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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없는 신앙_ 윤재윤

정정진 2009. 11. 6. 22:51

 

날개 없는 신앙

 

40대 부인이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남편은 기업체 간부고 자녀 둘을 둔 단란한 가정인데 종교가 갈등의 주원인이었다.

부인은 남편이 자신을 교회에 못 나가게 폭행했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부인이 '교회에 미쳐서' 아이들을 팽개쳐 둔 채 가사도 돌보지

않고 많은 돈을 헌금하여 부부 싸움이 심해졌다고 했다. 부인은 여전도회 임원으로 교회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온갖 일을 도맡았다.

부인은 "부모, 자식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나의 제자." 라는 예수의 말씀을 내세우며 가정보다 예수를 택하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의 뜻일까?

 

같은 교단의 목사끼리 맞고소한 명예 훼손 재판을 한 적이 있다. 십 년 전 일까지 들춰내 상대방을 헐뜯는 모습이 딱해 보였다. 양쪽

당사자를 대질 신문할 때는 방청석에서 신도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아멘', '주여' 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도 이 광경을

보면 참 딱하게 여기실 것 같았다. 술 한잔 먹고 화해할 만한 사건인데도 그들은 시시콜콜한 일을 다투며 대화조차 할 마음이 없었다.

 

법정에서 만난 종교인 대부분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완고한 모습을 보였고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막무가내로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종교인이 관여된 소송사건을 심리하기가 훨씬 어렵고, 화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경직되고

편협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인도할 수 있을까? 종교인이라는 신분이 인간성을 억압하는 굴레가 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도 참신앙을 가진 친구가 몇 명 있다. 나는 그들을 곁에 둔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긴다.

한 친구는 몇 년 전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오랜 고투 끝에 불교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실존적 위기가

닥치자 추상적이던 믿음이 참믿음이 되었다고 했다. 전에는 심하게 불안해하던 사람이 놀라울 정도로 소박하고 평화스러워졌다. 그를

만나면 항상 지혜와 평안을 얻는 기분이다. 대학 동창인 다른 친구는 항상 온화하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정성스럽다. 그는 젊은 시절

공황 장애를 앓았는데 우연히 교회에 나가면서 놀라운 평화를 체험했고, 신앙생활에 정진해 왔다. 같은 신앙을 가진 나도 그를 스승으

로 여기며 배운다. 그는 상대에게 깊은 위로와 힘을 주는 감화력을 지녔다.

 

신앙이란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을 초월하여 절대자와 진리 또는 법이 존재하는 것을 믿으며 이에 따라 자기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

다. 진리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배우고, 그 가르침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참신앙의 삶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자아에 대한 관심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적다. 자기의 안락, 이익, 명예에 대한 욕심도

적은 반면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필요에 대해서는 훨씬 민감해 기꺼이 남을 돕는다. 말 대신,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자신이 누리는 기쁨

과 평화를 보여 준다. 삶에 영원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평안하다.

 

반면 껍데기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말이 앞서고, 삶에서 기쁨과 평화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근본 체질이 변화되지 않은 것이다. 자기 이

익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므로 항상 자아가 중심이 되어 죽는 법이 없다.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지, 진리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단이 없다. 이런 사람일수록 종교적 독선에 빠져 교리를 내세우고 타인을 비판한다. 잘못된 신앙은 무종교보다 더 해롭다.

 

이처럼 신앙은 삶에 자유를 주는 날개가 될 수도, 메마르고 황폐케 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신앙이 어느 쪽인지 아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신에 대한 관심(욕심)이 줄었는지, 타인에 대한 관심(사랑)이 늘었는지, 사는 맛이 새로워졌는지(의미) 살피면 된다.

성공과 행복은 진리에 따라 사는 삶의 결과이지,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신이 원하는 것은 외적으로 성공한 삶이 아니라, 자유롭고

새롭게 변화된 삶이다. 날아오르지 못하는 삶, 날개 없는 신앙은 참된 것이 아니다.

 

 

윤재윤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이며 198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비행청소년과 시민을 연결하여 보호하는

          '소년자원보호자제도'를 만들었으며 <법원사>(대법원 발간) 편찬 책임을 맡았습니다.

 

- 좋은 생각 <2009년 9월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