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발

디테일의 힘_ 나경원

정정진 2021. 4. 10. 18:39

스폐셜올림픽이 끝난 뒤, 젊은이들을 만나느라 하루하루가 바쁘다. 강연 때문이다. 한창 중요한 시기에 있는 그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쓸모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강단에 설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상황에 맞춰 강연 내용은 그때그때 바뀌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미쳐라(Go Crazy).

다르게 하라(Be different).

 

남다른 열정과 차별성을 꼭 강조한다. 이 두 가지에 일의 시작과 끝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정은 끝까지 몰두하는 성실과 끈기로 일의 완성도, 즉 디테일을 높인다. 색다른 시도와 도전은 나만의 차별점을 특화시키는 창의성, 즉 크리에이티브를 키운다.

 

디테일과 크리에이티브, 이 둘은 언뜻 보면 모순된 조합 같지만 볼트와 너트처럼 상호 보완적 관계이다.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균형을 잃고 만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크리에이티브는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고, 창의성이 부족한 디테일은 구태의연하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맡겨지는 일은 복사 같은 기본적인 업무가 대부분이다. 종이 한 장을 복사하더라도 조금씩 다르게 해보는 데서 디테일과 크리에이티브를 키우는 훈련이 이루어진다. 하루는 종이 위쪽에 여백을 넣고, 다음 날은 아래쪽에 여백을 넣으면서 어떤 것이 더 나은지 찾아보는 것이다.

 

매일 반복하는 일도 '어제하고는 다르게 해야지' 생각하면 열정이 생기고 혼이 담긴다. 어떤 일이든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마지막 1퍼센트에 달려 있다. 늘 하던 대로 하면 그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세심한 관찰과 집요한 고민, 꼼꼼한 마무리는 일의 완성도를 높이고, 창의적인 발상과 차별화된 시도는 신선하고 획기적인 결과물을 낳는다. 디테일이라는 탄탄한 뿌리를 바탕으로 크리에이티브라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경험이었다. 국회의원 시절 방문한 베이징 올림픽은 어느 때보다 고생스러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보안을 위한 교통 통제 때문에 버스를 타기위해 한 시간이 넘도록 걸어야 했던 것이다. 화려한 개막식의 황홀감에 젖어 있던 그때, 고생길이 시작될 줄 누가 알았으랴.

 

높은 구두 때문에 걷기가 힘들어 단화로 갈아 신었는데, 새 신발이라 발이 다 까지고 말았다. 신을 벗고 맨발로 걸으니 아스팔트 바닥이 고역이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피해 페인트칠 된 줄을 따라 겨우 발을 디뎌 숙소에 오니,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나 같은 관중이야 조금 피곤하고 말면 그만이지만, 선수들이 힘든 것은 진짜 문제였다. 늦게까지 피로가 쌓여 경기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경험을 떠올려 평창 대회를 준비하면서는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했다. 어떻게 하면 선수들을 안 춥게 하고, 덜 걷게 할지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작은 예지만 '핫팩 도시락' 역시 고심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추운 날씨 때문에 스티로폼 용기에 담아 와도 도시락은 금방 식어 버렸다. 조금이라도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방법을 고민했다. '아 보온체는 있는데 발열체가 없어서 그렇구나!' 그래서 도시락마다 핫팩을 하나씩 넣게 되었다. 이름하여 핫팩 도시락이다.

 

올림픽 개,폐막식의 하이라이트인 선수 퍼레이드 준비도 난관에 부딪혔다. 용평 돔이 너무 작아 선수와 가족들 외에 관객들이 앉을 자리는 300석밖에 없었다. 겨우 300명이 치는 박수로는 아무래도 너무 썰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선수들을 미리 앉혀 놓는 것이었다. 퍼레이드 입장 순서까지 밖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덜 추울 것이고, 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선수들은 박수를 쳐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선수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시간을 재기 위한 시뮬레이션도 수차례 계속되었다. 동선이 꼬이지 않고 차례로 들어가려면 어느 섹터부터 호명해야 하는지도 마지막까지 체크했다. 그렇게 꼼꼼히 준비해도 막상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그러니 가능한 한 미리 대비해 두어야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흔히 창의적인 생각은 우연하게 얻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떠오르는 순간적인 아이디어라고 말이다. 물론 절반은 맞는 말이다. 바쁘게 움직이던 뇌가 휴식하는 사이, 마구 엉켜 있던 정보들이 정리되면서, 궁리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탁 하고 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제는 다양한 지식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는 것 아닌가.

 

크리에이티브는 감나무에서 우연히 떨어지는 감이 아니다. 입 벌리고 기다린다고 해서, 저절로 감이 떨어지는 요행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정성껏 기르는 노력이 있어야 맛있는 감을 수확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는 머리가 아닌 엉덩이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온 이유다.

 

크리에이티브라는 감을 따느냐 마느냐는, 얼마나 더 오래, 집요하게 파고드느냐에 달려 있다. 즉 성실하고 끈질긴 디테일에 좌우되는 것이다. 이게 과연 맞을까, 좀 더 다르게 바꿀 순 없을까 하는 의심과 고민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태어난다.

 

미치면 달라질 수 있다. 잘 알아야 새로워질 수 있다. 남다른 창의력,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는 미치도록 파고드는 디테일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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