비인권적인 정부와 사측의 처사 외에도 복잡한 요인을 안고 있는데, 그 큰 흐름
중 하나가 바로 이 산 자와 죽은 자들 사이를 끝없이 이간시키는 노무 관리자들이었다.
그리하여 또 한 사람이 죽는다. 바로 '산 자'에 들었던 사람이었다. 회사는 소위 산 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데모에 앞장서게 한다. 옆의
동료가 하루아침에 해고자가 되면 어떻게 될지 그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비굴한 도장을 찍고 살아남아야 했던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강제로 동원되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해고당한 동료들을 향해 비방하는 구호를 외쳐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47세. 한창 자라던 아이들의 아빠인 김태훈 씨도 그런 경우였다. 그는 조합원이었고, 조합원의 역할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었다. 6월
10일 평택종합운동장에서 진행된 사측의 관제 데모에 동원되어야 했던 그는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와 그 데모에 참석했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가 동료들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 쓰러졌다. 그날 그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처지가 되었나. 동료가 살겠다고
데모를 하는데 그나마 아직 안 쫓겨난 내가 가서 그들을 욕하는 구호를 외치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노노분열을 부추기는 회사가 정말 싫어.
나는 요즘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였다. 관제 데모도 해고와 같은 살인이었다. 나중에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두루 만나보고 나는 이
사실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이들은 내가 만나본 어떤 사회 그룹보다 말하자면 '융통성이 없고, 그냥 순박한 모범생들' 같은 집단이었다.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니었다. 참으로 반듯했다. 그들이 끼우던 그 부품들처럼 그렇게.
그리하여 자신의 비겁함을 견디기 힘들었던 가장 양심적인 사람이 또 하나 희생된다.
그리고 이틀 후 희망퇴직자 중 한 명이 자신의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는 희망퇴직 이후 아파트 대출
상환금 1000만 원을 갚을 길이 없어 몹시 괴로워했다고 가족은 전했다. 해고가 시작된 지 한 달도 못 되어서 벌써 다섯 명이
희생되었다.
_ 공지영 <의자놀이> 중에서
'정치&정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 허세와 거품이 없는 사회_ 양돈선 (0) | 2017.12.30 |
---|---|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대북정책_ 송민순 (0) | 2017.07.15 |
아르헨티나의 '선거혁명'_ 허원순 (0) | 2017.06.02 |
미국의 중국 봉쇄와 사드_ 이재봉 (0) | 2016.09.16 |
명품 백보다 싼 '사람 값'_ 김연희 (0) | 2016.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