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 대한 이야기
사람들은 늘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평화를 찾아 절, 교회, 인도, 티베트, 히말라야를 가곤 합니다. 그곳에서 평화를 느끼고 왔다며 다시 가고 싶어 합니다. 평화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우리 삶의 실상을 따져보십시오. 평화에 대한 환상을 쫓거나 착각에 빠져 지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임을 알게 됩니다.
일상적으로 평화라는 말은 무성한데 현실적으로 평화의 삶은 있지 않습니다. 평화는 어디에 있을까? 평화의 정체는 무엇인가?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평화라는 말을 지금 여기 현실로 갖고 왔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 사실과 진실에 연결시켜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따져보아도 평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화의 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밖의 교회, 절, 인도, 하늘 등 그 어느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디에도 무지갯빛 평화는 있지 않았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평화는 손뼉소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조건이 형성되면 그 순간 그 자리에 현재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평화였습니다.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시공간 그 어디에도 말로만 있을 뿐 삶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손뼉소리처럼 평화는 안에 있다거나 밖에 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 의해 주어지거나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체적으로 보편적 진리의 길인 생명의 질서에 따라 낮춤, 비움, 나눔, 존중, 배려, 감사 등 평화의 조건을 만들면 있는 것이고, 조건을 만들지 않으면 없는 것이 평화였습니다. 조건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 평화였습니다.
논리적으로 평화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그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평화라는 말은 진리를 외면한 반생명, 비인간적인 행위인 싸움, 전쟁에 대한 상대적 표현입니다. 싸움과 전쟁의 원인인 무지, 불신, 불만, 갈등, 대립, 불안, 공포, 분노, 증오가 없는 상태 즉 싸움과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인 것입니다. 화목과 평화의 원인인 이해, 존중, 비움, 나눔, 관용, 만족이 있는 상태 즉 신뢰와 사랑이 작동하는 상태가 평화입니다. 이 정도일 뿐, 그 밖의 특별한 무엇이 있지 않습니다.
평화는 그 어디에 있는 것도, 그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체적으로 평화의 삶을 살아야만 실현되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렇다면 그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먼제 주체적인 자기 정체성 또는 보편적 진리의 세계관을 확립(내 생명, 내 존재에 대한 자각)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 생명의 실상은 본래 분리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온 우주가 모두 참여하여 이루어진 것이 지금 여기 내 생명입니다. 내가 곧 너이며, 네가 곧 나입니다. 홀로이면서 전체이고, 전체이면서 홀로이며, 따로이면서 함께이고, 함께이면서 따로입니다. 내가 곧 우주며, 우주가 곧 나입니다. 생명의 진리인 모심과 섬김으로 온전하게 잘 어울려 평화롭게 존재하고 활동하는 상태가 회복해야 할 생명의 본래 모습입니다. 존재의 실상인 이 사실에 대해 온전하게 이해하고 확신해야 합니다.
다음은 정체성에 대한 깨어 있음과 집중(흔들림 없는 평정)을 가꾸는 것입니다. 주체적으로 존재의 실상인 불일불이의 한몸 한생명의 관점에서 나와 너, 나와 사회, 나와 자연 등 매 순간 상황마다의 실상을 잘 보고 파악하고 이해하여 지혜롭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대,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 침착함, 부드러움, 여유로움, 안정됨, 흔들림 없음, 즉 주체적으로 평정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입니다.
이 밖에도 생리적 조건, 사회적 조건, 자연 환경적 조건 등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총체적입니다. 기본적으로 주체적 조건을 확립하면 기타의 조건들을 효율적으로 조절하고 활용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정리한 것처럼 불일불이의 한몸 한생명인 진리의 세계관을 갖고 늘 지혜롭게 깨어 있음과 집중(흔들림 없는 평정)의 상태로 자신을 대하고 상대를 대하고 사건을 대하고 사회를 대하고 자연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평화의 길을 찾게 되고,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평화는 결코 도달해야 할 목적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조건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산물이 평화입니다. 한마디로 평화의 조건은 평화로움 자체입니다. 평화에 도달하는 길은 평화로움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다. 그 어디 그 누구도 평화로움을 떠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 곳,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가꾸어 낸 평화로움만이 평화에 도달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입니다. 이 길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직접 경험한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상이암에서 일구어 낸 평화
산짐승들만 오가는 깊은 산중 절이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정겨운 적막한 산중도량 상이암에서,
순례단은 두 시간이 넘도록 평화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리를 정리하면서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지금 평화롭습니까?"
순례단원들이 밝고 상쾌한 표정을 지으며,
"예, 평화롭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평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평화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지금 여기에서 함께 만들었습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편안함, 여유로움, 자유로움, 흐뭇함, 만족스러움, 어울림 들입니다."
"누가 평화를 만들었습니까?"
"우리들이 만들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평화롭게 합니까?"
"몸과 마음이 현재에 온전하게 존재함,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가득함,
배부르고 등이 따뜻함, 주제에 대한 집중과 자유로운 대화, 소통, 공감,
정교한 대화 방법과 기술들이 우리를 평화롭게 합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평화에 대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갖추어진 상태가 평화
입니다. 잘 알고 있듯이 평화는 뭇 생명들의 원초적 염원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뭇 생명의 절절한 염원인 평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참으로 멋진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들은 평화를 일구어 낸
기적의 주인공들입니다. 여기에서 가능한 것은 어디에서나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언제나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입니다.
신비의 현장은 언제나 지금 여기입니다. 평화가 이루어진 그때,
그곳이 바로 천국이요 극락입니다. 평화를 이루어 낸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이 그대로 예수요 부처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밖에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충분합니다."
순례단원 모두가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고 대화의 자리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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