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환원 의식
한국 사회에서 누구에게 이런 생각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작년에 제가 아는 분의 아들이(한국)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스페인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 있는 스페인 출신 수녀님이 3개월 동안 휴가를 받아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방학 때니까 이 아이가 수녀님 댁에 묵으면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려고 갔다가 병이 들었습니다.
십이지장궤양까지 있어서 바로 그 지역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계속 걱정을 했습니다. 병이 빨리 나을 수 있을
지도 걱정이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자기가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자기에게 더 특별하게 친절하게 대하니까 더 부담스러운 겁니다.
이거 돈을 얼마나 내야 되냐? 하고 그 아이가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한 후 수술까지 받고 여드레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그냥 가라는 겁니다. 나중에 수녀님에게 물어보니까 '그거 몰랐냐? 무상이야" 하더랍니다.
스페인은 무상 의료라 돈 안 받으면서도 친절한데, 한국에서는 돈 받으면서도 불친절합니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옵니까? 스페인의 의사
와 간호사들은 자기를 의사와 간호사로 만들어 준 것이 스페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상교육을 받고 의사와 간호사가 되었으
니 사회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능하다는 거죠.
그런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면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의식에 담겨 있는 생각이 뭐겠습니
까. 특권의식입니다. 내가 경쟁에서 이겼다, 이거죠.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 사교육비, 공교육비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는 생각을 합니
다. 그래서 의사와 변호사가 되면 그 비용을 뽑아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엘리트층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란 경쟁에서 '이겼다'하는 특권 의식과 내가 이기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들였다, 그래서 뽑아
내야 한다는 본전 생각 말고 무엇이 있습니까? 사회 환원 의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교육의 공공성과 관련해 나타나
는 다른 모습입니다.
사회 자체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무상 의료 체계가 이루어지려면 뭘 많이 내야겠습니까? 세금을 많이 내야죠. 세계에서
제일 많이 내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웨덴, 노르웨이와 같은 북유럽입니다. 경제 활동을 하면 소득이 있죠. 소득 중에서
사회에 내놓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정적으로 쓰는 것이 사회에 내는 것이죠.그것이 첫째 세금(조세)이죠. 두 번째는 사회보장
분담금입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 우리가 4대보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금과 사회보장 분담금을 합쳐 국민부담율이라고 말
합니다. 스웨덴의 경우 국민부담율이 50%입니다. 말하자면 사회를 위해 내놓는 것이 절반이라는 것이죠. 프랑스만 해도 45% 정도 됩
니다.
그러면 세금 폭탄이라고 아우성치는 한국은 몇 % 인지 아십니까? 25% 정도 됩니다. 프랑스는 45%, 한국은 25% 정도인데 그 중 세금
이 19%이고 사회보장 분담금이 6% 정도 됩니다. 이것도 김대중 정부 들어서고 나서 조금씩 늘어난 것입니다.
전에 <조선일보> 신문 사설에 "남들은 내리는데 우리만 올리나?" 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세금을 내리는데 우리나
라만 올린다는 거죠. 모르면 당연합니다. 우리나라는 조세가 19%인데 절대적인 비중이 간접세입니다. 직접세가 아니라 관세, 부가가치
세, 주세 이런 것들입니다. 소득세, 법인세 같은 직접세의 비중이 적고 간접세 비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세금이 높다고 엄포를 놓는 거
죠. 이것은 미국 모델인데요. 가진 사람들이 안 내놓겠다는 겁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가진 사람들이 세금이 높다고 아우성치면 안
내놔도 되거든요. 우리나라의 세금제도가 세금 폭탄이라고 하면 관련 없는 사람들도 거기에 다 동의하거든요. 우리나라는 세금 폭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금 핵폭탄이 필요한 나라입니다.
프랑스는 직접세를 많이 걷기 때문에 무상교육이 가능합니다. 물론 돈 가진 사람이, 소득이 많은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려고 하겠습니
까. 안 내놓으려고 하죠. 그래서 공공성의 강제성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무상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별로 갖고 있
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세금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끔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무상교육은 눈물
겹도록 소중한 제도입니다.
세대 간 연대, 계층 간 연대
무상교육은 계층 간 연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대 간 연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층 간 연대란 횡적 연대인 것입니다. 세대 간
연대는 종적 연대입니다. 말하자면 무상교육은 계층 간 연대, 다시 말해 소득이 많이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서 소득이 적은 사람 자식의
교육 자본 형성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계층 간 연대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전체로 보면 현재의 경제 활동 인구가 오늘 날 모
든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 자본 형성 비용을 부담해 준다는 점에서 종적 연대이며 내림의 연대인 것입니다.
무상교육을 통해 횡적, 종적 연대가 생기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사회 환원 의식이 생깁니다. 학생들에게 "연대 의식을 가져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스스로 연대 의식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학교가 도무지 돈 하고는 관계가 없는, 인연이 없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대학 졸업 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한다 하더라도 연대 의식의 공유 속에서 경쟁하게 됩니다.
우리처럼 정말 연대 의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하고는 다른 모습이죠. 그래서 칸트적인 의미에서 서로 위할 수 있는,
위하는 관계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이러지 못한 우리의 사회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전 사회 구성원이 행복하지 못합니
다. 왜 행복하지 못하냐? 불확실한 미래때문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 인간은 불안해하게 되어 있습니
다.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니까 앞날에 내가 어떻게 될까 대단히 불안하죠.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 지금 모두
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오늘을 저당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오늘에 진
정으로 충실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내 삶에 진정으로 충실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를 위한
충실한 삶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불안 요인이 되고 있는 것. 즉 "아프
면 어떻게 할까. 또 내 자신이 앞으로 커서 자식 교육이나 시킬 수 있을까?" 하는 누구나에게 부딪히는 그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을 살리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 문제가 바로 사회 보장 문제입니다. 내가 어떠한 상황이 되어도, 적어도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도 자식 교육 문제, 의료문제, 기본적인 주거 문제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같이 공동으로 같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같이 해결한 다음에 그 다음에 경쟁을 하든 뭐든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만이 '오늘을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것' 이
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점점 신자유주의 아래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오늘을 저당 잡히고 있습니다. 오늘의
내가 없는데 오늘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팍팍한 우리의 사회를 누구나 보면 웃을 수 있고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공성에 토대를 둔 연대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칸트가 말한 목적의 관계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그 유명한 칸트의 명제가 아닙니까?
'사람은 위하는 존재이지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다.' 목적론적 인간론이라는 칸트의 유명한 명제인데 우리에게는 서로 위하는 관계가 없
습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위하는 관계'는 있습니다. 그렇죠. 아주 핵가족 관계에서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만 통합니다. 아이가 크면
망가집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만 핵가족 단위에서 이루어질 뿐 그것만 벗어나면 모두가 경쟁하고 착취하고 이용하는 관계입니다.
교육을 담당하는 정부 부서를 교육인적자원부라고 하죠. 참담합니다. 교육 대상인 학생들은 전부 인적 자원으로 보는 거죠. 사회 구성
원을 목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수단입니다. 그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말입니다.
인간 관계를 목적으로 보는 것이 오로지 핵가족 단위의 가족 관계밖에 없기 때문에 한국의 가족 이기주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 새끼밖에 없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알토란 같은 내 새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 확대된 것이었는데 요
즘은 텔레비젼 화면이나 광고를 보더라도 철저하게 알토란 같은 내 새끼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알토란 같은 아이들이 크면
모두 배반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목적이라는 것이 없는 사회와 교육비를 같이 대 주는 사회의 사회 분위기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안 아프려고 하고 되도록이면 견디어 내려고 하고 어지간해서는 병원에 안 가려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의사가 틱틱
대요. 돈 받으면서 틱틱대요. 전혀 친절하지 않아요. 돈 받으면서 불친절합니다. 이게 바로 그렇게 한국 사회에서 의식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의사가 되려면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해 의과대학에 들어가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의과대학에 가려고 하는
데 일단 받아는 줍니다.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얽힌 이야기인데요, 우리나라와 다른 '제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의과대
학에 들어가도 2학년 올라가면서 90%가 떨어집니다. 2학년 올라가는 비율이 10% 정도됩니다. 이것으로 조정을 하는 거죠. 의대에 들
어가겠다는 학생의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의 합격률은 80% 정도 됩니다. 어지간하면 다 대학에 갑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처럼 공부 안 하
는데 1학년 지났으니까 2학년이고 그 다음에 3학년이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의과대학 다음으로 경영대학도 많
이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2학년은 대충 30%정도밖에 못 올라갑니다. 그래서 국립대학생이 1, 2학년 과정을 2년 안에 마치는 비율이
25~30%입니다. 대부분은 가차없이 낙제예요. 3년 동안에 2년 과정을 마치지 못하면 퇴학입니다. 60% 가량이 퇴학을 당합니다. 그들
이 대학에서 공부 안 하고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대학에 남아 있을려면 공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니 경쟁력에 있어서 한국의
대학생은 프랑스의 대학생과 절대로 상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잘 아시겠지만 대학의 실제 존재 이유하고 지금
대학생들의 모습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대학의 실제 존재 이념은 학문 연구인데 지금의 대학은 뭐냐 하면 취업 준비 기관입니다. 대학
의 경쟁력이란 학문의 경쟁력인데 어디서 무슨 놈의 경쟁력이 나오겠습니까? 한국의 대학생도 치열하게 공부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알
고 보면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아이들에게 취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년 수료했느냐' 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에서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미 결판이 다 납니다. 거의 순위가 결판이 나죠. 대학에 들어가서 그 순위만 대충 지키고 고시 공부나 하는
것이지 학문을 제대로 합니까? 프랑스는 똑같이 대학 들어가서 몇 년을 수료했냐, 2년이냐 4년이냐 하는 것이죠. 한국에서는 어느 대
학이냐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때까지 모든 평가가 절대 평가입니다. 석차가 없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한국의 교육 과정에서 등급을 매기는
것을 보면 경악을 합니다. 어떻게 미성년자에게 등급을 매기냐는 거죠. 프랑스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
가면 공부해야 합니다. 무서운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 철저하게 등수로 따집니다. 우리하고는 정 반대죠. 기준점이 내 자신이 아니라 주
위 사람들보다 나은가 못한가로 따집니다. 자기 성숙보다 주변 사람과 비교해서 살아나가는 겁니다.
물론 프랑스도 대학이 다 평준화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에도 그랑제꼴(큰학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대학교와는 다릅니
다. 프랑스의 특수한 부문별 전문인 양성 학교입니다. 1794년에 고등사범학교가 생겼는데요. 사르트르, 시몬느 드 보봐르, 미셀 푸코
들을 낸 학교입니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시대가 바뀌었다. 그럼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의식을 바꾸려면 교사가 필요하다"
고 해서 만든 학교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때 '종합기술학교'가 만들어집니다. 이공계의 엔지니어들을 양성하는 학교입니다. 나폴레옹은 부국강병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게 두 계층인데 하나는 자질 있는 군인이고 다른 하나는 엔지니어라고 보았습니다. 수학 잘하는 군인
을 양성하고 엔지니어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학교 학생들은 제복을 입습니다.
1950년대에 국립행정학교, 상업학교 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지극히 소규모입니다. 한 학년에 50명에서 60명 정도입니다.
아주 집중된 엘리트 코스입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견제가 이루어집니다. 좌우로 갈리기 때문이죠. 숫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패거리
를 지어 보았자 큰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 학교에서는 학위가 없습니다. 학문 학교가 아니라 권력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권력 학교에서는 학위를 줄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다 해 먹잖아요. 그러나 프랑스의 엘리트 학교인 그랑제꼴은 소규모이고 자기들끼리 좌파, 우파로 견제가 이루어지고, 학위도 없기 때문에 학문적 세계에서도 견제도 받습니다. 그럼에도 1981년사회당이 집권했을 때 그랑제꼴을 없애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엘리트로서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해 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에 유지되었습니다.
어떤 사회든 엘리트층이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단 엘리트층이 사회적 책임 의식이 있고 능력이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은 사회적 책임 의식도 없고 능력도 없기 때문에 패거리를 짓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무식해요, 정말 무식해요. 왜? 공
부를 안 했으니까요. 공부를 언제 했나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공부했나요? 일생에 딱 두 번 공부합니다. 대학 입시 때 한 번, 취직하
려고 한 번. 그것말고는 뭘 공부 했나요? 공부한 게 없는데 무식한 것은 당연하죠.
소위 자기가 엘리트층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 지위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실은 절대 다수가 무식합니다. 공부를 안 했으니까 내용이 없
습니다. 그러니 무엇으로 자기의 위치를 계속 유지시키고 관철시키겠습니까? 각종 연이죠, 학벌이나 지역 뭐 이런 거죠.
서울대는 60년 동안 이 땅에서 머리 좋다는 놈 다 긁어모았습니다. 서울대의 경쟁력은 국내 경쟁력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 속의 경쟁력
이지 어디에 내놓을 수가 있습니까? 국외로는 내놓을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가끔 세계 100대 대학 이런 것 발표할 때 거기 근처에도
못 낍니다. 철저하게 국내 경쟁력에 내몰려 있는 것입니다. 학문의 경쟁력도 없는데 국내에서 아이들을 그렇게 억압시켜 가지고 뭐 하
려고 하는 겁니까? 아이들이 사람인가요? 사람 대접을 하나요? 끊임없이 억압시키지만 제대로 된 경쟁력도 나오지 않고, 사회는 피폐
해지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억압받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억압받을 때 학대받는 것이 내면화되면 남을 학대할 때 느끼지 못합니다.
이미 자기가 학대받았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 내가 남을 학대하고 있다고는 생각 못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무상교육이라든지, 대학 평준화 문제는 정말 우리의 교육 문제와 관
련하여 대단히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 있을 겁니다. 왜 그들은 대학까지 무상교육이 이
루어진 지 벌써 60년이나 되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냐? 왜 프랑스가 국민소득이 6000달러 수준일 때 한 것을 우리는 지금 못하고 있냐?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다
프랑스는 공공성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고, 우리는 이런 인식이 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리퍼블릭(republic)입니다. 공화국입니다. 우리가 왜 공화국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공화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나 다른 나라도
포함된 인류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우리도 영향을 받은 것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공교육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을 형성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건 기본적인 원칙의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
국이 공교육은 가장 먼저 사회 구성원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공화국의 의미를 아십니까? 공화국의 구성원인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 공화국이 무엇인가요? 자기 정체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공화국의 구성원인 여러분에게 공화국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볼 때 무엇이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공화국의 구성원이십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는 서로를 민주공화국의 공민으로서 만나는 관계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
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했을 때 대한민국은 나라 이름입니다. 국호입니다. 민주공화국 이것은 나라의 정체성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서 만나는 관계라 할 때 민주공화국
구성원으로서 공유해야 될 가치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나마 독재 때문에 독재
를 극복해야 하니까 민주화운동을 했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점차적으로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공
화국에 대해서는 토론한 적이 없죠. 왜냐면 공화국은 이미 이루었다라고 본 거죠. 알고 있기를 오로지 하나, 군주국의 대안이다. 공화
국은 군주국이 아니다 하는 정도입니다. 왜 수천 년 동안 지속된 군주국을 끝내야 되었습니까? 왜 군주국이면 왜 안 됩니까? 공화국은
말에서 담고 있듯이 공개념입니다. 공익성, 공공성의 문제이고 즉 공적인 일이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인 공화국은 사적인 일의 반대입
니다. 즉 공익성, 공공성이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요구하는 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의 공공성, 의료의 공공성에 의한 무상교육의 확
충이나 무상의료의 확충은 좌파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공화국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유럽 사회에서 무상 의료, 무상교육이 확충되어 가는 것은 좌파의 요구 이전에 공화국주의의 요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전혀 공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니까 공공성(공공적 가치)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실종되어 '교육의 공공성, 의료의 공공성을 요구
하면 빨갱이다' 하는 말조차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참담한 현실은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인데 공화국이라는 말 앞에 그럴듯한 말을 많이 붙여요. 기자들 짓이죠. 정말 참담한
일인데요. 도박 공화국, 부패 공화국이라는 말조차 씁니다. 공화국이 담고 있는 말이 공익성이라는 의미인데 어떻게 삼성 공화국이라는
제목을 부칠 수 있습니까? 결국 공화국이 품고 있는 의미가 한국 사회에서는 그 근본에서부터 실종되고 있다는 것이죠. 공화국의 이념
을 우리가 모두 같이 공유한다면 무상교육, 무상 의료가 너무나 당연한 나라의 정책상의 요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을 텐데요. 유럽
사회에서 무상교육, 무상 의료가 이루어진 것은 공화주의의 가치가 관철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완벽하게 배반당하고 있습니다.
무상교육, 무상 의료를 이야기하면 그냥 빨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저를 답답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면서 분노를 느끼게
하는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지 마라
민주노동당에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아주 노골적이었죠. "부자에게는 세금을, 서민에게는 복지를", 20에게는 당신은 세금 좀 내, 그것으
로 80 복지 좀 이루자, 이것 아닙니까? 대학 등록금 비싸고 참 괴롭습니다. 서민들 봉급 수준에 비춰 봤을 때 대학 등록금 엄청나죠. 또
서민들의 경우는 집안에 큰 병이나 날라치면 집안이 풍비박산 나죠. 그러면 자기의 처지에 비춰 볼 때 무상교육, 무상 의료 또 서민에게
복지를 부자에게는 세금을 그런 얘기가 나오면 귀가 솔깃해야 될 것 아닙니까? 관심 있게 듣고 가서 찍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죽
어라고 안 찍어요. 그 없는 돈에 돈 다 내 가면서 가족이 병들었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도 치료비 다 내 가면서.
자식 교육 안 시킬 수 있나요? 자식에게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돼" 그러면서 없는 돈에 사교육비 들여 가면서 그렇게 다 교육비 내 가면
서 아무리 무상교육, 무상 의료 이야기를 해도 찍지 않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내가 20에 속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가요? 물론 그 부분도 무시할 순 없죠. 그러나 그것보다는 80에 속
하는 사람의 의식을 누가 통제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20을 포함한 이 모든 사람의 의식을 누가 통제하느냐? 어렸을 때부터 그 의식을
누가 형성하느냐? 무엇에 의하여 형성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서죠. 그 교육 제도, 교육 내용, 교장 선출, 교사 임용,
학생 선발권 같은 교육의 모든 것을 누가 장악하고 있나요? 80이 갖고 있나요? 어림도 없지요. 20이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교육 과정은 교육을 통하여 지배 체제가 요구하는 의식을 갖도록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교육과정을 장악한 것은 민
중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서 계층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평등한 구조를 어느 정도 좀 받아들
이고, 나아가서 80에 속하지만 지금 내 자식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조금만 열심히 하면 SKY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카이 아
시죠? 결국 내 자식이 지금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공부만 열심히 하면 '하늘'에 간다. 그래서 계층 상승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럴려면
불평등이 있어야 좋은 거죠. 어쩌다 80의 일부가 20 쪽으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80에 있다가 20에 간 사람들도 절대로 자기
출신 계층의 또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와도 용은 개천을 절대 대변하지 않습니다. 그럼 해결책
은 80에 속한 사람이 깨어냐야 합니다. 이 국가 권력에 의하여 형성한 의식을 지워야 합니다. 적어도 자기 처지에 맞는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요즘 남미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이야기할 때에 참 부럽습니다. 하나의 예만 들겠습니다. 남미는 대농장주에 의한 대토지 소유자가
있고, 거기에서 품삯을 받고 일하는 농업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작농과는 개념이 좀 다르죠. 우리의 소작농은 소출 중에서 일
정 정도를 지주에게 바치지만 거기서는 품삯을 받고 일합니다. 소작농이든, 농장 노동자이든, 플랜테이션에 속한 농업 노동자이든 땅이
없는 설움을 받고 있는 점에서는 똑같죠. 땅 없는 설움을 받고 있는 농업 노동자에게 차베스나 모랄레스가 접근해서 하는 이야기는 간
단했습니다. 아주 솔직해요. "나에게 표를 주세요." 옛날에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 게 새집 다오"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표를 다오,
땅을 줄 게. 너무 솔직한 거죠. 대대로 땅 없는 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에게 표만 달라. 내가 대통령 되면 땅을 주겠다. 그러니
까 땅 없는 설움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표를 안 줄 이유가 있겠어요? 그들의 처지에서는 당연히 표를 주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니까 20명 단위로 협동조합을 만듭니다. 땅만 주는 것이 아니라 트렉터까지 줬습니다. 그게 정치죠.
그것하고 똑같은 구도예요. 말하자면 베네수엘라의 농업 노동자나 볼리비아의 농업 노동자들은 모랄레스나 차베스가 그런 얘기할
때 자기 처지에 맞게 표를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얘기하면, 자기 처지에서 요구하는 건데 "어 이거 무서운 사람들
이네" 하고 생각합니다. 80에 속한 여러분이지만 제가 장담하건대 여러분의 의식은 20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언로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옛날에 지배 세력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었고, 문자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을 장악했습니다. 문자
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생각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죠. 옛날에는 양반들이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양반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육을 장악했을 때 그것이 곧 사람의 의식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회운동이
건, 노동운동이든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입니다. 내 의식을 적어도 나의 처지에 맞게, 나를 배반하지 않는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연 지금까지 의식 형성에 있어서 민중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작은책>과 같은 정말 작은책이지만 이런
조직, 이런 움직임, 이런 운동들이 갖고 있는 함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작은책>은 바로 80의 목소리입니다. 그 어떤 것이 80의
목소리에 속합니까?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온통 지금까지 들어왔던 모든 소리들, 모든 교육 과정들, 모든 매체들, 우리의 의
식에 접해 들어오는 것들은 거의 모든 것은 20의 목소리였죠.
바로 그런 면에서 이제 글과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전부터 그랬습니다만, 미
국이 힘이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미국이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노골적인 것이죠. 핵무기를 비롯해서 엄청난 파괴력을 갖
고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다음에 돈입니다. 화폐, 이것이 힘입니다. 여기에 돈과 무기
를 가지고 있는 자본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들에게 복무하는 절대 다수의 글쟁이들, 절대다수의 대학 교수들, 절대 다수의 율사
들, 이들이 여기에 빌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로지 글과 말로 대항하고 있는 거죠. 저는 존경하는 사람이 사
회적 약자에 편에 선, 무기도 갖지 않고, 화폐도 갖지 않고 글과 말로 저항해 온 사람들 모두를 존경합니다. 가깝게는 리영희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오로지 글과 말로 대항하는 우리는 너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 형성한 의식을 고집합니다. 자기 의식을 고집합니다. 자기
를 배반하는 의식인데도 고집합니다. 교육 과정에서 어떤 의식 과정을 형성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육 과정에 어떻게 민
주주의가 담길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이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프랑스의 교육 과정을 보면, 가령 초등학교 5학년에서는 노동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그것이 갑자기 이루어졌겠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끝없는 교육 운동, 사회 운동을 통해서 획득한 겁니다.
중학교 때는 교육 과정에서 모의 노사 교섭 수업을 합니다. 노동3권, 노동운동의 역사, 예를 들면 얼마전 메이데이가 지나갔습니다만
메이데이가 도대체 어떤 날이냐? 이런 것을 가르칩니다. 고등학교 1학년 시민교육 시간에 토론 주제로 내 준 주제가 노동조합이 민주
주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이게 고등학교 1학년생에게 제시된 토론 주제입니다. 이런 토론이 이루어지는 교육 과정을 겪은 사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회적 의식에 차이가 많을 겁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최초고용계약법을 만들어 상하원에서 통과되었을 때 고등학교,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겁니다. 완전히 무산시켰
죠. 최초고용계약법 이것이 무엇이냐면 "26세 미만 사람들을 최초로 고용할 때 2년 기간 동안의 계약 기간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계약
기간중 어느 때나 해고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노동의 유연성을 도입하려 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프랑스 사회가 일찍부터 노동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는가? 어림 없는 소리입니다. 이것이 프랑스 아이들이 노동운동의 역사를
통해 알게 되는 내용입니다. 1830년대 리용 지역의 견직 노동자들이 하루에 몇 시간 일을 했냐면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18시간 일
을 했습니다. 상상할 수 있나요? 어떻게 살아요? 이들이 집단으로 당연히 폭동을 일으킵니다. 잔인하게 진압했죠. 그러나 그들은 투쟁
을 통하여 14시간 노동시간을 확보합니다. 이것이 노동운동의 역사예요. 프랑스 아이들이 이 흐름을 통하여 무엇을 알게 되겠습니까?
우선 첫째, 도대체 아무리 자본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18시간을 일을 시킬 수가 있냐라는 비인격적이고 무자비한 자본의 성격을 알게
되는 거죠. 따라서 이 자본을 인간의 얼굴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싸우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노
동자가 될 사람들이기에 노동자가 어떤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배우는 거죠. 프랑스에서 초등학생도 이런 것을 교육 과
정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지극히 일반적으로 말이죠.
노동자가 될 아이들에게 노동자가 어떤 역사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 교육 과정을 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닙니
까? 얼마 전에 <한겨레21>에 났는데요, 새로 만든 경제 교과서가 이제 곧 학교에 쫙 퍼져 나가는데요, 이 경제 교과서를 누가 만들었냐
면 교육인적자원부하고 전경련이 만들었습니다.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당연히 두말할 것도 없이 노조가 만들어지면 생산성이 떨어지
고 국가 경쟁력이 뒤쳐질 것이다, 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지 않겠습니까?
탈의식화
우리가 이런 의식을 주입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그런 면에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인들에게 필요한
것 은 의식화가 아니에요. 80년대 90년대 의식화라고 이야기했지만 절대로 그런 것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탈의식화입
니다. 즉 지배의식과 방송 매체를 통해서 형성된 의식을 벗어내야 합니다. 80은 20이 장악한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중동 의식
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느 정도 벗겨낸 분도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가지게 되
셨나요? 교육 과정을 통하여 가지게 되었나요?
우리 딸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동생에게 자신은 사민주의자다라고 했습니다. 2년 이후에 동생이 자기가 중학교 4학년 때 누나가 고3 때
였는데 말싸움이 붙었어요. 누나는 계량주의자다라고.... 중학교 4학년짜리가 이런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또 그런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프랑스의 교육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죠. 한국에서 사민주의자가 교육 과정에서 형성되나요? 어림도 없죠. 특별한 어떤 계기가 있
었겠죠. 어, 이건 아닌가 봐. 그리고는 그 의식을 벗겨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비판 의식이나 역사 의식은 지배 세력에 대해 의식화된 것을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두 가지입니다. 하
나는 선배를 '잘못' 만나는 경우고 또 하나는 책을 '잘못' 만나는 경우입니다.(웃음) 무기도 없고 돈도 없이 오로지 글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80의 이익을 대변하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작은책>이 하고자 하는 것도 여기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의식화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탈의식화입니다. 꼭 선배가 있어야 합니다. 선후배라는 특수한 인격적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귀 기울
인 거예요. 아니면 절대로 귀 안 기울여요. 선배도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한테 현재 교육 과정에
서는 잘못된 의식을 장기간에 걸쳐 그냥 꾸역꾸역 집어 넣습니다. 사람은 다 자기 의식을 고집합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스피노자의
말입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고집 부리는 것은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설득하려면 정말 성실해야 합니다. 정말 집요해야 돼요.
절대로 포기하면 안 돼요. 어차피 다 우리는 피해자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내 이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추석 때 사촌을 만나
도 어렵습니다. 저도 안 통하는데, 여러분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말 주변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도 포기하면 안 돼요.
포기하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정말 성실해야 돼요. 성실한 만큼 정말 집요해야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합니다. 이게 제 나름대로 탈의식에 담겨 있는 의
미를 말씀드린 겁니다. 교육 과정에 민주화는 정말 중요합니다.
학부모들도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정말 자식이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의 지향인가하는 지점
에서 학부모도 학생도, 교사도 바뀌어야 합니다. 제도를 제대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려운 주문일 수는 있
지만 나부터 주위 사람들 친척, 친구들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교육 과정을 온통 지배 세력이 장악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민주
적 통제로 갈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학교를 예를 들면, 학교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선언적으로 학부모, 교사, 학생이 주인입니다.
그러나 실제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장, 이사장입니다. 바로 이 문제입니다. 사학법 개정만 놓고 보면 그들이 훨씬 집요합니다. 왜냐면
광신자들이 집요하듯이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일수록 열성을 부립니다. 그래서 공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정말로 열성을 부려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왜 학교 구조가 그렇게 생겼을까? 내 자식이 다니는 학교의 구조에 대해 우리는 질문조차 던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제 때 정형화시킨
학교 구조를 왜 우리는 유지시키고 있습니까? 일제 때 그들의 목적에 맞게 만든 학교는 군사학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여러분이 다
닌 학교를 되돌아 보십시오. 교문 들어가면 옆에 수위실이 있습니다. 위병소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운동장이 있습니다. 연병장입니
다. 그리고 운동장과 교실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구령대가 있습니다. 사열대입니다. 정확하게 군사학교입니다. 일제 때 그들의 목
적에 맞는 학교는 군사학교였던 거지요. 사회적으로 민주화되면 학교 구조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학교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코흘리개들이 학교 가서 제일 먼저 앞으로나란히부터 타율적 질서 의식을 배웁니다. 기존 체제의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케 하는 이런 교육 과정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연구를 통해 어떻게 민주화시킬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상성을 가진 노동자 의식
우리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노동자 의식이 없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반만 진실입니다. 오히려 반 노동자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론
과 교육과정을 통해 의식적으로 반 노동자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교조 선생님들이 '우리는 노동자다' 하면서 노동자 의
식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지극히 의식적인 노동자 의식입니다. 일상성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 의식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이 물건을 살 때 가격을 보고, 품질을 보지만 그 물건을 만든 노동자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삼성이 무노조 정책을 관철하고 있
는데 그것이 삼성만의 잘못입니까? 어림 없는 소리입니다. 노동자들이 노동자 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
니다. 어떻게 노동자들이 물건을 살 때 무노조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삼성 물건을 살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다른 제품보다 품질이 좋
고 싸다고 하더라도 삼성 물건은 안 산다고 하면 삼성도 두 손 듭니다. 노동자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무슨 노동자 수련대회나 하
고 단협준비할 때나 '임을 위한 행진곡', '철의 노동자'를 부를 때나 노동자 의식을 갖지, 일상으로 돌아가면 노동자 의식이 있습니까?
제가 제기하고 싶은 것이 이 문제입니다. 프랑스의 노동자는 그래도 일상성이 있습니다. 정말 깨어났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작은책>에서 마련한 좀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소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갖게 되어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 홍세화 : 2007년 <한겨레> 기획위원, <학벌없는 사회> 공동대표, 월간<작은책> 편집위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
_ 박준성, 안건모, 이임하, 홍세화, 정태인, 하종강의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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