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게묻다

우리의 사랑은_ 임완숙

정정진 2012. 10. 15. 23:13

*

사랑하는 사람이여, 지금 떠나라.

 

너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이 사는 곳

아무도 너를 아는 이 없어

네 영혼 구름처럼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어 안달을 한다.

 

그러나

, 사랑하는 사람이여, 너는 볼을 붉히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좀 더

풍요로운 내일을 기다리겠노라 한다.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저축한다 말하지

인생의 황금시절을 빛바랜 몇 닢

지폐로 바꿔 통장을 채우면서 모든 것을

결코 오지 않는 내일로 미루지.

 

그러다가 문득 젊음의 신선한 호기심

용기는 간 곳이 없고 누렇게

주름진 손, 미심쩍은 노년의 의혹만 움켜쥐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는 걸

알지 못하지. 마치 쇠똥을 떠나지 못하는

말똥구리처럼.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여, 지금 떠나라.

끈적이는 집착 다 놓아 버리고

훌훌 넓은 세상으로 떠나라. 그물에 걸림 없는

바람처럼 대자유를 찾아

지금 당장 떠나라.

 

*

월식(月蝕)

 

늦은 퇴근길

88 올림픽 도로를 달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하늘

 

반달이 떴네.

 

!

누군가 한 숟가락

귀퉁이를 떠먹었네.

 

아니, 무슨 달이 저렇지?

 

두 숟가락

?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부지런히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 저리 돌린다.

시끄러운 음악과 광고

너절한 잡담뿐

 

진실이 증발한 세상

 

누군가

한 숟가락씩 떠먹어 버린

달 이야긴 없다.

 

*

파리 두 마리

 

피서 인파 철 지난

강원도 두메 알프스 산장

마타리 노란 꽃 손 흔들며 반기는데

 

현관문 열고 들어선

퇴락한 객실

줄줄 새는 화장실 물소리

퀴퀴한 곰팡냄새 속에서

파리 두 마리

환영인사나 하듯

비실비실 내 주위를 맴돈다.

 

자꾸만 성가시게 이아치는 파리 두 마리

에잇!

신문지 말아 높이 치켜드니

얼른 식탁 위에 납작 엎드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두 손을 싹싹 비벼댄다.

 

그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네 삶터를 침범한 이 강자의

횡포를 보아라

나는 그만 슬며시 들었던 팔을 내린다.

 

순간적으로

발끈

마음 속에 일었던 살의(殺意)가 부끄럽다.

 

여름의 끝물 거두어 가듯

폭풍우 내려치는

알프스 산장에서의 사흘

내 마음을 알아챘음일까

파리 두 마리

신기하게도

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시는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

콩나물

 

운명의 어두운 그늘에서

몸 누일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오로지 물만 마시며

목숨을 부지해온 세월일레

 

맑은 물에 정갈히 몸을 씻고

가슴 속에 묻어둔

순결한 희망은 쑤욱 쑥

개나리 꽃망울같이 자라났다오.

 

고단한 삶

눈물 섞어 이야기 하는

저 아낙네여.

 

주름진 손으로

한 움큼씩 건져 올리는

여린 꿈은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불 밝힌 저녁식탁의

아삭이는 향기로 달려가네

 

한 사발

따끈한 위로의 국물 되어

서민들 쓰린 속을 달래주네

용기가 되어주네.

 

*

밤은

 

밤은

사물(事物)들이 눈 뜨는 시간

 

낮 동안의 헛된 빛깔과 모양을

벗어 버리고

오롯이 드러내는 제 본래의 모습

 

시작도 끝도 없는

그 순수한 자리에서

그윽한 향기로 피어나는 시간이다.

 

유정(有情)한 것이거나 무정(無情)한 것

해맑은 마음의 귀 활짝 열고

깊은 침묵으로 나누는 대화

따뜻한 교감(交感)으로

생명의 기쁨

새벽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이 밤

봄비 속에서

멍울멍울 무리지어 피어있는

개나리꽃

신비한 낯선 얼굴이여.

 

*

진관사 가는 길

-1980년대 어느 봄소풍 길에서-

 

철 늦은 봄 소풍길

아카시아 산초꽃 흰구름

향기에 취한 노파

산나물 바구니 앞에 놓고 졸고 있는데

 

풍선처럼 터지는

갈래머리 여학생들 웃음 사이로

비틀걸음 흔들리는 초로(初老)의 사내

 

마음 속 병이 깊어

석 삼년을

진관사 부처님 찾아 간다네.

 

데모대 앞장 선 서울대생

외아들

강제로 군대에 끌려간 녀석

폴폴폴 봄날의

먼지 날리듯

 

하얀 가루 되어

아비 품에 날아들었다네.

 

훈련 중 사고였다고

시퍼런 비수

가슴에 꽂고

어떻게 살아갈까

어디에 마음 둘까.

 

핏발 선 아비의 눈

불콰히 낮 술에 젖어

진관사 가는 길

연록색 나뭇잎들 반짝반짝

달콤한 봄 소풍길

 

산속에선 뻐꾸기만 울어쌓네.

 

_ 임완숙, <우리의 사랑은> 시집

* 임완숙 :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 인드라망생협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