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성찰

지혜, 배움의 기쁨_ 양희규

정정진 2010. 8. 7. 23:37

 

지혜, 배움의 기쁨

 

마지막으로, 지혜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제가 볼 때는 '배움의 기쁨' 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무얼 배울까 하는 마음으로 가슴 설레는 분이 있습니까?

어릴 때 소풍가기 전날 맛있는 걸 가방 가득 싸놓으면 잠이 안 오죠. 가슴이 설레어서요. 그런데 만일에

배운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인생이 행복할까요.

무엇을 배우든지 간에.

 

제가 배운다는 것이 정말 기쁜 일이라는 것을 느낀 것은 26살 때가 처음입니다. 그때 금오산 뒤편에 들어

가서 8평짜리 오두막집을 지었는데, 그땐 정말 잠이 안 오데요. 그 다음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계속

나면서, 기둥을 어떻게 세울지, 물은 어떻게 끌어올지, 그런 걸 밤 늦게까지 생각하면서 뒤척이다가 새벽에

동이 틀 때 잠이 깨요. 동이 트자마자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갑니다. 재밌으니까요. 누가 억지로 시키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가 불행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배움의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강제되지 않으면 아무도 공부

안 합니다. 시험을 친다 그러면 밤새도록 눈이 새빨갛게 될 때까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시험만 치면 다 잊어먹지요.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건 광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교를 마치면 모두들 취직공부를 그렇게 합니다.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외에는 공부 안합니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사람들이 주차장에서 차를 기다라며 책을 읽고 있는 것을 흔히 봅니다. 우리는 좀

배웠다는 사람들도 대개 신문이 고작인데, 그 사람들은 책을 들고 있어요. 물론 신문을 읽는 게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가 흥미를 가진 분야를 끊임없이 즐거움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몇이나 되느냐 하는 겁니다. 요즘 '경쟁력' 운운하는데, 저는 이게 옳은 논리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그나마 경쟁이나 제대로 되겠습니까.

 

버트란드 러셀은 수학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살을 못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결국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아니냐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사부터가 배우는 데 재미가

없고 또 가르치는 데 즐거움을 못 느낀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사들,

지금 완전히 '인간 녹음기' 아닙니까. 수업 들어가 똑같은 이야기 틀어야지, 목은 아프지, 정말 괴롭습니다.

오늘은 또 어떻게 때우나, 이런 생각 하나만으로 하루를 지탱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쁨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간디학교 아이들 중 이미 몇명은 정말 배움의 기쁨 속에서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음악

이든 도자기 만들기든, 거기에 몰두하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옵니다. 누가 시켜서 하라고 하면 그렇게 열심히

못하죠. 연극에 몰두하는 아이, 스스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아이, 그렇게 배움의 기쁨을

하나라도 느껴서 스스로 배워나간다면 인생에서 뭔가를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배우는 기쁨이 있다면 인생이 그렇게 초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소질과 적성이 다른데, 왜 부모나 교사들은 자꾸 한쪽의 지능만 발달된 아이로 키우려고 하는 걸까요.

이것은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엄청난 불행을 가져올 수 있는 거죠. 아이들에게 숨어있는 지혜를 교사는

봐야 됩니다. 그걸 인정해주지 않고 그걸 보지 못한다면 교육은 죽는 것입니다. 결국 획일적으로, 성적순으로 줄을

매겨서 몇등 밖으로는 인간을 다 바보로 만드는 교육,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교육밖에 할 수 없습니다.

 

* 양희규 - 간디학교 설립자.

 

- 김종철 <녹색평론 58호, 2001년 5~6월>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