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성찰

노동자와 일자리, 그리고 녹색 일자리_ 강수돌

정정진 2009. 11. 13. 22:45

 

노동자와 일자리, 그리고 녹색 일자리 

 

강수돌 || 고려대 교수, 조치원 마을 이장

 

 

1. 노동자의 삶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노동력을 팔아 노동을 해서 임금을 받고, 다른 편으로는 그 임금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구매하여 살아간다. 한마디로, 노동자의 모습과 소비자의 모습이라는 두 얼굴을 갖고 살아간다.

한편, 국가는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더 기대한다. 하나는 성실한 납세자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성실한 투표자의 모습이다.

평소에 세금 잘 내고 간헐적으로 실시되는 선거에서 투표를 잘 하는 것이 모범적인 국민의 모습이다.

 

호황과 불황, 인플레와 디플레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동자의 삶을 안정화하기도 하지만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호황기에는 경제가 잘 돌아가서 노동자와 기업 모두 신바람이 나지만, 위기 즉 불황이 오고 공황이 오면

공장이나 회사가 문을 닫고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그러나 노동자의 삶의 질 관점에서 보면 호황은 호황대로, 불황은 불황대로 삶의

질은 높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질이란, 크게 네 가지 차원을 말하는데, 건강과 여유, 존중과 평등, 정이 넘치는 공동체, 그리고 건강한 생태계 등

이다. 호황의 경우 노동자는 그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이 너무나 잘 팔리기 때문에 시장 수요에 맞추기 위해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한다.

게다가 예전에 정리해고 같은 불행한 경험을 한 노동자들일수록 '아직 잘리지 않고 있을 때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이 벌자.'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래서 더욱 일에 매달린다. 잔업, 철야, 특근이 일상화하는 것도 그냥 일이 즐거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이런 배경이

있다. 호황일수록 더욱 일에 매달리다 보니 직장과 가정 사이의 균형,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진다. 아이들과 여유롭게 놀아주거나 일상의

행복을 나누는 대화조차 할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잔업, 철야, 특근 따위로 말미암아 월급은 많이 벌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

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파트나 자동차, 그리고 아이들 사교육비 등을 생각하면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것이 노동자의 현실이다.

 

그래서 참고 견디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일하러 간다. 그러나 불황이 되면 이 모든 꿈과 희망이

물거품으로 돌변한다. 정리해고 반대 투쟁부터 구조조정 반대, 아웃소싱 반대, 공장 철수 내지 이전 반대, 비정규직화 반대 등을 외치

며 한 맺힌 눈물을 흘려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사투쟁' 또는 '옥쇄투쟁' 등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끝까지 싸워 이겨보겠다고 결단

하고 나서지만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손배 가압류, 벌금, 옥살이 등이다. 심한 경우 '공권력'의 폭력 아래 몸을 심하게 다치거나 목숨

을 잃기도 한다. 소시민적 가정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나고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힘겹게 노동조합 활동을 해봐야 결과가 이런 식

이란 생각 때문에 노동조합 활동 자체를 접기도 한다. 그럴수록 노사관계 상 사용자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이런 현실 앞에 좌절감을 느낀 노동자들은 유일한 돌파구로, '내 자식만큼은 교육을 잘 시켜 나보다는 좀 더 편안하게 살도록 만들어

보자.'라고 생각한다. 노동자 부부들 생각이 대부분 그렇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다. 대부분의 경우 아빠는 돈을 벌어

다주고 엄마는 아이 교육에 매진한다. 맞벌이 부부인 경우에조차 아무래도 아이 교육이나 집안 살림은 엄마가 더 많이 신경을 쓴다.

 

그렇다면 과연 노동자가 그 자녀의 학교 교육에 신경을 쓴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결코, 현실의 모순을 제대로 깨우쳐 잘

못된 구조를 타파하고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열어보자는 맥락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꿈을 꾸었던 자신이 현실의 냉엄함 속에

서 산산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이제 자식만큼은 저 사다리 질서, 피라밋 질서의 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기를 바라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아빠는 노동자로 살아가지만 자식들은 경영자로 살아가기를 꿈꾸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

바로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현실이 아닌가?

 

그렇게 아등바등 자식 교육을 시킨다면 이런 것 저런 것 제쳐놓고 열심히 노동한 결과 결국 아이들은 대학을 가거나 대학원을 가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물론 아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훨씬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는 있다. 이제 아이들은 다컸고 자신을 돌아보니

이미 환갑이다. 마치 매실 엑기스를 다 빼고 난 뒤의 쭈글쭈글한 매실 알맹이의 모습, 바로 이것이 20년 가까이 공부하고, 40년 가까이

노동하고 난 뒤의 노동자 모습이 아닌가? 이제 '노후'의 행복을 누려보고자 해도, 아이고, 몸이 말을 안 듣는다. 큰 병이라도 얻지 않았

다면 정말 다행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끈질긴 일중독 습성 때문에 '죽는 날까지' 일하다 죽는 게 소원이라며 무슨 일이든 하고자

달라붙는다.

 

그나마 텃밭이라도 일구며 좀 여유로운 삶을 누리는 경우라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마지막 남은 에너지가 소진할 때까지

일에 빠지거나, 반대로 '할 일'이 없다며 심심하고 자루한 삶을 억지로 살다가 때로 퇴폐적인 삶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생을 마감할

때가 되면 심신이 모두 망가져 미처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이 세상과 하직한다. 이것이 대부분 우리들의 삶의 여정이다.

 

혹시라도 자신의 삶을 마무리할 시간이 있다면,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크게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한다. 첫째는,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좀 더 잘 해 줄 걸, 하는 후회다. 둘째는 좀 더 여유롭게 살 걸, 하는 후회이며, 셋째는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걸, 이라는 후회

라 한다. 내가 꿈꾸던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걸, 왜 바보같이 생계 문제에 매달려 늘 허겁

지겁 살다가 한번밖에 없는 인생 후회스럽게 마감하는가, 하는 후회인 것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래도 열심히 일한 덕에 그

동안 어느 식구도 굶지는 않았으며, 자식들이 나보다는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구나.' 하는 점이다. 그렇게 '보통' 사람들의 인생

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자식들의 삶도 큰 변화 없이 반복된다. 그것이 사회를 구성하고 역사의 일부분이 된다.

 

2. 노동조합의 근본 원리

 

그러나 노동자의 삶이 그렇게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 정도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노동조합으로  똘똘 뭉쳐 기계

자체를 부수거나 바꾸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톱니바퀴 자체가 돌지 못하게 정지시키기도 한다. 다른 말로, 노동자들은 주어진 사회와

역사의 구성물이기도 하지만, 그 사회와 역사를 변화, 창조하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 조직의 근

본 원리는 무엇인가? 쉬운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해보자.

 

한 사장이 있다. 사업을 하려니 노동력이 필요하다. 공고문을 써 붙인다. 무수한 지원자들이 몰려든다. 실업자도 있고 다른 데서 일하는

노동자도 있다. 필요한 노동력은 극소수인데 지원자들은 정말 많다. 사장이 누구를 골라야 할 지 잘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한 사람이

손을 든다. "사장님, 저에게 하루에 5만원씩만 쳐주신다면 하루 8시간 꼬박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사장이 그를 보며

"아, 그러세요?" 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손을 든다. "사장님, 저는 하루에 3만원씩만 주면 9시간까지도 일을 확실히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제안한다. 사장의 눈이 번쩍 뜨인다. 그 말을 듣고 또 다른 이가 손을 든다. "사장님, 저는 밥만 먹여주시면 그냥 무조건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라고 한다. 모든 사람들 얼굴이 굳어진다. 너무나 황당하다는 듯이.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 사람이 탁

자를 탁 치며 울분을 토한다. "여러분, 정신을 똑 바로 차립시다. 과연 우리가 아무리 불경기이기로서니 우리 노동력을 이렇게 함부로

팔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디 고대 로마 시대의 노예라도 되는 것입니까? 아까 처음에 말씀하신 분처럼, 하루 8시간에 5만원이

안되는 조건이라면 우리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소중한 노동력을 팔아넘기지 맙시다. 여러분!" 하고 외친다. 이 말에 모든 지원자들이 맞

장구를 치며 벌떡 일어나 모두 몰려나간다.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노동조합이 설립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노동자 간 경쟁을

지양하는 것이다. 노동자 간 경쟁의 지양, 바로 이것이 노조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 사장의 입장에서는 어떤 선택이 있을까? 그렇다, 그 최소한의 요구 조건을 들어두고 그 중 가장 일 잘하고 말 잘 들을 사람을

뽑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든지 해야 한다. 다른 곳으로 가서 사업을 하려니 돈이 더 들 것 같다고 하자. 그러면 사장은 눈물을 머금

고 그 현장에서 그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일을 시킬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루 8시간에 5만원이란 노동조건이 정해졌다고 치자. 사업은

그럭저럭 잘 된다. 그런데 갈수록 노동자들이 더 많은 요구를 한다. 생산성이 올랐으니 노동시간도 줄이고 임금은 더 달라 한다. 사원

아파트도 지어주고 자녀 교육비까지 대 달라고 한다. 심지어 노조가 나서서 생산 라인의 속도나 인원 할당 문제까지 개입해 들어온다.

직접 임금과 간접 임금을 합치면 인건비가 너무 높아 타산성이 없다. 그런데 다른 사장들 이야기를 들으니,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등지

에 가면 인건비가 10배나 싸다고 한다. 아이고, 이제 슬슬 공장을 옮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국제화, 세계화 구호

아래 구조조정이 과감하게 이뤄진다. 온갖 갈등을 겪은 뒤에 사장은 마침내 중국으로 공장을 옮겼다. 인건비는 10배나 싸고 노동력은

풍부하다. 마치 한국에서 1960년대나 1970년대에 사업을 하던 시절같다. 사업가의 천국이다. 그렇게 돈을 잘 벌고 있는데, 몇 년 지나니

아, 웬 걸, 중국 노동자들도 한국 노동자들과 비슷한 구호를 내걸고 요구 조건을 들이민다. 이제는 8시간에 5만 원 정도 안 주면 일을

못하겠다고 한다. 큰일이다. 그 요구를 들어주든지, 아니면 또다시 방글라데시 같은 최빈국으로 옮겨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세계 경영,

자본의 세계화가 진전된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신자유주의 현실의 일부다.

 

바로 이 사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국가별, 기업별, 개인별로 나누어져서 경쟁적으로 움직이는 한, 노사 간 교섭에서

결코 이기기 어렵다는 점이다. 거꾸로, 노동조합으로 강고하게 뭉쳐서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요구 조건을

통일시켜낸다면 노동자의 교섭력은 폭발적으로 높아진다.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을 온갖 잣대로 분열과

경쟁을 시키는 것이 유리하고, 노동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서로 소통과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 유리하다. 조직률 자체도 중요하지만

단순한 노조 조직률 이상의 문제인 것이다. 형식적 조직률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의 통일성이다.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의 내용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합의하여 통일을 이루어내는 것, 그것과 더불어 조직적, 재정적 조직률을 드높이는 것, 바로 이것이 노동자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결정적인 점이다.

 

3. 인간다운 삶이란?

 

그렇다면, 과연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인간다운 삶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소통하고 연대하여, 또 공감하고 통일하여 꼭

이뤄내야 할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생계 해결이요, 다른 하나는 삶의 질이다. 생계 해

결이란 식, 의, 주 등 기본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다. 부자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궁핍을 해결하는 것이 목표다. 화려하지 않더라도

식, 의, 주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는 정도라면 만족할 수 있다. '충분함' 또는 '만족'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다음

으로는 삶의 질을 따져야 한다. 기본 생계 해결조차 삶의 질 관점에서 이뤄진다면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게 어렵다면 우선은

기본 생계 해결을 한 뒤에 더 이상 그것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기보다는 삶의 질 차원으로 이동해야 한다. 삶의 질이란 앞서 말한

건강과 여유, 존중과 평등, 정이 흐르는 공동체, 건강한 생태계를 영위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활과정에서는 물론 노동과정에서도 일관

성 있게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것 하나 온전할 수 없다.

 

삶의 질을 하나씩 따져 보자. 건강과 여유는 삶의 질에 가장 기본적이다. 제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출세를 해도 <모던타임즈>나

<스위트 노벰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망가지거나 일중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산다면 헛된 인생이다.

존중과 평등도 높은 삶의 질에 필수적이다. 외모나 학벌, 성별, 또 부모의 재력이나 출신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소중하게

대접받아야 한다. 그것이 높은 삶의 질을 이룬다. 정이 흐르는 공동체 역시 삶의 질 향상에 필수적이다. 공동체를 정의하는 방식은 크게

둘인데, 집단 개념과 관계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전통적으로 공동체는 '집단' 개념으로 정의했다. 즉, 같은 지역에서 같은 언어와 문화

를 갖고 있는 집단을 공동체로 했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역설적으로 그 공동체를 규정하는 순간 다른 공동체를 배제한다. 동시에 내부

의 모순을 은폐하고 획일적 응집력만 강조한다. 자칫, 인종주의나 자민족중심주의, 국가주의, 파쇼주의, 전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따라서 이와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 공동체(Community)를 그 어원처럼 서로(Com) 선물(munus)을 나누는 '관계'로 정의하는 방식이

다. 기존의 집단, 지역, 언어, 문화를 넘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노동자가 높은 삶

의 질을 누리며 살려면 서로 선물을 나누는 관계 양식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테면 다양한 이주노동자들과도, 다른 회사 노동자들과도,

업종이나 직종, 산업이 다른 노동자들과도 서로 선물을 나누는 관계로 간다면 그것이 바로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끝으로, 건강한 생태

계를 누리는 것은 삶의 질에 매우 중요하다. 흙과 물과 공기가 자연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갈수록 금수강산이 오염강산이

되고 있다. 경제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하는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삶의 질을 위해 그런 논리 자체를 과감히 버

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삶의 질 관점에서 노동과정을 성찰하고 혁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삶의 질을 노동 외적인 차원에서만 파악

하고 해결하려는 것은 진실의 절반밖에 되지 않거나 진실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 예컨대, 노동과정에서 오폐수를 마구 버리거나 노동

환경이 열악한 상황은 그대로 둔 채, 일상적 생활공간인 마을에서 '환경보존' 운동만 한다면 사태를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식의주 해결과 삶의 질 고양을 동시에 이룰 수만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다. 대개의 경우, 삶의 양만 추구하다가 삶의 질을 망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충분함이나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경향적으로 무한대의 삶의 양을 향해 달리는 자본주의 사회경

제 시스템위에서 우리가 '부자 되기'위해 발버둥 치며 사는 경우, 그 삶의 질은 불행히도 엉망으로 수렴하고 만다. 건강과 여유가 없어

지거나 존중과 평등은 사라지고 억압과 차별만 지배한다. 정이 흐르는 공동체는 사라지고 살벌한 '팔꿈치 사회'가 우리를 옥죈다. 건강

한 생태계도 갈수록 망가져 더 이상 금수강산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계속되면 한반도는 물론 지구 자체

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해진다. 그동안 이룬 성취나 문명 자체가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때가 온다는 말이다. 최근의 석유 정점,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기후 위기 등의 문제도 이러한 삶의 양 추구 과정에서의 삶의 질 파괴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노동자들은 서로 간 경쟁을 지양하고 생계 문제 해결과 삶의 질 향상을 동시에 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성찰,

소통, 대화, 토론을 줄기차게 해나가야 한다.

 

4. 노동 현실과 행복한 삶 사이의 간극

 

자본이나 권력이 노동자들에게 바라는 모습은 우선적으로는 부지런한 노동자와 소비자의 모습, 다음으로는 성실한 납세자와 투표자의

모습인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특히 노동자들은 생산과정에서 일중독에 빠지기 쉽고 이것은 주변의 칭찬이나 조직적 승진 따위를

통해 더욱 조장, 은폐된다. 게다가 생활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비중독은 노동자나 가족들이 내면에서 느끼는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끊임

없이 다른 상품을 구매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한편으로는 일중독, 다른 편으로는 소비중독이라는 두 개의 수레

바퀴가 달린 마차를 끌며 살아간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지루한 '다람쥐 쳇바퀴'라며 불평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직 내

승진이나 사회적 지위 상승을 통해 위로받고, 다른 편으로 간헐적으로 이뤄지는 휴가나 여행으로 스스로 위로를 하기도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둘다 일중독과 소비중독의 또 다른 일부분을 이룬다.

 

설사 일중독 노동자가 휴가를 간다 해도 기형적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두 가지 형태다. 하나는 휴가를 간 일중독자는 휴가지에서조

차 일에 빠져 있다. 휴대폰, 인터넷, 이메일 등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중독자를 붙들어 맨다. 오죽하면 그 배우자가 '아이고 성질

나, 차라리 회사로 돌아가라 돌아가, 나는 아이들과 함께 조용히 있다가 갈 테니.' 라고 하며 일중독자를 떠나라고 한다. 또 다른 모습은

일중독자가 온 가족을 이끌고 휴가 자체를 일중독적으로 조직한다. 새벽 몇 시에 일어나 등산을 하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아침을 재빨

리 먹고, 남들이 줄 서기 전에 아이들 놀이 기구를 몇 시 몇 분부터 몇 분까지 타게 하고, 그 다음은 뭐하고 그 다음 무엇을 하기 전에

저녁 예약을 해 놓고 기다리는 시간에 또 다른 무엇을 하고... 이런 식이다. 끊임없이 무언가 성과를 내듯이 휴가 자체도 성과를 높이

내야만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상태다. 당연히 저녁엔 초죽음이 된다. 분명히 쉬러 갔는데 쉰다기보다 좀 색다른 형태로 중노동만

하고 돌아오는 기분이다. 이런 식으로 산다.

 

평소에 일중독에 시달리다가 그것을 해소하느라고 소비중독에 빠지거나 중독적인 모습으로 휴가를 보내는 우리의 일상, 과연 우리는

이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앞서도 말한 바, 이런 식의 삶 속에서는 결코 내면에서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우리의 목표는 행복한 삶인데도 왜 현실은 이중, 삼중의 중독에 빠져 스트레스 투성

이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 간극을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개념은 '자본의 내면화'요 '강자와의 동일시'

다. 이를 통해 '뒤틀린 주체성'이 형성되었다. 요컨대, 앞에서 묘사된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참된 삶이 아니라는 말이다.

원래의 주체성이 뒤틀린 채 자본을 내면화하고 강자와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이미 우리자신의 사회적 DNA가 변해버렸다는 말이다.

 

이를 설명하는 데는 독일의 H. 하이데 교수가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란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노동사회의 기원'을 간단히

살필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노동 사회'란 그 이전의 자연 경제 상태로부터 국가의 거친 폭력을 체계적으로 경험함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야만적인 국가 폭력의 경험은 사람들에게 심대한 상처(트라우마)와 두려움을 남겼다. 두려움에 떠는 인간은 저항이나

도피가 모두 실패한 뒤에는 나름의 생존 전략으로 '강자와의 동일시'를 하게 된다. 이제 강자, 즉 자본의 논리가 약자인 나 자신의 삶의

논리인 것처럼 수용되고 내면화된다. 삶의 가치관이 되고 신념이 되는 것이다. 이제 과제는 자본이 만든 논리나 질서 '안에서' 보다 유

리한 자리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다. 더 이상 나 자신의 나약한 면이나 어두운 면을 노출해서는 곤란하다. 강하고 밝고 화려한

면만 노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돋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팔꿈치 사회' 속 무한 경쟁이 확산된다. 성공하면 나도 기득권

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일부의 성공은 다른 대부분에게 부러움과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부른다. 모든

사람들이 기득권 집단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객관적 현실인데도, 각 개인들은 노력만 하면 나도 들어갈 수 있다, 아니면 내 자식이라

도 열심히만 하면 그 집단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기득권의 질서, 사다리 질서, 피라밋 질서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

는 없고 그 질서 안에서 높은 자, 강자, 화려한 자가 되려는 경쟁만이 있을 뿐이다. '강자와의 동일시'의 결과다.

 

5. 고용 위기를 넘어 행복 사회로

 

최근의 고용 위기는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만성적이고 구조적이다. 이제 지금의 시스템 안에서 더 이상 완전 고용을 꿈꾸기 어렵

다는 것이 진지한 학자들의 통찰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대안의 실마리를 찾을 것인가?

우선은 고용의 틀 안에서 행복 사회는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앞서 본 바, 고용의 틀 안에서는 사다리 질서 안에서의 안정이나 상대

적 우위만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갈수록 불안해진다. 한 기업의 일시적 성공이 영원한 승자로 머물게 놔두진 않는다. 게다가 노동자의

생계 문제와 삶의 질 문제를 동시에 고려하는 기업일수록 그러한 살벌한 경쟁에서 탈락하기 쉽다. 갈수록 딜레마에 빠진다. 자본주의

경쟁에서 승자가 되려면 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협에 빠뜨리거나 삶의 질을 하락시켜야 유리하다. 삶의 질을 고려하는 기업은 패자가 되

기 십상이다.

 

바로 이것이 '경쟁의 한계'다.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한번 승자가 된다고 영원히 승자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시스템 자체

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무한' 경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이던 포드나 지엠조차 구제 금융 없인 파산을 모면하

기 어려운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둘째, 살벌한 경쟁의 과정에서 '20대 80의 사회'가 진전된다. 20%의 소수는 승자가 되지만 80%의 패

자는 힘겹게 살아야 한다. 이긴 기업 안에서는 노사가 '원-윈'한다고 하지만, 사회 전체 차원에서 '윈-윈'은 없다. 게다가 20%의 승자는

사회적 부의 80%를 독점하는 경향이 있다. 대다수인 80%는 나머지 20%를 갖고 살아야 하니 삶은 더욱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셋째, 승자이든 패자이든 그 경쟁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부단히 착취, 억압해야 하며, 또 자연 생태계를 부단히 파괴, 훼손해야 한다.

설사 승자가 된다 할지라도 개인적 차원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삶의 질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있다. 승자가 누리는 쾌감은 오로지

'상대적 우월감'밖에 없다. 이런 식을 모두 헛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적 모습이다.

 

실은 이 세 번째 내용은 '생산성의 역설'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기업이라면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이 경쟁력 강화인데, 이 경쟁

력의 핵심이 생산성이다. 생산성이란 투입 대비 산출의 비율이다. 투입을 줄이면서도 산출을 늘리면 높은 생산성이 나온다. 모든 기업은

이 생산성 경쟁을 통해 기득권 경쟁을 한다. 노동자들도 그 경쟁에서 이기면 일정 정도 '떡고물'을 얻게 된다. 물질적 소득 증대나 부가

급부, 비물질적 승진이나 자부심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투입을 줄이려면 인건비나 원료비, 설비비를 줄여야 한다. 인건비를 줄이

려면 정리해고, 비정규직, 외주화, 임금삭감이나 동결 등을 써야 한다. 원료비를 줄이려면 자연 훼손에 아랑곳 않고 원료를 무단 채취해

야 한다. 설비비를 줄이려면 예컨대, 오폐수 정화 장치를 설치하지 않거나 산업안전 장치를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산출을 늘리려면

노동시간 연장을 하거나 노동강도를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선택이 불행하게도 삶의 질 차원에서는 '파괴성'을 향상시킨다.

요컨대,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 안에서는 생산성 경쟁이 파괴성 경쟁으로 나타나고 만다. 이것이 생산성의 역설이다.

 

따라서 고용 위기를 넘어 행복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일자리 유지나 창출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노동 사회 패러다임을 바꾸어

야 한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무슨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일자리를 갖는가에 따라 다르게 평가하고 대접하는 그런

사회의 틀 거리 자체를 넘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즉,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생계를 위한 '기본 소득' 같은 것이 보장되어야 하고, 학습

과 노동은 자신의 적성이나 취향을 최대한 반영하되, 일정한 수준과 실력이 되어 사회에 기여한다면 일의 종류에 무관하게 비슷하게

대접하는 사회가 되도록 만들면 된다. 그것이 바로 행복 사회가 아닐까?

 

6. 행복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과 과제 - 녹색 일자리의 가능성

 

이제 좀 분명해졌다. 무한한 자본주의 경쟁 아래서는 소수의 승자나 대다수의 패자 모두 모두 행복해지기 어렵다. 갈수록 삶의 질은

악화된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노동을 통해 성공과 출

세가 결정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하고 고르게 대접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돈과 권력을 핵심으로 하는 기득

권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은 한 줄로 세우는 무한 경쟁 사회가 아니라 각 개인의 소질과 취향을 반영하여 학습과 활동을 유기적

으로 조직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불행하게도, 상층부는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기득권 체제에 중독되어 있고, 중하층부는 기득권을 동경하면서 중

독되어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갈수록 기득권 체제가 강화될 뿐, 바람직한 행복 사회로의 변화는 요원하다. 그런데 상층부는 자신의 손

아귀를 놓을 가능성이 극히 낮다. 기득권에 물적으로 중독되어 있기에 중독 상황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득권을 동

경하고 집착하되, 물적으로는 중독되어 있지 않은, 중하층이 자기 삶의 허상을 깨고 실상에 눈을 떠야 한다. '하면 된다'는 극히 일부분

에만 해당할 뿐, 대부분에게는 '해도 안된다.'는 것이 삶의 실상이다. 또 '해서 된' 경우조차 외형적으로는 성공해도 내용적으로는 참

행복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 삶의 실상이다. 이런 실상을 똑바로 보지 않은 채, 외형적인 화려함과 찬란함에 매혹된 나머지

걸신들린 듯 허상에 매달리는 것은 귀한 인생살이를 헛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노동자가 아무리 조직되고 단결하여 투쟁하더라도 그

런 허상을 좇는 단결과 투쟁이라면 그 또한 헛된 것에 그치고 만다. 해도 해도 삶이 고달퍼진다면, 그럴수록 체념과 포기를 할 것이 아

니라 더욱 근본에 천착하여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행복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소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사회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과 같은 '경쟁력' 중심의 구

조조정이 아니라 행복 사회를 위한 '삶의 질' 중심의 구조 혁신이 필요하다. 첫째, 모든 분야에서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

기를 해야 한다. 모두 일하되 조금씩 일한다는 논리로 접근하면 고용 위기를 넘어 삶의 위기도 해결할 수 있다. 둘째, 주거, 교육, 의료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한다. 기본 소득 보장을 포함한 사회공공성 강화 운동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생활비용 중에서 이런 문제들을

사회 공공으로 해결하면 굳이 엄청난 소득을 위해 잔업, 철야, 특근을 일상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셋째, 개성 있는 고교 평등화,

개성 있는 대학 평등화, 개성 있는 직업 평등화를 이뤄야 한다. 자신의 개성과 소질에 따라 배우고 싶은 것을 실컷 배워 일정한 실력을

키우면 사회적으로 비슷하게 대접하는 사회, 이것이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다. 그래야 각자는 자신의 능력을 더욱 발휘할 것이고

사회적으로 생계 문제나 삶의 질 문제를 해결해내는 데 필요한 자원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유기농법으로 농산물을 생산

하는 농민들을 공무원처럼 대우해야 하며, 다른 생산 분야들도 삶의 질 차원에서 과감히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즉, 삶의 질 향상에 도

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없애거나 전환을 해나가야 하며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분야나 조직들은 더욱 장려해야 한다.

 

이와 같이 전 사회적 차원에서 '노동 사회' 패러다임이 아닌 '행복 사회' 패럳라임을 만들기 위한 조건을 만들면서도, 동시에 한 나라를

중앙집권적으로 다스리는 현재의 패러다임을 자율적 생태공동체의 네트워크로 재편해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선생이 말한. '70만 개

이상의 마을공화국' 아이디어가 이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현재 한국은 형식적으로 지방자치제가 실시 중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여전

히 중앙집권적 국가의 하위 부속물임과 동시에 중앙집권적 정치판을 그대로 재생산하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하다는 말

이다. 따라서 지역마다, 마을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언론, 종교 등 모든 삶의 영역들이 자율, 자치, 자립의 원칙위에 재구성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행복 사회요, 녹색 사회다. 전 사회적 구조 혁신은 이러한 과정을 더욱 촉진할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

으로는 한 나라가 자율적 생태공동체의 연결망으로, 나아가 세계 전체가 그런 연결망의 확장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런 운동을 주도할 주체는 역시 풀뿌리 민초다. 자본이나 권력에 기대할 것은 별로 없다. 기존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지식

인운동, 환경운동, 학생운동, 빈민운동, 청년운동 등이 모두 소통하고 연대해야 하는 까닭이다. 소통과 연대는 동정과 도움의 차원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좀 여유 있는 자가 가여운 '희생자'들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처해 있는

구조적 병폐의 뿌리를 함께 힘을 합쳐 잘라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일이다. 참된 연대란 '적십자' 운동이나 '119 구조대'와 같은

활동이 아니라 모순과 고통의 현장에서 '스스로' 마음과 힘을 합쳐 모순과 고통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과정이다. 노동자가 진정 인간답

게 살기 위해서라도 기존 노동운동의 틀을 과감히 넘어가야 하는 까닭이다. 이 과정에서 유념할 것은 현실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연

대 운동의 과정이 지나치게 엄숙하고 비장한 분위기로 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보다 편안하고 즐겁게, 가벼운 듯 보이되 진지하고,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갈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삶 속에 자연스레 녹아서 자연스럽게 가야지 억지와 인공으로 얼룩지면 생

명력이 없다. 나아가 대안 사회란 하나의 지향점이자 도달하려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를 향해 나아가는 치열한 과정이 아니던

가? 따라서 대안에 대해 지나치게 세밀한 설계도를 그릴 필요는 없다. 커다란 방향성 안에서 구체적인 것은 운동 과정에서 부단히 대화

와 성찰을 통해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과연 우리는 부유한 '임금 노예'로 살다가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말 것인가, 아니면 진정 자유롭

고 인간다운 '녹색'의 삶을 늘 알차게 살다가 큰 후회 없이 아름답게 인생 마무리를 할 것인가...

 

<녹색 일자리의 가능성>

 

1) 생태적 자율 공동체 만들기

2) 밥상 혁명과 관련된 일자리

3) 교육 혁명과 관련된 일자리

4) 마을 혁명과 관련된 일자리

5) 생산 혁명과 관련된 일자리

6) 주거 혁명과 관련된 일자리

7) 소비 혁명과 관련된 일자리

8) 문화 혁명과 관련된 일자리

 

 

* 강수돌(姜守乭) : 아침마다 부춧돌 형 잿간에 똥을 누고 "똥아, 잘 나와서 고마워." 라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대학 선생이다.

                          3명의 아이들에게 밥상에서 "밥이 똥이고 똥이 밥이다."를 강조합니다. 현재 고려대 세종캠퍼스에서 돈의 경영이

                          아니라 삶의 경영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저서/역서 :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이후, 2009.

                   [살림의 경제학], 인물과 사상사, 2009.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생각의나무, 2008.

                   [경제 속에 숨은 광고 이야기](역), 초록개구리, 2006.

                   [나부터 교육혁명], 그린비, 2003.

 

 

* 출처 : [2009 녹색일자리한마당 기획강연 "너, 어떻게 살래?"]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