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누가 깨닫는다고 했는가?
깨닫겠다고 하는 그 사람이 문제다.
깨달으려고 해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깨달음은, 굳이 말을 하자면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것이고
꽃향기처럼 풍겨오는 것..
그러니 깨닫기 위해서 정진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옛 부처님과 조사(祖師)들은 한결같이 말한 바 있다.
본래 성불(成佛)이라고, 본래부터 다 이루어져 있고
갖추어져 있다는 말씀이다.
본래 성불이라면 어째서 다시 수행을 하는가?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닦지 않으면 때묻으니까 마치 거울처럼 닦아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럼 깨달음이 드러날 때는 언제인가?
우리들의 생각과 욕망이 비어 있을 때
깨달음을 기다리는 그 마음이 사라졌을 때
안팎으로 텅텅 비어 있을 때
이때 문득 눈부신 햇살이 내 안에서 비쳐나온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바른 수행이 아닌 줄 알아라.
대오선(待悟禪)은 선이 아니란 말을 기억하라.
종교적인 여행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그저 늘 새롭게 출발할 뿐이다.
그 새로운 출발 속에서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난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자신 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득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신비로운 세계다.
홀로 있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고독한 존재다.
그 고독과 신비로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거듭거듭
안으로 살피라.
무엇이든지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성인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남한테서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겪은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차린 것이 아니다.
남이 겪어 말해놓은 것을 내가 아는 체할 뿐이다.
진정한 앎이란 내가 몸소 직접 체험한 것,
이것만이 참으로 내것이 될 수 있고 나를 형성한다.
공부가 됐건 일이 됐건 전적으로 하라.
어중간한 것은 사람을 퇴보시킨다.
하다가 그만두지말라 안 한 것만 못하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한 무슨 일이든지
전력을 기울여 하라.
그때 자기 안에서 어떤 변혁이 일어난다.
그 변혁의 과정에서 참된 자기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규칙적인 명상의 시간을 가지라.
우리가 아무 잡념 없이 깊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그때 우리는 곧 부처다.
우리 안에 있는 불성이 드러난 것이다.
깊은 명상 속에 있을수록 의문이 가라앉는다.
안으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에게 물을 일이 하나도 없다.
의문이란 마음이 명상하지 않고 들떠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진정한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있다.
밖에 있는 스승은 다만 우리 내면의 스승을 만나도록
그 길을 가리켜 줄 뿐이다.
받아들이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어 있으면 놓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말수가 적어야 한다.
말은 생각을 어지럽힌다.
낙엽으로 뒹구는 후박나뭇잎 치다꺼리에 수고가 많겠다.
늘어나는 빈가지에서 새봄의 싹을 찾아보아라.
나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 법정스님의 "수행자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
'힐링&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거의 상처를 극복했던 방법_ 공지영 (0) | 2009.03.15 |
---|---|
무엇때문에 태어났고 왜 살아야 하는지를_ 도법스님 (0) | 2009.03.01 |
[스크랩] 삶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 법정스님 (0) | 2009.02.13 |
한국 간화선에 대한 고언 (0) | 2009.02.13 |
아름다운 마무리_ 법정스님 (0) | 2009.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