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인들이 건넨 총·화약 사슴부족 미래 앗아간다
서울신문
2009-11-23 13:34:01
[서울신문]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득이 된다고 받아들인 일이 오히려 칼이 돼 돌아오는 경우. 캐나다 북쪽에 사는 이누이트(에스키모)의 한 부족인 '사슴부족(People of the Deer)'은 그 돌아온 칼이 행·불행을 넘어 삶의 근간까지 뒤흔들어 버린 경우다. 사슴부족이 좀 더 안락한 생활을 위해 받아들인 백인의 문명은 파괴적인 방향으로 그들의 삶을 잠식했으며, 10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수천명에 달하던 이할미우트(사슴부족의 하나)를 고작 40명만 남기는 참극을 초래했다.
'잊혀진 미래'(팔리 모왓 지음, 장석봉 옮김, 달팽이 펴냄)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이할미우트는 수렵이 거의 유일한 생활방식이다. 이들의 주된 사냥감은 북쪽 툰드라 지방을 무리 지어 이동하는 사슴. 사슴의 고기는 식량으로, 털가죽은 옷으로, 지방은 기름으로, 이할미우트 사람들의 의식주는 사슴이 없으면 불가능할 정도다. 생활과 뗄 수 없기에 이들의 언어는 사슴을 지칭하는 낱말도 수십 개를 가지고 있다.
이할미우트의 숙련된 사냥꾼들은 활을 사용해 필요한 만큼만 사슴을 잡았다. 하지만 20세기 초 이야기는 달라졌다. 이곳에 발을 들인 백인 교역자들은 이할미우트 사람들에게 총과 화약이란 파괴적인 문명의 이기를 전했다. 사슴의 혀와 가죽을 모두 사들이겠다는 밀어와 함께. 총과 화약의 힘에 사슴들은 '학살'되기 시작했다. 고기가 식량이 되지도 못한 죽은 사슴들은 혀가 잘리고 가죽이 벗겨진 채 빈터에 가득 쌓였다. 백인 교역자들은 더 성능 좋은 총과 총탄을 전했고, 학살은 가속도가 붙었다. 문명의 배신이었고, 처참한 미래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잊혀진 미래'는 캐나다 작가 팔리 모왓이 1947년부터 2년에 걸쳐 보고 들은 생생한 이누이트 보고서다. '사슴부족 이누이트들과 함께한 나날들'이란 부제가 말하듯 당시 25살이던 모왓은 직접 툰드라 지역으로 스며들어 이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각하는 생활을 했다.
사슴부족이 살던 곳은 당시만 해도 캐나다 정부에서 발행한 지도에서조차 '지도 미완성 지역'으로 표기돼 있던 오지였다. 열다섯에 처음 북극을 보고 '북극 열병'에 걸렸다는 모왓은 단지 250㎏가량의 식량만을 싣고 이곳으로 들어간다.
'다른 별의 마법이 아니고서는 이방인이 도착하지 않는 곳'에 들어간 이방인 모왓의 생존기는 눈물겹다. 마음에는 두려움을, 손에는 소총을 지닌 채 이 이상한 이방인을 맞이하던 사슴부족의 남자 '프란츠'. 처음 만난 사슴부족인 그와 모왓을 이어준 건 참 인간적이게도 바로 술이다. 술을 마신 프란츠는 처음 본 이방인에게 옛 이야기와 자신들의 생활에 대해 풀어내고 둘은 친구가 된다.
프란츠를 통해 40명 남짓한 이할미우트 부족 사람들을 알게 된 모왓은 이들과 함께 개썰매를 타고 다니고 같이 사슴을 잡는다. 마치 필드워크를 나온 인류학자처럼 모왓은 결코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이 생활 속에서 사슴부족의 언어와 노래를 배우고, 금기와 의식·영적 세계를 알아 간다.
하지만 책은 박물학자나 인류학자의 시선과는 다르게, 또 철저히 타자의 시선을 배제한 채 쓰려고 했다. 450쪽에 달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얘기를 모왓은 보고 듣고 생활한 그대로 써내려 간다. 반면 그 노력과는 별개로 '왜 당신네 백인은 한 번 머물고 나서는 우리가 당신들의 도움이 가장 절실히 필요할 때에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이냐.'는 오호토라는 젊은 남자의 물음처럼 모왓의 시도는 곳곳에서 암초를 만나기도 한다.
책은 1951년 캐나다에서 처음 출간된 이래 40개국 이상에서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출간되며 전 세계에 이누이트의 현실을 알렸다. 곳곳에 이누이트인들을 그린 삽화와 모왓이 직접 촬영한 사진이 들어 있다. 소설 같은 유려한 문체와 내러티브를 가지고 펼쳐지는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1만 50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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