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마음과 생명공동체
제가 오늘 제목에서 그냥 '시'라고 하지 않고 '시의 마음'이라고 한 것은, 지금 중요한 것은 문학형식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시적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이것을 말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실제로 시작품을 읽거나 쓰거나 하는 일과 관계
없이 시적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 누구나가 소유하고 있는 근원적 심성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언젠가 미국노동사를 읽다가 재미있는 얘
기를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노동사에서 19세기 말이면 탄압이 극심하던 때였는데요. 기아임금을 받던 이 무렵 보스턴 근교의 어떤
공장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그 시절의 미국노동자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노동쟁의가 얼마나 혹독하게 규제되고
있던가는 지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바로 그런 시절인데, 이번에는 임금투쟁도 아닌 아주 특이한 색다른 이유로 파업이 단행되었고 그 때문에 미국노동문화사에 중요하게
기록된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때 공장의 마당의 한 그루 오래된 느릅나무가 있었는데 이것을 공장 증축을 이유로 기업주가 배어
버리려고 하는 것을 노동자들이 반대하여 파업을 결행하면서까지 그 나무를 지키려고 한 겁니다. 이 사건은 노동자들은 밥만 해결해주
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때 파업을 했던 노동자들 자신은 그들이 그 느릅나무를 지키려고 했던 이유를,
우리는 저 나무를 볼 때마다 우리들이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라는 말로써 밝혔습니다. 제가 시적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이러한 노동자들의 말 속에 담겨있는 마음이 아닐까요?
사람이 생리적 순환만 원활히 하면 인간문제는 대체로 해결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산업문화의 지배적인 가정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의
크기를 최대한으로 하려거나 그것을 고르게 나누고자 하는 일이 그동안의 근대사회 발전과정에서 집중적인 과제로 인식되어왔던 것입
니다. 그러나 보스턴근처 노동자들이 대탄압 속에서 관철시키고자 했던 저 정신적, 철학적 요구야말로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면
서 인간생존에 불가결한 요소를 구성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없고, 억누
를 수도 없는 근원적인 욕구라고 생각됩니다.
나무 한 그루가 상처를 입으면 자기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고통을 같이하는 감수성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 서울의 방학동에서 오래
묵은 은행나무를 지키기 위하여 단식투쟁도 한 사람이 있지만, 그런 사람의 마음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위대한 시인들의 마음이 대개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위대한이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일반적으로 좋은 시에서 우리가 느끼
는 마음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시적 사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생명을 하나로 보는 사고방식이거든요.
우리는 시의 사고는 주로 은유적 사고에 의존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까 어느 노시인께서 낭독하신 시 구절 가운데, 늙은 호박
이 다리 밑에서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노경에 접어든 시인의 감정이 무엇인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늙은 호박이라는 하나의 사물은 흔히 하는 말로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대의 관계로 포착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상호의존의 빈틈없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두 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고,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만물은 형제라는 관점이야말로 모든 시적 은유의 근거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상호 이질적인 사물들 사이에 유사성이나 일치성을 발견하는 능력이 은유적 사고라고 한다면, 은유라는 것은 원래 만물을 하나로, 형제
로 보는 마술적 사고 혹은 신비적 직관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신라 향가 중에 <제망매가>를 보면,
죽은 누이를 추모하면서, 한 가지에 난 두 개의 잎사귀로서 남매간의 관계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럴듯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향가를 지은 시인의 직관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시적 비유를 다분히 형식적인 것으로 보는 습관에 젖어있지만, 그것은 사물들간의
내재적 친연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마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성립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언젠가 김범부 선생이 쓰신 음양론이라는 글에서 재미있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영국 철학자 러셀이 만년에 평화운동에 헌신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러셀이 북국의 빙하를 녹여서 인류의 산업복지를 위해 이용하자는 제의를 한 적이 있다는군요. 저는 금
시초문이지만, 하여튼 러셀의 그와 같은 제의를 두고 김범부 선생은 그것이 얼마나 우매한 생각인가를 지적합니다. 즉, 지구의 북극에
두텁게 얼음이 덮여있는 것은 범부 선생의 말로는 '태양계의 약속' 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바로 오랜 세월 동안 시인
들이 늘 보여준 은유적 사고의 바탕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다못해 가을날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기 위해서도 온 우주의 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조화와 균형 속에 하나로 맺어져 있다는 생각이 여기에 들어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시적 감수성의
본질이고, 시의 마음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견 다른 존재, 다른 생명으로 보이는 것들이 결코 나와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 내 생명의 일부라고 보고, 시인은 생명에 가해지는 상해에 마음 아파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메리카 인디언은 모두가 시인이라고 할 만합니다. 인디언의 문화는 어떤 의미에서 거의 완전히 시적 은유체계
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요. 인디언의 언어습관에 따르면, 예를 들어 자기 자식이 아프면 자기가 아프다라는 뜻으로
말을 한다고 해요. 우리는 동양사람들이고 그래서 서양문화에 있어서보다는 훨씬 비폭력적인 토착문화전통을 누려왔지만, 그런 우리들
에게도 내 자식이 아플때 그것을 자기자신의 아픔으로 표현하는 습관은 없거든요. 그런데 영어로 번역된 인디언의 말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디언은 이런 경우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내 아들에 관계해서 내가 아프다 - 이렇게 말한답니다. 그러니까 아픈 것은 어디
까지나 자기이고, 참조사항은 자기 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지난번 인기를 끈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도 잠시 엿볼 수 있었지만, 인디언은 짐승을 죽일 때 결코 불필요하게 남획하지 않는다고 합
니다. 버팔로 같은 것을 사냥하게 될 때 그들은 반드시 제사를 지냅니다. 버팔로의 영혼이 인간의 영혼과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
습니다. 인디언들은 사냥한 버팔로의 살을 먹는 사람에게는 바로 버팔로의 영혼이 들어온다는 믿음을 갖고 있고, 먹는 행위를 통해 버
팔로와 인간이 일체화된다는 경험을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백인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는 잔인한 사냥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적으로는 이와 같은 자연관, 우주관, 생명관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디언 문화는 여러모로 참으로 흥미로운 게 많은 것 같아요. 평원 인디언의 어떤 부족의 풍습에는 말이지요. 집을 지을 때 집도 생명체
니까 뿌리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집터의 바닥에 선인장 몇 뿌리를 반드시 먼저 파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집이라
는 것을 단순히 사람이 거처하는 물리적인 공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니 인디언들이 거대한 콘크리트로 빌딩을 세우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들이 과학 기술의 빈곤으로 빌딩을 세우지 못하고, 거대한 도시문화를 건설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사물의 핵
심을 놓치는 관점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어떠한 반생명적인 테크놀로지나 문명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세계관과 감수성에 깊이 뿌
리를 내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인디언들이 집을 짓기 위해 선인장을 심는 행위를 두고 이것을 비합리적인 미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인디언의 문화에는 거의
경탄할 수밖에 없는 자연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겸손과 외경이 깔려있다는 것을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현대 과학기술문명은 따져보면
부분적 합리성의 추구가 총체적인 비합리성에 직결되어 있는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합리성이니 과학성이니
하는 용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근본적인 반성 없이 이른바 통속적인 합리성이나
찾고 기술주의적 해결을 고집한다면 인디언식의 감수성이나 시적 세계관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겠지요.
그러나 오늘의 이 가공할 위기를 진지하게 돌아볼 때 지금 도처에서 불거지고 있는 환경재난은 산업문화의 퇴폐성과 직결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 우리 자신의 개개인의 인간성이 극도로 피폐해져버린 것과 완전히 내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환경파괴와 문화와 인간성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문제임을 인식할 때, 철저히 변혁되어야 하는 것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회의 외면적인 구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의 구조 즉 감수성과 욕망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감수성의 변혁
이 가능할까라고 회의적인 사람도 많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럴 용의를 갖느냐 안 갖느냐 하는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그렇
게 하는 길만이 활로라고 한다면 우리 자신이 인디언식으로 느끼고 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어떻든 오늘날 산업문
화가 우리 생활을 거의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는 잠꼬대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 누구에게나 결정적
인 마음의 변환, 일종의 정신적 개종의 가능성은 열려있는 것으로 우리는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러한 믿음이 근거없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조금씩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시를 좋아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향수할 수 있는 기회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시라는 것은 우리 시대에 아까 본 것과 같은 인디언식의
사고방식이나 감수성을 그 편린이나마 간직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세계이거든요. 어떤 점에서 산업문화의 압도적인 지배 밑에서
우리가 시라는 형식을 유지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근원적인 감수성을 습관적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전대미문의 엄청난 위기를 헤쳐나아감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나침반은 은유적사고를 본질적인 생명으로
하는 시적 사고, 시적 감수성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전) 영남대 교수
- 김종철의 <녹색평론선집 1>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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