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사람이여, 지금 떠나라.
너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이 사는 곳
아무도 너를 아는 이 없어
네 영혼 구름처럼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어 안달을 한다.
그러나
오, 사랑하는 사람이여, 너는 볼을 붉히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좀 더
풍요로운 내일을 기다리겠노라 한다.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저축한다 말하지
인생의 황금시절을 빛바랜 몇 닢
지폐로 바꿔 통장을 채우면서 모든 것을
결코 오지 않는 내일로 미루지.
그러다가 문득 젊음의 신선한 호기심
용기는 간 곳이 없고 누렇게
주름진 손, 미심쩍은 노년의 의혹만 움켜쥐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는 걸
알지 못하지. 마치 쇠똥을 떠나지 못하는
말똥구리처럼.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여, 지금 떠나라.
끈적이는 집착 다 놓아 버리고
훌훌 넓은 세상으로 떠나라. 그물에 걸림 없는
바람처럼 대자유를 찾아
지금 당장 떠나라.
*
월식(月蝕)
늦은 퇴근길
88 올림픽 도로를 달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하늘
반달이 떴네.
엇!
누군가 한 숟가락
귀퉁이를 떠먹었네.
아니, 무슨 달이 저렇지?
두 숟가락
어?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부지런히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 저리 돌린다.
시끄러운 음악과 광고
너절한 잡담뿐
진실이 증발한 세상
누군가
한 숟가락씩 떠먹어 버린
달 이야긴 없다.
*
파리 두 마리
피서 인파 철 지난
강원도 두메 알프스 산장
마타리 노란 꽃 손 흔들며 반기는데
현관문 열고 들어선
퇴락한 객실
줄줄 새는 화장실 물소리
퀴퀴한 곰팡냄새 속에서
파리 두 마리
환영인사나 하듯
비실비실 내 주위를 맴돈다.
자꾸만 성가시게 이아치는 파리 두 마리
에잇!
신문지 말아 높이 치켜드니
얼른 식탁 위에 납작 엎드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두 손을 싹싹 비벼댄다.
그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네 삶터를 침범한 이 강자의
횡포를 보아라
나는 그만 슬며시 들었던 팔을 내린다.
순간적으로
발끈
마음 속에 일었던 살의(殺意)가 부끄럽다.
여름의 끝물 거두어 가듯
폭풍우 내려치는
알프스 산장에서의 사흘
내 마음을 알아챘음일까
파리 두 마리
신기하게도
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시는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
콩나물
운명의 어두운 그늘에서
몸 누일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오로지 물만 마시며
목숨을 부지해온 세월일레
맑은 물에 정갈히 몸을 씻고
가슴 속에 묻어둔
순결한 희망은 쑤욱 쑥
개나리 꽃망울같이 자라났다오.
고단한 삶
눈물 섞어 이야기 하는
저 아낙네여.
주름진 손으로
한 움큼씩 건져 올리는
여린 꿈은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불 밝힌 저녁식탁의
아삭이는 향기로 달려가네
한 사발
따끈한 위로의 국물 되어
서민들 쓰린 속을 달래주네
용기가 되어주네.
*
밤은
밤은
사물(事物)들이 눈 뜨는 시간
낮 동안의 헛된 빛깔과 모양을
벗어 버리고
오롯이 드러내는 제 본래의 모습
시작도 끝도 없는
그 순수한 자리에서
그윽한 향기로 피어나는 시간이다.
유정(有情)한 것이거나 무정(無情)한 것
해맑은 마음의 귀 활짝 열고
깊은 침묵으로 나누는 대화
따뜻한 교감(交感)으로
생명의 기쁨
새벽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이 밤
봄비 속에서
멍울멍울 무리지어 피어있는
개나리꽃
신비한 낯선 얼굴이여.
*
진관사 가는 길
-1980년대 어느 봄소풍 길에서-
철 늦은 봄 소풍길
아카시아 산초꽃 흰구름
향기에 취한 노파
산나물 바구니 앞에 놓고 졸고 있는데
풍선처럼 터지는
갈래머리 여학생들 웃음 사이로
비틀걸음 흔들리는 초로(初老)의 사내
마음 속 병이 깊어
석 삼년을
진관사 부처님 찾아 간다네.
데모대 앞장 선 서울대생
외아들
강제로 군대에 끌려간 녀석
폴폴폴 봄날의
먼지 날리듯
하얀 가루 되어
아비 품에 날아들었다네.
훈련 중 사고였다고
시퍼런 비수
가슴에 꽂고
어떻게 살아갈까
어디에 마음 둘까.
핏발 선 아비의 눈
불콰히 낮 술에 젖어
진관사 가는 길
연록색 나뭇잎들 반짝반짝
달콤한 봄 소풍길
산속에선 뻐꾸기만 울어쌓네.
_ 임완숙, <우리의 사랑은> 시집
* 임완숙 :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 인드라망생협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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