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수행

목숨 뿌리는 다를 게 없다_ 법정스님

정정진 2015. 8. 14. 19:30

 

 

목숨 뿌리는 다를 게 없다

 

1976년 8월 엄청나게 더운 날 박석무 선생은 김남주 시인, 김정길 선생과 함께 불일암을 찾았어. 점심을 들고 광주에서 출발해서 해질 무렵에야 불일암에 도착했는데 스승은 계시지 않았대. 마루에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스승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 오셨다더군. 일행은 함께 가지고 갔던 수박을 쪼개 먹었는데 다 드시고 난 스승이 땅바닥에 떨어진 수박씨를 하나하나 쓸어 담으시더래.

 

박석무 선생이 "왜 번거롭게 주우세요?" 하고 여쭸더니 그냥 두면 냄새를 맡고 개미들이 달려들고 잘못하면 밟아 죽이게 될지도 모르니까 쓸어 담아야 한다고 그러셨대.

 

스승이 지리산에 있는 어느 작은 암자에서 지낼 때 여름철 안거가 끝난 뒤 함께 지내던 도반들은 다 하산해 버리고 텅 빈 암자를 지키고 계셨대. 그땐 등산꾼도 구경꾼도 없던 때라 암자는 그야말로 조용했다네.

 

사람이라고는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이따금 지나갈 뿐이었지. 어느 날 공양을 마치고 헌식을 하러 뒤꼍 헌식돌로 나갔더니 꽤 큰 쥐 한 마리가 달아날 생각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더래. 대개 다람쥐나 새가 와서 쪼아먹으니 헌식돌에 음식찌꺼기가 남아 지저분한데 여기서는 늘 말끔했다는 거지. 알고 보니 날마다 이 쥐가 와서 먹어치웠기 때문인 것이라. 그땐 스승이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을 때라 한낮에 공양을 끝내고 헌식을 하러 가면 으레 그 쥐가 기다리고 있었대.

 

그전에는 쥐꼬리만 보아도 소름이 끼치곤 했는데,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쥐를 만나니 오히려 반가우셨다는 군. 그 뒤로 헌식을 보다 많이 주었다지. 쥐는 무럭무럭 자라 보통 쥐 세 곱이나 됐대. 그러다 쥐에게 한마디 일러주어야겠다고 생각이 미친 스승은 쥐가 다 먹기를 기다려 말을 거셨어.

 

"쥐야, 네게도 영식靈識 이 있거든 내 말을 들어라. 네가 여러 생에 익힌 업보로 그처럼 흉한 탈을 쓰고 있는데, 이제 청정한 수도장에서 나와 같이 지낸 인연으로 그 탈을 벗어 버리고 다음 생에는 좋은 몸 받아 해탈을 해라."

 

신기한 일은 다음 날 헌식돌에 나가니 쥐가 보이지 않아 웬일인가 살펴보니 쥐가 헌식돌 아래 죽어 있더래. 사람이 사람을 못 미더워하는 세상에서, 쥐가 사람 말을 알아들었구나 싶어 대견스러우셨대. 거죽이 다를 뿐 착하게 살려는 목숨 뿌리는 조금도 다를 게 없음을 거듭 거듭 확신하면서 염불을 하고 그 자리에 묻어주셨대.

 

법정스님을 그리다, 달 같은 해 / 기연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